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순 권사(배우리한글학교장, 연합교회)
인간은 날아다니며 살 수 없다. 두 발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발이 있는 다른 것들은 어떨까, 역시 다 날 수 없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발이 있어도 날 수 있는 것이 있다. 조류학의 조예가 깊지 못해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은 미흡하다. 알고 있는 상식의 범위에서 볼 때, 발이 있는 조류들의 대부분이 힘찬 비상을 한다. 물론 날개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날개가 있다고 해도 날 수 없는 경우는 또 다른 문제이다. 조류들이 날 수 있는 이유는 몸의 구조가 그 조건에 들어 맞기에 가능한 것이다. 날개를 가지고 있긴해도 굳이 날 필요가 없는 타조나 앵무새, 공작 등은 다른 새들과 같이 날개가 있어 날갯짓을 할 순 있지만 날지는 못한다. 아니, 날 필요가 없기에 그러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살며 종횡무진 자기의 영역을 펼쳐나간다. 발로 쉽게 가지 못하는 거리엔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조금 멀다 싶으면 차를 타고, 날아가듯 빨리 가야한다면 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며 물길도 헤쳐서 간다. 그도 모자라 다른 행성을 찾아 가보겠노라 혈안이다.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하다가도 인간의 한없는 욕심과 욕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시대적인 상황에 어려움이 닥치면 그 시대에 걸맞는 글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편안한 삶만이 인생에게 주어진다면 꿈이나 이상을 향해 욕심 낼 일이 없겠지만 이루지 못하는 소망과 꿈들은 현실에 발버둥치고 있다고 글로써 표현해 버린다. 일제 강점기의 소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은 아내의 억압 속에 답답함을 느끼며 살면서도 한편, 아내가 모르는 자유를 느끼며 그것 또한 누릴 수 있는 것에 만족을 느낀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날개야,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막힌 미로를 빠져 나오고 싶은 주인공의 심정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현실적 삶에 동화되어 살고 싶은 마음과 억압된 생활을 탈피해 인간의 이상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다. 양면 모두를 볼 수 있는 자동기술법에 의한 의식의 흐름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어쩌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망의 마지막 표현을 ‘날아보자’는 것으로 대신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들은 날 때 날개짓을 하며 하늘을 향해 유유히 날아 오른다. 이 장면을 멋있는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더없이 멋있는 한폭의 수채화다. 이런 고상한 감상은 그런 행위가 인간에게 멋진 낭만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만 가능하다. 사람들은 모른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얼마나 치열한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들은 집을 지을 때 평온한 날에는 짓지 않는다. 강한 바람이 불거나 추운 날씨에 집을 지어야 어려운 악조건의 자연 현상 속에서 끄덕없이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들의 모습은 어떨까. 세상에서의 안락함을 위해 혹은 더 채우고 싶은 욕망을 위해 있지도 않은 날개를 휘저으며 앙탈을 부린다. 나에게 없다면 남의 날개를 슬쩍해서라도 내 몸에 달고 싶어 하기도한다. 날개짓이 필요없는 부지런한 손과 발이 있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다. 발이 있어 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이 날개였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끝도 없는 욕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