김우선 목사(베데스다교회 원로)
백두진 국무총리는 브라질 대사를 불러 철수 원인을 묻자, 한국이 브라질 산 커피를 수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로 당시 미국의 압력에 의해서 브라질 커피를 수입하지 못하고 미군 전용 PX에서 나오는 커피만 사용했다. 정부는 백두진 총리를 브라질에 보내 브라질 대통령 매디시(Medici)를 만나 년간 2백만 불의 브라질 거피를 수입하겠다는 의사를 표하고 수입계약을 체결하면서 브라질 대사관은 잠정적으로 서울에 상주할 수 있게 되었으며 브라질 이민은 계속되었다.
주한 브라질 대사관 한국 이민자 2,000명의 쿼터 본국 정부에 신청
1971년에 한국 보건사회부가 주한 브라질 대사관에 브라질 이민 희망 신청자 3,000명을 통보한 중에서 1차로 2,000명의 쿼터를 브라질 외무성으로부터 받았다. 주한 브라질 대사관은 일본 주재 극동 이민심사 위원회원들을 불러 기술 및 건강 심사를 하던 중에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브라질 대사관의 한국 직원을 통해서 500명을 추가로 이민 신청서를 제출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준장 1명에 영관 급 예비역 장교와 그의 가족들을 포함한 500명을 해외에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이들에게는 브라질 이민을 보다 쉽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침술을 가르쳤으며 당시에 영관급 출신 교포가 브라질에 도착한 후 브라질 침술 보급에 많은 기여를 했다. 브라질 대사관은 정부에 500명의 쿼터를 추가로 신청하여 허락을 받음으로 총 2,500명이 심사를 받고 브라질 영주비자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이민비자를 받은 2,000명의 한인 이민자들의 대부분이 공대 출신으로 세계 이민자들 중에서 가장 학력이 높았다. 이들은 전기 기술자. 기계 기술자, 목사와 의사와 같은 이중직을 보유하고 있는 고급 인력이었다.
마지막 기술 단체이민 심사
1971년 말 일본 주재 극동지구 이민 심사위원회의 파견 한국 이민심사가 끝났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심사 받고 영주비자를 받은 인원을 년도 별로 보면 1967년 1,250명, 1968년 1,120명, 1969년 1,200명, 1970년 2,500명 등 총 6,070명이었다. 이중에 각 개인 사정으로 이민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고, 입국비자 1차 연장 후 시효가 지나, 후에 파라과이 등 브라질 인접국을 통해 브라질에 들어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72년부터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의 초청이나 유학이나 특수 기술초청으로 입국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브라질 정식 이민이 정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