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조력자살’을 어떻게 봐야 하나
2025/11/08 02:17 입력  |  조회수 : 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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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친구의 강추로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영문 제목 You and Everything Else)을 보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내온 두 여성이 애증의 세월을 지나, 그중 한 명이 말기 암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스위스로 가서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을 선택하는 이야기다.

 나는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블루하우스(Blue House)’라 불리는 스위스의 디그니타스(Dignitas)를 알게 되었다. 건물이 파란색으로 칠해져 그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디그니타스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비영리 단체로, 회비제로 운영된다. 설립 목적은 “삶을 존엄하게 살고, 죽음도 존엄하게 맞이하도록 돕는 것”이다. 회원이 생애 말기이거나 회복 불가능한 질병 상태일 경우, 의사의 판단과 독립된 의료진의 평가를 거쳐 조력자살을 지원한다. 다시 말해, 자살 지원 서비스다. 다만 신청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할 능력과 판단력을 갖추어야 하며, 조력자는 어떤 경제적 이익도 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만 스위스에서는 조력자살이 합법화되어 있다. 취리히는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그로스뮌스터 교회가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 역사적 도시에 존재하고 있는 디그니타스는 종교적·윤리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조력자살을 둘러싸고 외국인의 이른바 ‘자살 관광’ 문제, 질병 상태가 말기인지에 대한 기준 논란 등이 계속되고 있다. 디그니타스 통계에 따르면 2024년 한 해에만 280건의 조력자살이 시행되었고, 회원 수는 약 1만4천 명에 이른다. 이 중 90%는 스위스 거주자이지만, 외국인 비율도 점차 늘고 있다고 한다. 디그니타스는 법적·윤리적 요건이 매우 까다롭다고 밝히며, 각국의 법률과 이송 절차, 상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설명한다. 즉 “살기 힘들어서” 단순히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위스에는 디그니타스 외에도 엑시트(Exit), 라이프서클(Lifecircle), 아타나시오스(Athanasios) 같은 자살 조력 기관이 있는데 대부분은 스위스 거주자에 한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조력자살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와 ‘생명의 절대적 가치’ 사이에서 오랫동안 논쟁을 일으켜 온 주제다. 찬성 측은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회복 불가능한 고통 속에서 죽음이 인도적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존엄한 죽음’이란 단순한 생물학적 연장이 아니라,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는 윤리적 선택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런 입장은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 등 일부 나라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면 생명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생명이 하나님의 주권 영역이므로 어떤 이유로도 스스로 끊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허용 범위가 확대될 경우 사회적 약자나 정신질환자에게 ‘죽음을 선택하라’는 암묵적 압박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러한 견해는 대부분의 가톨릭교회와 복음주의, 정통 개신교의 입장이다. “여호와께서 주셨으니 여호와께서 거두신다”(욥기 1:21)는 말씀처럼,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본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역시 “자살 조력은 인간이 생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시도이며, 창조주의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도 있다. 성공회나 진보적 개신교단들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선택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말기 고통 속의 이웃을 자비로 돕는 것도 신앙의 표현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유로 나는 삶의 마무리 방식을 신앙 안에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력자살 자체를 찬성하기보다는, 무의미한 연명 강요를 거부할 신앙적 자유를 강조했다.

  ‘상황윤리’의 창시자 조셉 플레처는 “모든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사랑”이라며, 무의미한 생명 연장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사랑은 단순히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죽도록 돕는 것이라고 보았다. 실존주의 신학자 폴 틸리히 역시 “연명치료로 생명을 붙잡아두려는 행위보다 하나님께 생명을 돌려드리는 신앙적 순종이 더 깊은 믿음일 수 있다”고 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죽음을 신앙의 행위로 맞으셨다. 신앙의 핵심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존엄한 죽음은 믿음의 포기가 아니라 완성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는 ‘자율’과 ‘순종’ 사이에 서 있다. 신앙인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만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 안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깊은 순종이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본 드라마는 ‘은중’이 조력자살을 선택한 친구 ‘상연’의 재를 바다에 뿌리는 것으로 서서히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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