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캐스피언: 진리에 대한 반응(1)
‘인격에 대한’ 신뢰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아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의 인격에 대한 신뢰는 그 사람이 얼마나 ‘다르냐’에 기반한다.
텔마르 사람들 중에도 훌륭하고 고귀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한 사회나 한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악한 사람들끼리 모여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선한 덕을 권장하는 것과 의로운 제도가 세워져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텔마르 사람들과 같은 해적집단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이룬 사회가 유지되기 위하여 의리, 규율, 용맹, 모험과 같은 선한 덕이 권장되고 있었다. 그들도 인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되냐’이다. 이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
언뜻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렇게 착하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약자를 소홀히 대하는 강자나, 약자가 강자인 척하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신다. 특히 성경 말씀을 잘 안다고 하면서 지키지 않는 사람이나, 성경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 온전히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믿음의 형제와 자매에게 무신경 내지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에 대하여는 매우 분노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수님을 의와 사랑과 선함과 진리의 표준이라고 하신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사랑, 하나님의 선과 진리는 이 세상의 관점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다른데, 이 ‘다름’에 반응하며 공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도 이 세상과 ‘다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카도쉬’라고 하면 보통 ‘거룩하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단어에는 다른 의미가 여럿 있다. ‘온전하다’, ‘건강하다’라는 뜻도 있고, 또 ‘드려지다’, ‘구별되다’, ‘다르다’는 뜻도 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한 것은 온전한 것이며, 건강한 것이며, 드려진 것이며, 구별된 것, 다른 것이라는 말이다. 구약성경의 『레위기』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등을 보면 이 모든 의미가 다 사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캐스피언 왕자가 유모나 코르넬리우스 박사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게 되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믿은 것은, 그 자신도 그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알아보고 신뢰한다. 다르지 않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한다. 자신과 같이, 이 세상과 ‘다른’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이 세상에 속하였으면 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이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
그런데 이것은 진리이므로, 모른다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다른 것’이 진리라고 인정하기에는 이 세상을 좋아하는,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속한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그래서 텔마르 사람들은 기막힌 방법을 개발했다. 이 진리가 실제로 일어나는 사실이 아닌 ‘신화’이며, 동화 같은 어린 아이들의 이야깃거리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에 기반하여, 그들은 유모를 캐스피언에게서 떼어냈고, 캐스피언에게 끊임없이 그런 동화는 옆으로 젖혀 놓고 ‘진짜 일’에 신경 쓰라고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