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80년 전쟁
브라질 땅에 프랑스 식민지 건설을 기획하고 큰 힘을 실어준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이 1572년 8월 24일 살해당했습니다. 그 날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이었는데, 프랑스의 카톨릭 세력이 나라 안의 개신교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날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좀더 유리한 상황을 점할 것을 기대했던 네덜란드 반란군은 망연자실하였습니다. 당시 에스파냐는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Felipe II)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에스파냐 왕일 뿐 아니라 포르투갈 왕이었고 영국 메리 여왕의 남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으며, 남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이었습니다. 영토로만 봐도, 당시 유럽 전체의 4분의 3 정도의 주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신대륙과 아프리카에 걸쳐 있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모든 식민지의 주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토 내에 있는 개신교의 뿌리를 뽑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펠리페 2세가 다스리는 곳 중 개신교가 가장 왕성한 곳이 네덜란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1567년에 개신교 박멸에 악명 높은 알바 공(Duque de Alba)을 네덜란드 총독에 임명하여 박해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는 에스파냐 국왕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그가 부임한 첫 세 달 동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1천명 이상의 네덜란드인을 사형시켰으며, 개신교인들에게는 막중한 세금을 메기는 등의 ‘피의 통치’를 하였습니다. 에스파냐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네덜란드인들은 이듬해인 1568년에 빌렘 판 오라녜-나사우(Willem van Oranje-Nassau) 공을 지도자로 하는 ‘네덜란드 연합군’을 결성하고 카톨릭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절망적인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1568년에 시작하여 1648년에 끝난 저 유명한 ‘80년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이베리아 연합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의 도움으로 포르투갈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은, 젊은 나이에 북아프리카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국왕 세바스치엉(Sebastião)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1578년에 전사하여 왕위가 공석이 된 상태였는데, 여러 명의 계승후보 중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가 가장 막강했기 때문에 왕위가 그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에스파냐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왕위를 동시에 가지게 된 펠리페 2세는 이에 ‘이베리아 연합’을 선언하여, 두 왕국이 하나의 연합왕국을 이루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1568년부터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러오던 네덜란드는 난감해졌습니다. 16세기 초부터 포르투갈이 브라질에서 생산한 설탕을 매매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였는데, 이제 브라질을 포함한 모든 포르투갈의 해외 식민지가 에스파냐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네덜란드 연합공화국은 특단의 결정을 내립니다.
자신들의 부의 원천도 회복하고, 그 부로 적국 에스파냐를 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이제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된 브라질을 공략하기로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