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아시아, 지금의 튀르키예(터키)에서 육로로 로마에 가려면 마케도냐를 지나 ‘네압볼리’로 가야 했다. 드로아는 이 경로의 교차점이었다. 이곳에서 선교지의 방향을 정하지 못해 고민하던 사도 바울은 어느 날 환상을 본다. 마게도냐인이 나타나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었다. 이 환상을 본 후 바울은 선교지를 마게도냐로 정했다. 유럽 선교를 향한 첫 신호탄이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1차와 비교할수 없는 넓은 지역을 여행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후 마가 요한을 2차 전도여행에 동행하는 문제로 바나바와 다투고 헤어진다.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인데 1차 여행 도중 아무 말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바울은 그런 마가를 데려갈 수 없다며 실라와 2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갔다. 사도 바울의 2차 여행지를 순서대로 기록하면 수리아 안디옥→수리아→길리기아→루가오니아의 더베와 루스드라→이고니온→브루기아→갈라디아→무시아→드로아→사모드라게→네압볼리→마게도냐의 빌립보→암비볼리→아볼로 순이다.
바울은 무시아 지방을 지나 드로아에서 비두니아(흑해)로 가기를 원했지만, 성령께서 허락지 아니하시고 바울에게 환상을 보게 하신 것이다. 바울의 선교여행이 유럽으로 방향을 틀면서 그는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아덴교회, 고린도교회, 더 나아가 로마교회까지 세웠다. 바울 당시 교회는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한 ‘유대 중심 교회’와 바울이 전도했던 ‘이방인 중심 교회’로 양분할 수 있었다.
주후 70년 로마 디도(Titus) 장군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후, 유대적 색깔을 띤 예루살렘교회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자연스럽게 바울이 복음을 전한 이방인 중심 교회를 주축으로 교회사가 전개되었다. 그 후,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즉 로마인이 예수님을 처형한 지 250년 후에 예수님께서 전한 그 복음이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이다. 이런 기독교 역사적 배경에서 살펴보면 환상을 보고 바울이 도착한 유럽의 첫 번째 도시 네압볼리(네아폴리스·Neapolis)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재의 이름은 카발라(Kavalla)라고 불린다.
오늘날 성지여행으로 이 네압볼리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터키에서 육로로 그리스와 터키 국경을 건너 도착하는 방법도 있고 배를 타고 에게해 연안을 돌면서 가는 방법도 있다. 또 그리스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육로를 이용하여 터키 가는 방향으로 올라 갈 수도 있다. 바울 당시 네압볼리는 동서양 뱃길을 잇는 중요한 항구였고 육로 역시 로마로 향하는 에그나티아 대로(Via Egnatia)가 이곳을 지났으니 교통요지였다. 로마시대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로 통하는 길’은 대개 돌을 깔아 마차가 다닐 수 있게 한 포장도로였다.
지금의 카발라에는 바울의 도착을 기리는 바울기념교회가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항구 가까이에 있고 다른 곳은 항구의 언덕 위에 있다. 항구 가까이에 있는 교회 앞에는 바울의 도착 장면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를 보기 위해 꼭 찾아가는 교회당이다. 그리고 벽화 앞에서의 기념촬영도 잊지 않는다.
바울이 환상을 보고 마케도니아로 발걸음을 떼는 순간을 그린 그 벽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발자국이 결국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운명의 발자국이 아니었던가? 복음이 바울의 발자국을 따라 카발라를 거쳐 로마와 유럽으로 흘러가지 아니하고 흑해를 지나 현재의 러시아 쪽으로 흘러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드로아에서 바울이 본 환상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오늘날 카발라는 인구 10만여명 정도의 활기찬 항구도시로 현재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데살로니키(성경의 데살로니가) 다음 가는 큰 도시다.
에게해의 휴양지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카발라는 빌립보 남동쪽 14㎞ 지점에 위치해 있다.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