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아슬란(3): 자유의 수호자
나니아의 ‘더욱 심오한 마법’이란 ‘결백한 자가 배신자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 죽음 그 자체가 무효가 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아슬란이 기꺼이 배신자 에드먼드를 위하여 죽고 부활함으로 입증된다. 우리 세상에서,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우리 대신 죽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증거된다.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죽음 그 자체와 그 무서운 권세를, 무효화 시키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신자가 바랄 수 없는 놀라운 은혜다.
그러므로 은혜는 사랑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은혜의 동기다. 심지어 사랑하는 이가 자기를 배신하였을지라도, 그를 위하여 기꺼이 죽는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그는 자기 백성과 아이들에게 약속을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 나니아 땅을 영원히 주리라. 나는 너희에게 숲을 주고, 과일을 주고, 강을 주었노라. 나는 너희에게 땅을 주겠노라. 무엇보다, 나 자신을 주겠노라.”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는 사랑. 성경은 이러한 절절한 사랑을 시로 묘사한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리니(아 8:6-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사랑이 아니다. 죄인인 사람은 자기 사랑의 대상을 소유하려고 하고 속박하려고 한다. 아슬란은 자기가 사랑하는 피조물과 아이들을 자유롭게 하려 한다. 자기 자신이 속박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길들일 수 없는’ 사자, 자유로우며 자기 피조물들도 자유롭기를 바라는, 해방을 가져오는 사자다.
그런데 자유롭다는 것은 제멋대로, 또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슬란은 자기 백성의 약점을 잡아 그들을 위협하면서 부려먹기만 하는 사자가 아니다. 그는 폭군이 아니다. 물론, 그의 자유를 그렇게 곡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가 자유롭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 더 나아가 그는 삶에 쓸모 없는 존재라고 믿는 이들이 말하는 동물들 중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오해를 하지 않으려면 아슬란이 누구인지, 그가 과거에 어떻게 자기 백성에게 자기 자신을 주었으며 그들의 구원과 해방을 위하여 어떤 희생을 치뤘는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친절하게, 언제든지 알려준다. 그가 알려주는 것을 깨달아야 바르게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아슬란은 자기 자신을 주겠다고 백성에게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이 죄악에 노출되고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내놓아 그들을 구원하였다. 그리고 부활함으로, 그가 수여하는 해방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그가 나니아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즉, 그가 전능하지 않다면 그가 약속한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절대주권을 자기가 약속한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만 행사한다. 그의 전능함은 그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