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순 권사(배우리한글학교장, 연합교회)

추운 겨울이 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머플러와 함께 짝을 맞추어야 할 것 같은 장갑입니다. 유년 시절엔 털실로 짠 벙어리 장갑을, 사춘기 시절을 지나면서는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넣을 수 있는 다양한 색상의 무늬가 있는 패션 장갑을, 또한 그리 따뜻하진 않아도 왠지 멋스러움을 더할 것 같아 한 켤레 쯤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있어야 했던 가죽장갑…. 정말 이런저런 형편을 다 끌어다 맞추며 장갑의 수를 늘렸습니다. 장갑을 껴야 할 만큼 그다지 추운 겨울이 아닌 이 나라에서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장갑이 있다면 설거지용 고무장갑과 일회용 비닐장갑 뿐일 것입니다. 낭만도, 보온도, 추억도 없는 그저 실용성에 적합한 것, 그래도 장갑이라고 부르긴 해야 겠네요.

 장갑에 관한 얘기를 하다보니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1865년에 발표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영어 원제: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주인공 앨리스가 토끼굴에 들어가 기묘하게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사는, 환상의 세계에서 모험을 겪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높은 인기를 얻어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각색되어 널리 알려진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명작 소설입니다. 두 번째 얘기 [눈물 웅덩이]에서 케이크를 먹은 앨리스는 몸이 커져 탁자 위의 열쇠로 문을 열어보지만 지나갈 수 없게 되어 앨리스가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로 웅덩이가 생깁니다. 이때 흰토끼가 장갑과 부채를 들고 지나가다 앨리스가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것들을 떨어뜨리고 사라집니다. 앨리스는 흰토끼가 떨어트린 부채를 부치고 다시 작아져서 자신이 흘린 눈물 웅덩이에 빠지는데 그 곳엔 여러 동물들이 함께 빠져 있었습니다……제 4장에 흰토끼가 다시 잃어버린 장갑과 부채를 찾아오고….. 동화적인 얘기의 결말은 앨리스가 잠에서 깨어나며……… 동물들을 의인화 하다보니 인간에게 필요한 장갑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장갑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우스운 얘기가 나에게 있습니다. 둘째 아이의 피아노 독주회가 있다하여 신경써서 하얀 드레스(사실 누군가에게 빌림)를 맞춤처럼 입혔습니다. 지도교사가 발표회 날 장갑을 끼고 오라는 말에 잊지 않고 준비한 장갑은 다름 아닌 어른들이 막일을 할 때 사용하는 누런 실로 짠 목장갑이었습니다. 손가락의 유연성을 따뜻함으로 유지하려는 교사의 의도를 미처 깨닫지 못한 무지함이 아이의 모양새를 구겼습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커다란 목장갑을 손에 낀 여덟 살짜리 아이는 어른들의 말에 그저 충실할 뿐입니다. 저 장갑 속의 손에서 빌라 로보스(Heitor Villa-Lobos)의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올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튀어나옴을 억지로 참았답니다.  

 그 꼬마 아이가 어엿이 지금, 네 살짜리 쌍둥이 딸들의 엄마가 되어, 딸들을 위해 손싸개로 손도 싸매주고 눈 오는 어느 날 털로 짠 진짜 장갑을 끼워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옛 얘기도 웃으며 할 수 없으니...... 더운 날, 내 손은 무척이나 차갑습니다. 투박한 목장갑, 부드러운 손싸개…… 질감은 달라도 자식을 향한 두 엄마의 마음은 아마도 같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