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숙자 선교사의 선교편지)내놓아라-1
2015/08/21 21:22 입력  |  조회수 : 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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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자 선교사(베데스다교회)
 
섭씨로 40도를 웃도는 빼르남부끄주에 빠또스였지만 역시 이곳에도 겨울은 겨울이라 새벽엔 조금은 더운 바람이 잦은듯 했다. 끈적거리고 후덥지근한 날시 탓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연유로 낮에는 도저히 거리에 나가 조약 빛에 거리전도를 하기가 힘들어서 그래도 이른 아침을 택해서 거리로 나가야 했다.꾀가 났다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다. 그냥 가만 있어도 누가 무어라 할 사람도 없다.”하나님 아버지 잠깐만 눈감아 주세요” 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마다 시마다 말씀을 기억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응답하셨고 갈길을 가르쳐 주시기에 나를 조정하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행전 9장에 보면 다메섹에 아나니아라하는 제자가 등장한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사건 후에 그가 장님이 되어 직가라 하는 거리 유다 집에서 기도하며 환상 중에 아나니아라고 하는 주의 제자가 자신의 눈에 안수하는 장면을 보았다. 아나니아 제자가 그에게 “가라” 그리고 사울이 본 환상데로 안수하여 보게 하라는 주의 명령을 받게 된다. 아나니아 제자는 이미 여러 사람에게서 사울에 대해서 끔찍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혈안이 되여 그릇된 유대교의 열심으로 믿는 성도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가두던 당시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자요 사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그 이름도 듣기 싫은 존재였다. 제자 아나니아 또한 성도들과 다를 바가 없었던터였다. 사울이라는 사람을 정말 만나기 싫었고 가기 싫었을 터! 얼마나 아나니아가 가기 싫었으면 변명을 늘어 놓았겠는가? 드디어 그는 가기 싫어하는 자신과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 하기 위해 가고자 하는 두 마음의 전쟁에서 고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결국 성령님께 복종한다. 성경에는 그가 사람에게 물었다는 말이 없다. 만일 그가 사람에게 물었더라면 “마음가는데로 하라”는 그릇된 음성을 들었을 수도 있었겠다라고 생각해 본다.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덜어져 병들었을 때에 사자를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불에게 병이 낫겠나 물으러 보낸다. 하나님의 사자가 디셉사람 엘리아를 통해 “너희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바알세불에게 물었는가 호통을 치셨고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으리라”고 한 사건도 생각나게 하셨다. 물어보는 대상 한 번 잘못 택했다가 죽음을 자처했다? 무슨말인가? 우리가 물어볼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말씀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내와 의논하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아들과 함께 모리아를 향해 갔던 일이나, 아나니아 제자가 “사울에게 가라”는 주의명령을 들었을 때 사람에게 물어봤다는 말이 없는 것은 믿는 자가 어떤 선택이나 결단을 해야 할때 사람에게 묻는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아내에게 물었다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난 이와 같은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아주 오래전 부터 확실한 교훈을 받았고 그 교훈을 따라 살려고 무척 기도하며 애써왔다. 그 확실한 교훈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서 물어볼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며 결코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될 뿐 아니라, 가기 싫고 만나기 싫은 사울을 만나러 갔던 아니니아의 승리의 삶을 본받아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자신이 “하기 싫은 일도 해야한다” 는 음성이다. 하기싫은 일을 해야한다?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이것을 알면서도 순간 순간 까맣케 잊어버리고 때로는 알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매를 벌고 그 매를 저금하며 쌓아가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매를 번다?” 우리의 행위가 매를 저축한다? 무서운 일이다. 잠 1:31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 부르리라” 하나님의 징벌이 속히 임하지 아니하므로 인간들이 죄를 범하기에는 담대하다는 말씀도 생각난다. 흔히 하는 말이 “마음 가는대로 하라”고 지인들은 이야기 한다. 아주 훌륭한 말 같지만 이 말은 아주 위험한 사단의 속삭임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마음 가는대로 하라니..... 하나님 없는 자로 살라는 말이 아닌가? 만일 제사장 아니니아가 사울이 만나기 싫다고 안가고 자신의 마음 가는대도 했다면 성경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기 싫은 일을 했기에 오늘 우리는 아나니아 제자를 닮고자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고 말하기 싫은 사람도 교제하며 용서와 사랑을 서로서로 먹고 사는 성도가 되어 성화의 길을 가려고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마음 가는대로 하는 것이 진리인 줄 알고 본 받았다면? 우리의 삶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삶에서 자유한 사람 또한 없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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