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네가 죽였다. 내 육체의 모든 살점들이 아프지만 나는 너와 똑같은 인생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네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한다. 이 말은 지난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톤에 있는 유서깊은 이매누엘 AME(African Methodist Episcopal)교회 성경공부반에 들어와 1시간 동안 공부하는 척하다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목사를 비롯 모두 9명의 성도들을 살해한 딜란 루프란 21살 백인 청년에게 준 말이다. 미국을 충격 속에 빠트린 이번 사건은 지난 17일에 발생했고 이틀 후인 19일엔 영상 컨퍼런스를 통해 법원에서 보석에 관한 첫 히어링이 열렸다. 주법에 따라 그 히어링의 자리엔 살인피해자 유족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 쇠사슬에 묶여 법정에 출두한 루프는 유족들의 떨리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지만 영상은 허용불가이므로 오열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은 범인을 향해 저주와 분노의 말들을 쏟아내도 시원치 않을 자리였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기 참석한 피해자들은 그 흉악범에게 저주는커녕 용서를 선언하는게 아닌가? 더군다나 하나님의 자비까지 구하고 나선 것이다.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게 될 경우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자비가 임하기를 소원했다. 성경공부반에서 배운 그대로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서두의 말은 그 방청석에 앉아 있던 팰레시아 샌더스란 여인이 한 말이었다. 그녀의 아들 티완자는 그 루프가 쏜 총에 맞아 꽃 같은 청춘을 억울하게 마감하고 말았다. 탄창을 5번이나 바꿔 끼면서 벌인 살인극 현장에서 그녀는 죽은 척 쓰러져 있다가 총격을 모면하고 살아남은 3명의 생존자가운데 한명이었다. 정말 구사일생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죽어 있었다. 그런 악몽의 순간 때문에 몸을 떨고 있을 여인의 입에서 기막힌 용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그 울먹이는 목소리는 이 세상, 특히 흑백으로 갈려있는 이 나라에 퍼져나간 거대한 진동이요, 울림이었다. 샌더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아있던 이들은 한결같이 범인에게 저주의 화살대신 용서와 사랑을 입에 담았다. 그래서인지 보석 히어링이 끝난 후 수천 명의 인파는 구호를 외치거나 피켓시위에 나서지 않았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용히 촛불집회를 열었다. 흑인만이 아니었다. 백인도 많았다. 노인뿐 아니라 젊은이도 가득했다.
 이 억울한 희생자 유족들의 입에서 터저나온 자비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자비(mercy)란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용서받는 것이요, 은혜(grace)란 전혀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주는 선물을 말한다. 킹제임스버전에선 사랑이란 말을 자비란 말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백인경관의 공권력 남용으로 흑인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폭력적인 항의시위를 우리는 목격해 오고 있다. 퍼거슨이나 볼티모어에서는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야간통행금지까지 실시되는 등 흑인들은 도시기능을 마비시켜가며 가슴에 사무친 억울함을 소리치고 싶었다. 그들의 화두는 언제나 ‘정의(Justice)’였다. 흑인민권운동으로 상징되는 거물들이 늘 그런 항의시위 중심에서 흑인들의 억눌린 한을 대변해 주곤 했다. 오래전 LA 4.29 폭동의 도화선이 된 로드니 킹 구타사건의 핵심도 저스티스의 문제였다. 백인경관들과 백인 배심원들이 불의하다고 판단되어 LA 남부지역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번 AME교회 살인사건은 억울함으로 말하면 퍼거슨이나 볼티모어에 비길 바가 아니다. 로드니 킹 사건과 비교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용의자 주변 수사결과에 따르면 확실한 흑인 증오범죄요, 백인우월주의의 만행이다. 그것도 공권력조차 미칠 수 없는 신성한 하나님의 바운더리, 교회당 안에서 집단 살인사건이 벌어지다니! 그래서 미국언론들은 ‘교회학살(church massacre)’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어이없는 폭력 앞에 격노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AME 교회 희생자들의 화두는 저스티스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용서였고 자비였다. 이 나라 모든 흑인들의 가슴을 겨눈 증오의 총격사건이었고 미국의 모든 흑인들이 삽시간에 들고 일어날 심각한 인종테러였다. 그렇지 않아도 살얼음판 같은 흑백인종문제가 다시 한번 대립과 미움의 격랑 속으로 빠져 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분명 유족들과 AME 교회 성도들은 그 고통과 충격의 순간에 주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본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참아내며 인종편견이란 악마에게 용서를 선언한 배후의 힘은 바로 주님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을 알지 않고는 도무지 불가능한 용서였다. 사랑은 정의보다 크고, 용서는 미움보다 위대하다는 한편의 설교를 비디오처럼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셨다. 이매누엘 AME 교회는 그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그 눈물겨운 순종이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