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자

 

 토요일 아침,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젖은 숲 속을 걷고 있는 듯 우수에 잠긴 눅눅한 만감이 넘나든다. 질척거리는 빗물 사이로 희미해진 기억들을 하나씩 들고 왔다가 멀어져 간다. 배고픈 시절 쑥 국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은 며느리가 봄나물이 날 때마다 서러워서 “쑥국 쑥국” 운다는 저 비둘기는 무엇 때문에 흠뻑 젖어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휴대폰을 열어보려다 그만둔다. 이미 공해가 되어버린 각양각색의 정보와 소식들이 물밀듯 밀려올 것이다. 업무를 쉬는 주말만이라도 오롯한 마음으로 묵상하도록 심령을 차분히 가다듬어야겠다. 책을 읽으려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늘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하는 비를 맞아보기로 했다. 치열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함께 젖어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남미 최대의 농수산물시장이 있다. 이른 새벽부터 분주히 오가는 뭇사람들의 잰 발걸음 소리와 웅성거림이 별천지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짜릿하게 침샘을 자극하는 열대과일들이 탐스럽게 진열된 좌판들 끝으로, 언제 보아도 싱그러운 과목들과 화려한 꽃 시장이 반긴다. 눈부시도록 고운 생명체들이다! 생도 저리 곱게 마무리를 하면 좋겠다.

 낯익은 화분 가게 할아버지가 비닐봉지를 둘러쓰고 반가워한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이라며 몇 가지 물건을 저렴한 가격으로 차에 실어준다. 오늘 같은 날은 집에서 쉬면 좋겠지만, 죽으면 영원히 쉴 것이라 무거운 몸을 끌고 나왔다는 눈빛이 애잔하다. 매장을 지키지도 않고 팔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그의 잔뼈가 굵은 장터에 앉아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외로움 질척거릴 여가도 없이 숨 가쁘게 생을 살아낸 남자의 축 처진 어깨너머로, 주인을 기다리는 앙증맞은 장미 한 상자가 나를 불러 세운다. 상자를 안고 어슬렁거리는 나를 비켜,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실은 손수레가 복잡한 장터를 날렵하게 옮겨 다닌다. 고단한 삶의 흔적이 훈장처럼 자리 잡고 있는 얼굴들 얼굴들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 우두커니 세월 저편 보릿고개를 넘어오던 민족의 표정을 더듬어본다.

 검정 고무신을 잃어버려 매를 맞고, 진학하겠다고 조르다가 매를 맞고, 산불을 내서 매를 맞고, 그야말로 매를 달고 살았다는 “촌놈 일기”의 주인공이 스쳐 간다. 몰래 퍼낸 참깨를 가지고 서울로 도망가려다 잡히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철봉에 매달려 점심시간을 보냈다던, 그의 인생여정은 처음부터 산 넘어 산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일생 소원인 목장의 주인이 되었다.

 삶이 그렇게 수많은 산을 넘고 막막한 강을 건너며 끝까지 살아내야 할 소명이라면,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하늘나라가 이루어져야 할 땅끝이며 선교 현장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점점 복잡해지고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다. 주님께서 살아계심이 분명한데 그 살아계심이 느껴지지 않아 답답해하고 힘겨워하며 앓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언제나 혼자인듯한 외로운 길이다. 그러나 주가 함께 계심을 알고 임 재하심을 느끼며 갈 때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된다. 아울러 작은 심령에 심어진 천국의 씨앗을 스스로 가시가 되어 찌르지 않고, 주님으로 평온한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간다면, 백배의 결실이 있는 천국의 비밀을 향하여 가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내 가는 인생길 가운데 씨앗의 비밀로 두셨음을 마태복음에 비유로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길에는 방해요소가 많고 집요한 공격으로 주의 나라를 깨트리려고 한다. 가장 강한 공격자는 “가시나무” 바로 내 속에서 일어나는 분요紛繞다. 열매를 맺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흔들어 결실하지 못하도록 한다.

 끊임없이 달려들어 생각을 흔드는 삶의 문제와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앞길을 막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으로 심령이 평안해질 때 주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싹이 나고 열매를 맺기까지 아무 결과도 보이지 않아 지치고 갈등할 수도 있다. 그러나 힘겹게 달려온 생의 마지막이 주님으로 백배의 결실을 보는 삶이라고 한다면 고달팠던 세월은 감사의 조건이 될 것이다.

 이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우리 신앙은 삶을 다하도록 걷는 길이다. 끝까지 한결 같은 신앙으로 이 땅을 지나갈 수 있다면, 하나님나라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신 주님께서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내 작은 심령의 밭에 아들 예수의 씨를 뿌리신 아버지의 소원은, 오직 예수를 품은 마음을 잘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계신다. 이것이 알파고 오메가이며 시작이고 끝이다.

 그 외의 일은 주 하나님의 몫이다. 성령을 부으시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 가꾸시며 열매를 맺게 하신다. 삶의 바람이 늘 불어오지만 가시나무 떨기가 내 안의 예수를 상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다. 맨발로 걸어가는 인생길이어도 주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간다면,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비밀이 풀어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마음껏 이루어 가실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