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네덜란드 철수
1644년, 네덜란드 연합공화국 정부는 네덜란드령 브라질의 총독 나싸우 백작을 본국으로 소환하였습니다. 4년 전, 브라건싸(Bragança) 공작 죠엉 4세가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등극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이베리아 연합을 파기하면서 에스파냐로부터 분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은 동맹국 네덜란드에게 원래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땅을 되돌려 달라고 요청하였고, 네덜란드는 이 요청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점진적인 철수를 약속하였습니다. 브라질에서, 네덜란드의 철수는 1645년부터 1654년까지 약 9년에 걸쳐 평화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대다수의 식민지 주민들은 이를 애석하게 생각하였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새로 진주하는 포르투갈 군에 대한 군사적 저항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1624년부터 시작된 네덜란드의 브라질 지배는 1654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네덜란드 개혁교회 브라질 노회의 소멸
포르투갈은 로마 카톨릭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1640년의 국권회복 후 브라질 식민지를 되찾자 마자 포르투갈과 로마 카톨릭교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브라질 내 개신교회와 개신교인들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새로 부임한 포르투갈 총독 안또니오 뗄레스 실바(Antônio Telles Silva)는 브라질을 개신교 이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자신의 거룩한 의무이자 진정한 종교적 자유의 수호라고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투항하는 개신교인에게 자유를 약속한다는 포고령을 내리고, 그것을 믿고 투항하는 개신교 주민들을 즉시 ‘이단죄’로 투옥하거나 고문을 가하면서 로마 카톨릭교로 ‘재개종’하라고 윽박질렀고,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가차없이 처형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브라질 내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하나씩 사라져갔고, 네덜란드가 철수를 끝마친 1654년 ‘개혁교회 브라질 노회’는 공식적으로 소멸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개신교인들
그러나 참으로 신비롭게도, 개신교회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브라질에는 네덜란드 선교 30년간 네덜란드어와 포르투갈어 및 라틴어에 능통한 수많은 인디오 청년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가슴속에 개신교 신앙과 세계관이 그대로 남아, 그들끼리 교회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 교회는 우리가 브라질 개신교회 역사 제 19회분에서 보았던 인디오 순교자 뻬드로 뽀치(Pedro Poti)와 뛰어난 언변과 외교력으로 두 번에 걸쳐 네덜란드 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언또니오 빠라우빠바(Antônio Paraupaba), 그리고 탁월한 경제이해와 기술력을 지닌 도밍고스 페르넌지스 까라뻬바(Domingos Fernandes Carapeba) 등이 장로로 섬겼으며, 출중한 신학이해와 세 개 이상의 언어에 능통한 알바로 쟈꼬(Álvaro Jacó), 벵또 다 꼬스따(Bento da Costa), 그리고 멜끼오르 프런씨스꼬(Melchior Francisco) 등이 교사와 집사로 섬겼고, 교사로 임명된 이들 중 교수능력이 특히 출중한 죠엉 공쌀비스(João Gonçalves)가 후일에 안수 받고 목사로 섬긴, ‘뚜빵오까(Tupã-oka: 인디오 말로 ‘하나님의 집’, 즉 ‘교회’라는 뜻) 뽀치과라’, 즉 ‘뽀치과라 개혁교회’ 입니다. 이 교회는 신대륙 최초 인디오 개신교회로 1625년에 설립되어, 기록상으로는 1692년까지 존속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