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일평생 메시아를 기다려온 유대인들은 민족의 고난과 고통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육의 위기와 환난을, 메시아가 오심으로 다 해결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물려받은 백성들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매우 큰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린아이로부터 노인까지 늘 메시아를 기다려 온 민족이므로 메시아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몇 년 동안의 사역이 그들에게 알려져서 그분이 메시아임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마침 유월절을 맞이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에는 270만 명이 예루살렘에 모인다고 합니다. 크지도 않은 예루살렘에 270만 명이 모였으니 발 디딜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게 하신 예수님, 수많은 병을 고쳐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겉옷을 벗어 길 위에 펴고 왕이신 주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을 바로 알고 있는가?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섬기려면 그분이 누구신지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신 performance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오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말이나 병거를 타고 개선 행진을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겸손인데 이제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심으로 더욱 겸손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구세주의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들은 호산나를 외칩니다. 호산나는 “구원해 주시옵소서 (save us)”라는 뜻을 가집니다. 물론 예수님은 무력으로 로마를 제압하고 유대를 해방시키려 오시지 않았습니다. 무리의 기대와 달리 고난의 메시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우리의 구원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당신에 대하여 예언된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며 순종과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
왜 무리가 주님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환호하였습니까? 주님께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주님을 따르던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생애의 목표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주님을 위한 열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만족과 목적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정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열정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태도와 생각이 어떠한 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병도 낫고 돈도 잘 벌고 복을 받아 만사가 잘되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서 영생까지 누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과연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대속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려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의 고통의 자리까지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감격하면서 하나님이 긍휼하심을 입은 것을 감사하며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정죄가 아닌 용서의 심정을 품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다시 오실 그분을 사모하며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기도의 집으로 날마다 세워나가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를 돕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나귀새끼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나귀 새끼의 임자들의 이름은 성경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하여튼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땀에 찌든 겉옷이었지만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겉옷을 벗어 나귀새끼 위에 얹어 안장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아가는 길에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깔아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것을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니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잠이 들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두려움을 인하여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한 구속 사역이란 엄청난 사건의 배후에 이런 부족한 자들의 보이지 않는 작은 헌신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오래 믿었거나 성경지식이 많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섬김이 모아져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신의 계획을 위하여 모든 피조물을 사용하실 수 있는 왕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물을 쓰실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는 주신 것들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헌신의 동기는 ‘주께서 쓰시겠다’ 한마디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달란트와 물질을 기꺼이 드리면서 주님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채워야 합니다. 순종에 대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상급을 베푸십니다. 이를 깨달았던 시인은 시편 118:17절에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생명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세상에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부족과 연역함, 무지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하여 주시고 성령을 인 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침묵하면 우리가 ‘돌들’ 취급하던 이들이 그 찬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한 심령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하는 우리 형제자매를 위하여 주님과 같이 울어야 합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제대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님과 같이 울어야 합니다. 독일 사람들을 게르만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산적처럼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하던 민족이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해상에서 약탈을 일삼던 바이킹족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호산나로 영접하면서 독일 사람들은 최고의 지성인이 되었고,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는 기독교 국가입니다. 왕의 왕이신 주님을 영접하면서 그들의 신분이 변하고, 생활이 변한 것입니다.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우리의 모든 축복, 모든 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귀며 호산나의 삶을 살도록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의 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 우리의 구원을 위한 길입니다. 사 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입성은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그분이 타신 것은 백마가 아니라 나귀 새끼였습니다. 금장식이 된 안장대신 제자들의 땀에 젖은 겉옷이 나귀의 등에 깔려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부활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입니다. 마귀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순종할 준비를 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험합니다. 종려 주일과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였던 것을 회개하며 주님을 따르시고 그로 인한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체험하며 더욱더 순종의 결단과 찬양을 높이 올려드리는 자들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