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수잔: 상식과 적극성
“너희는 루시의 얘기가 사실이 아니란 것을 어떻게 알지?”
루시가 옷장을 통하여 나니아에 갔다가 돌아왔다는 말을 피터나 에드먼드, 그리고 수잔은 믿을 수 없었다. 막내 여동생이 말한 것과 같은 거대한 나라가 고작 옷장과 같은 크기의 물건에 들어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에 루시의 말을 따라 옷장을 열고 살펴보았을 때, 그들은 옷과 옷장 뒷벽 외에 발견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루시는 완고했다.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루시는 끈내 자기 얘기를 고집했다.” 그래서 큰 오빠인 피터와 큰 언니 수잔이 커크 교수와 상의하기로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교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위의 질문을 했다. 하도 진지했기 때문에, 수잔은 할 말을 잃었다. 자기와 같은 어린이가 생각하기에도 상식적이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 커크 교수와 같이 나이가 많은 어른이 진지하게 말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혼란스럽다고 느꼈다.
종종 상식은 우리의 눈을 진실로부터 가린다. 상식은 자기와 일치하는 것만이 논리적이라고 설득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루시의 말은 수잔에게 전혀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야 말로 비논리적이다. 논리적인 것이 상식적이라는 것은 맞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루시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의 결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크 교수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수잔의 말에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루시가 평소에도 거짓말을 곧잘 하는 아이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미친 아이라면, 그 아이의 말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루시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만 한다.
‘진실에 대한 가정’.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과 변증학에서 ‘전제’라고 불린다.
전제론적 사고
전제란 ‘마음의 방향성’이다.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그 사람의 논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전제가 모순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진리라는 것이 전제되면, 그것은 더 이상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논리적이다. 그러나 동일한 전제 가운데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모순이고 비상식적일 뿐이다.
구원의 신앙이 삶의 전제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은 성경이 진리라고 전제하는 역설에 대한 태도이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당신의 제자라고 하신다. 내가 나를 부인하면,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여기서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로 또한 ‘위로부터 난다’는 말과 동일하다. 육으로 난 것이 죽고 영(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성령의 생각, 성령의 감정, 성령의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예수님의 제자이다. 어떤가? 이것이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이해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이론적이고 실제 생활은 꼭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