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중 선교사(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박사)
선교사님들과 대화자리였다. 복음 전하는 어려움을 각자 토로하던 중 이런 질문이 나왔다. “인도네시아에서 예수 전하는게 힘들어? 아니면 브라질에서 예수 전하는 게 힘들어?”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다. 인구 2억 7,5000만 중 90% 이상이 무함마드를 믿는다. 반면 브라질은 세계 최대 가톨릭 국가다. 인구 2억1,410만 중 57%가 가톨릭 신자라고 말한다. 당연히 인도네시아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갑자기 조지아 선교사님이 말했다. “예수를 아예 모르는 곳에서는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지만, 예수를 아는 곳에서는 진짜 예수를 전하는 게 정말 어려워요.” 조지아는 4세기부터 동방정교의 나라다. 나는 무릎을 쳤다. 내가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브라질 어디를 가던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름 신학교육을 받은 나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마리아까지 줄줄 꿰고 있다. 틈이 안보인다. 태어나면서부터 성당에서 살았고 TV와 라디오에선 온종일 마리아 찬가다. 학교에서도, 가족모임에도, 친구들과도, 직장에서도 수호성인은 보고 있고 지켜주고 있다. 현지인들을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동양인에 어수룩한 포르투갈어로 예수 이야기하는 나를 보며 ‘내가 너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데 어디서 기독교를 말하니’ 라고 하는 것 같아 부끄럽다.
가톨릭은 500년전 이 땅에 들어왔다. 나무가 비바람에 흔들리고 뒤틀어져도 뿌리는 굳건하듯 마리아는 이 땅의 언어, 행동, 사고방식, 문화 그리고 정신이 깊은 영향을 끼쳤다. 가톨릭은 넓은 땅에 자리잡기 위해 독특한 전략을 선택했다. 혼합주의다. 혼종성(Hybridity)은 브라질 자체다. 원주민,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이 자연스럽게 섞여 공존하며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구불구불하며 직선으로, 넓고 풍요로운 땅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나와 다르다고 얼굴 붉히는 게 손해다. 유럽 정복자들와 함께 들어온 가톨릭은 품이 넓어도 너무 넓었다. 이질적인 요소를 쉽게 받아들여 재창조했다. 하나님과 마리아, 가톨릭 성인은 원주민과 아프리카 종교의 성스러움(聖)과 속스러움(俗) 어딘가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민속종교, 토속종교가 되어 일상, 관습, 축제, 도시구조, 문화, 정치 경제에 스며들었다. 19세기 브라질 제국 시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향은 브라질에서 거의 미치지 못했다. 정치-경제 엘리트와 손잡은 가톨릭은 자체적으로 사제를 임명하고 미사를 집전하고 무엇보다 재산을 스스로 통제했다. 또 다른 ‘제국의 종교’가 된 것이다. 1500년전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어 생명력을 서서히 잃어 간 것처럼 브라질 가톨릭교회는 박해 받을 일도 불편할 일도 없는 편안한 주류 종교가 되었고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브라질 가톨릭에서 배울 점도 있다. 1964년부터 20년동안 이어진 권위주의 군부독재정권 시절 가톨릭 교회는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가난한 자들을 대변하고 환경문제를 제시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힘없는 자들을 보호하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자를 향해 ‘아니다’라고 외치는 기개와 사회적 책임은 브라질 가톨릭이 지금까지 기억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편의상 뒤섞어 놓은 유동적이고 문화적인 신학적 경계는 ‘의존적’이고 ‘명목적’인 종교성을 심었다. 브라질인들 다수는 이미 자신을 ‘다 아는’ 기독교인라 정의하고 현재 삶의 자리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예수는 세상에 불편함을 주러 왔다. 죄에 대해서 몸과 마음이 불편해야 하고,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의지적으로 받아들여 하고, 예수 믿어서 불편함도 감수해야 하고, 예배의 자리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고, 내가 희생해서라도 타인이 예수를 알게 해야 한다. 40년 성당 다니다가 아들이 문제가 생겨 나에게 찾아온 어떤 아버지의 말이 생각난다. 자기는 주일에 미사 1시간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단다. 그래서 성경은 한번도 읽어 본 적 없고 기도도 신부가 대신 해 주니 잘못해도, 일년에 한번 성당가도, 죽은 가족의 천국 자리 부탁하는데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예배는 편하게 ‘보는 것’이지 불편하게 몸과 마음을 ‘드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단다. 가톨릭의 어두운 유산이다. 브라질에서 예수 믿는 것은 힘들다. 시간도 들고, 돈도 들고, 아파야 하고, 희생해야 한다. 무엇보다 책임져야 한다. 가톨릭의 뿌리를 흔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