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명환 목사(크리스천뉴스위크 발행인)
선교를 함에 있어 내놓고 예수 믿어라 외치는 방법도 있고 처음부터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학교지어 가르치기도 하고, 병원지어 병든 사람 고쳐주면서 나중에 기회를 잡아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전자가 화끈하고 직설적인 반면 후자는 시간은 걸려도 효과는 오래, 그리고 광범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화끈하게 예수 믿으라고 덤비다가는 사람들에게 거부 반응을 줄 수 있으니까 살살 달래가면서 그리스도 앞으로 그 인생을 안내하기 위해 목사는 강대상에서 요란한 까운도 벗어던지고, 교회에서는 거룩한 파이프 오르간만 연주하지 말고 신나는 신디사이저에다 드럼도 두들겨대야 불신자들을 유인하는 방법이 아니겠냐고 연구해서 출시(?)된 것이 열린 예배라는게 아니던가? 그런데 그 열린 예배를 통해 얼마나 많은 구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는지는 통계가 없어 단언하기는 어려워도 글쎄, 기독교 인구가 계속 감소 추세인 것을 보면 그게 확실한 약발을 발휘하는 것 같지는 않다.
목사가 까운을 벗어던지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교회당을 지을 때 요즘엔 바깥에 십자가를 거는 것도 촌스럽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국 신촌 로터리 근처의 어느 대형교회는 힘들게 건축 헌금 모아 새 예배당을 지으면서 예배당 바깥에 십자가를 걸지 않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대학생 친화전략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요즘은 문화가 대세이기 때문에 문화 예배당이란 이미지를 개척하려는 의도일까? 이 소식을 들은 어느 교계 기자는 이게 웬 특종이냐며 그 교회의 결정에 아낌없는 흠모와 박수를 보내는 기사를 인터넷에 올렸다. 십자가 없는 예배당... 그래도 예수의 복음에 목말라 사람들이 그 십자가를 없앤 예배당에 모여든다면야 할 말은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당의 십자가를 한꺼번에 철거시켜 세계 선교란 거창한 숙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절에 고리타분한 불상을 없앤다면 절간에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하여 불당에서 모든 불상을 없애버린다고 가정해 보자. 그건 불자들이 수행하는 절이 아니라 스님들의 기숙사에 불과할 뿐이다.
최근 CCC가 이름을 Cru로 바꾼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CCC는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첫 글자다. 우리는 CCC, 혹은 대학생 선교회라고 부른다. CCC하면 돌아가신 김준곤 목사님의 인자하신 얼굴이 떠오르고, 서울 정동의 높은 CCC 본부 빌딩이 머리에 떠오른다. 7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우리는 그 건물을 바라보며 청춘을 보냈고 그 CCC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한국의 젊은 대학생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인생의 목표를 바꿨는지는 역사가 다 알고 있다. 그 CCC가 느닷없이 단체이름을 Cru로 바꾼 이유는 이렇다. 60년이 되어 이름이 너무 늙었다(?)는 것이고 크루세이드란 말이 십자군 전쟁을 연상시켜 전쟁과 정복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Cru란 말이 좋을 것 같아 바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트가 1951년 UCLA를 중심으로 시작한 CCC란 이름에서 결국은 예수 빼고, 그리스도 빼고, 캠퍼스도 빼고, 이것 저것 다 빼고 그냥 ‘크루’라고만 부르기 시작했다니... 관계자들은 다인종에게 다가가고 아랍권 대학생들에게도 접근하기 위해 더 포괄적이고 더 포용적인 단체 이름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사역을 극대화하려고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크루세이드란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면 어찌하여 또 ‘크루’란 말로 크루세이드를 연상시키게 하였단 말인가? 아이러니한 것은 이름을 크루로 바꾼다는 결정이 발표되자마자 이 단체를 향한 지원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바꿔 정말 CCC의 사역이 지구촌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놀라운 결과가 창출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실용성을 따져 편하고 쉽게 접근하기 위해 60년의 명성을 가진 단체 이름을 차 버리는 것도 결코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가수 마돈나가 엽기적인 노래를 부르더라도 그녀의 목에 걸린 십자가 때문에 그녀가 좋게 보인다. 그냥 의미 없이 목에 건 장식물이라도 좋다. 수녀님의 목에 걸린 묵직한 십자가도 나는 좋다. 101 프리웨이를 타고 LA 다운타운으로 오다보면 아침마다 할리웃 언덕에 서있는 대형 십자가를 만난다. 그 십자가도 좋다. 예배당 종탑 꼭대기에 서 있는 십자가도 좋다. 내 방에는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사들고 온 십자가가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십자가 ...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기에 그 십자가를 보며 주님의 얼굴을 보고, 그 십자가를 보며 영적 나태함을 회개한다. 기독교의 확실한 정체성을 애매하게 물 타는 일을 도모하는 것이 무슨 엄청난 창조적 문화사역이요, 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는 특별한 리더십인양 존경받는 경향이 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단 예수를 감추고 슬슬 숨어서 접근하는 ‘위장전입’과 ‘시대의 파수꾼’이란 싸구려 매거진을 들고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여화와의 증인’처럼 처음부터 확실하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 놓고 접근하는 ‘위풍당당’ 스타일, 어느 편이 더 효과적인 방법일까?
미 교회협의회가 발간한 2011년 미국, 캐나다 교회연감에 보면 여호와의 증인이 비록 이단이기는하지만 계속 교인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면 위장전입보다는 깨놓고 덤비는 위풍당당이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인다. ‘십자군’이 욕은 먹어도 실실 예수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수많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해서 좋은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위풍당당이 때론 부러워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