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오라클을 만나다(9): ‘그’라는 것을 아는 법(4)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믿는 사람은 모두 그의 제자라고, 성경은 말한다. 바로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모든 제자들, 즉 기독교인들에게 설정하신 조건이기 때문에, 타협이나 완화의 여지가 없다. 동일한 것을 오라클은 네오에게 말한다. “너는 선택을 해야 할 거야. 너는 한 손에는 모피어스의 생명을, 또 다른 손에는 네 생명을 가지고 있지. 둘 중 하나는 죽을 거야. 어느 생명이 죽을 것인가는 너에게 달렸어.” 그녀는 네오가 그의 생명과 모피어스의 생명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네오는 이미,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라는 말로 자기 부인의 일면을 보였다. 그는 지식적인 측면에서 자기 부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조건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이다. 네오는 또한 기꺼이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질 것인가? 지적인 영역에서는 자기를 부인했지만, 감정이나 특히 의지와 같은 다른 영역에서도 자기를 부인할 것인가?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선 ‘자기 십자가’라는 표현은 ‘각자가 지는 십자가’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각 제자들에게 부여하시는 것, 즉 짐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여기서 예수님께서 ‘내 멍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잘 살펴보자. 만일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자기 십자가’라면, 이것은 그 누구도 질 수 없는 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란 하나님의 백성의 죄 사함과 그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내 멍에’가 각 신자에게 주시는 ‘자기 십자가’라면, 그것은 뭔가 다른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자기 십자가’는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목표이자 사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멍에를 메시려고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란 바로 각자의 사명이다. 그렇다. 우리가 죄의 무거운 짐 대신 이 사명,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가신 ‘자기 십자가’의 길을 매일 따라가게 하시려고 저 위대한 구원을 베푸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자기 십자가’는 자신의 생명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자기 십자가’ 역시 우리 자신의 생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여기에 위대한 약속이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기 십자가’는 쉽고 가볍다는 것이다. 끝으로, ‘자기 십자가’는 자발성을 요구한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우리 의지의 자유를 회복한 이유는 바로 이 짐을 자발적으로 지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네오가 ‘그’로서의 사명 즉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그는 자발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긍정하여 십자가를 지지 않고 모피어스의 생명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자기 생명을 부인하여 모피어스의 생명을 살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