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 오피니언 > 설교 http://nammicj.net/n_news/section.html?code=netfu_89053_16079&s_code=20110403032732_1717 "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 rss 보기 ko (생명시냇가)“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쁜 예배”(신12:1-1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56 이강평목사.jpg
이강평 목사(서울기독대학교 총장)
 
예배는 히브리어, 헬라어의 뜻으로는 ‘찾는다, 구한다, 엎드린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worship, 즉 가치성이라는 뜻입니다. 예배는 먼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 의존적인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그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물을 드리면서,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려야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은혜 받을 수 있음을 생각해보고 은혜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있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신명기 12~27장은 모세의 고별 설교의 후반부로써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당을 파괴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한 곳에서만 하나님께 제사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일 중앙 성소에서의 제사 명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순수 신앙을 보존하도록 하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6:16 이하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한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는 주님께서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예수사랑교회! 새 생명이 탄생되고, 이 세상에서 복 받아 기쁨과 소망이 있고 영생이 있는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쁨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마치 어머니의 가슴에 안기는 것과 같은 행복감을 우리 예수사랑교회에 오셔서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이 드리는 예물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 의무적으로 드려야 할 예물이 있습니다. 이 중에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의무적인 예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14:20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의 영접을 받고 그에게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바친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십일조는 성도가 자신이 하나님의 권속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하나의 증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구별하여 드릴 예물을 온전히 구별하여 드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라기 3:8-9에 보면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8:21-32에 보면,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가나안 백성을 위하여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헌물입니다. 또한 창세기14:17-20에 십일조의 기원은 모세 이전의 아브라함이 실행했고, 창세기 28:22에 야곱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린도후서 9:10-12에 보면, 오늘날에는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헌금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교회의 각종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납부금으로 여깁니다.‘헌금’이라는 말은 말 자체가 ‘순수하다, 혼합되지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헌금이라도 한 가지 뜻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구속하여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감사 외에 다른 의미가 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드릴 때,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드려야 할 것을 명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즐겁게 예배드려야 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7절,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신들이 수고한 일에 여호와께서 복 주셨음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처럼,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고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게 된 사실과 우리의 수고하는 일에 복 주신 일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 이 위대한 진리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하신 성령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 33:29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구원되어 이 자리에 앉는 것, 아무나 얻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것,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예수사랑교회, 부활의 교회, 영생을 얻은 교회, 우리교회에서 기쁨으로 예배드립시다. 교회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기쁨으로 성도와 교제하고 헤어져 돌아가면 다시 만나고 싶어 주일이 기다려지는, 서로에게 기쁨과 위로와 평안과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영원한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이 땅의 삶은 끝도 없는 메마른 땅을 걷는 것처럼 피곤한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삶을 걷고 있는 성도들에게 궁극적인 안식의 땅인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안식의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비록 메마른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 성전입니다. 축복의 근원지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고 인생의 가치관이 변해도 결단코 변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주신 말씀대로 교회 찾아 나아와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감사함으로 예물 드리며, 기쁨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예수사랑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9 Jul 2018 21:17:00 +0900
(생명시냇가)목숨을 거는 사람들 (행20:22-2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00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담임)
 
이 세상에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큰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목숨을 걸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목숨을 걸 때, 자기가 평소에 가졌던 힘보다 엄청난 기적적인 힘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목숨을 거는 사람이 큰 일을 하고, 이런 사람들이 역사적인 인물들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면 불 같은 성령이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데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병든 자들이 치유를 받고 귀신들이 쫓겨나갑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사도 바울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는 곳마다 많은 신자와 제자들이 생기고,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세계를 복음화 하는 일에 크게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건다면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큰 일을 할 줄 믿습니다.
 첫째,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는 자들입니다.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가슴까지 들어오지 않고, 뜨거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뭐라해도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천국에 간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주님께서 날 위해 죽어 주셨다.”라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습니다.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은 담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담력과 정비례합니다. 기도를 해도, 말씀을 전해도, 전도를 해도 담력을 가지고 있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호수아 1장 3~6절에 보면,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불가능이 없고, 죽고 사는 것과 흥하고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 없이 신실하십니다. 이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할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둘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시켜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시고, 험한 세상에 믿음으로 살다가 천국에 가도록 책임지십니다. 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들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택하신 백성을 위해 성령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시고 시작하시고 완성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막 16:15).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 우리의 신앙에 유익합니다. 신앙이 건강해지고, 빨리 자라고, 열매가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믿음의 체험이 생기고, 은혜 받은 간증거리가 생깁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자에게는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많이 맞기도 하고, 굶주리기도 하고,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강도의 위협을 받기도 합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많은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당한 고난만큼 영광이 있는데, 이는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롬 8:18).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상 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해 상 받을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보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고난을 받을수록 장차 받을 영광이 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난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감격한 자들입니다.
 믿음의 크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정비례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삽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바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주님을 그만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그러나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영광이 있습니다. 면류관이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면 장차 받을 면류관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우리를 쓰시기 위해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가시밭길을 꽃길처럼 걸어 갔습니다. 우리도 장차 받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가시밭길을 꽃길처럼 걸어 가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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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8 Jun 2018 05:55:00 +0900
(생명시냇가)“세상에서 만나는 3대 위험들”(신8:11~2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63 이강평목사.jpg
이강평 목사(서울기독대학교 총장)
 
우리 성도들은 우리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삶과 생사화복을 사랑과 은혜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잠시도 바로 살 수 없습니다. 전12:1에 보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는 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참 평안과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세상길에서 성도들이 당면할 위험 세 가지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성공할 때 빠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위험’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평상시에는 믿음 강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믿음을 지켜야 할 상황을 만나면 휘청거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의 생활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고하는 방식이나 행동은 세상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을 지켜야 할 때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내가 세상의 영향 아래서 사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메모를 하거나 혹은 기록하고 녹음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을 잊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계속해서, 순간순간 그것을 기억하고 재조명 즉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도로서 반드시 기억하고 재조명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갈보리 언덕 십자가 대속의 놀라운 은혜를 어떻게 갚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방법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비결은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눈을 뜰 때마다, 호흡할 때 마다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기쁨이 되고, 우리에게는 행복이 넘치는 은혜가 더해지는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과거에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날마다 되새겨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전진하지 않는 자는 후퇴하는 자이다”라는 말처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려는 위험에 빠져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결코 잊지 않는 우리 예수사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성공할 때 빠질 수 있는 위험 ‘교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성공할 때 그 성공이 내 지혜와 내 노력과 내 방법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눈먼 사람이 인도자의 안내를 받아서 험준한 산을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야! 내가 이 산을 넘었다!’하고 자부하면서 자만하면 좀 우습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여주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셨기에 오늘 존재하며, 때로 영광과 존귀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만나고 싶고 교제하기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겸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무엇인가 조금만 잘되면,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좋게 보이려고 해도 우리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내 마음 속에는 엄청난 교만이 있다 ’이렇게 스스로 과인 할 수 있을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겸손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수용하겠다. 욕먹어도 좋다, 모욕을 당해도 좋다, 그래서 겸손해질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좋다.’ 이런 자세가 있을 때 비로소 겸손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는 자에게 승리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평범하면서도 영원한 진리를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자는 높이시고 더 큰 은혜를 베푸시되 하나님을 잊고 교만히 행하는 자는 심판하여 만물 아래 낮추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사도 바울과 같이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복종 시키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성공할 때 ‘우상숭배에 위험에 빠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에 따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시고 또한 그 땅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언약으로 하나님을 더욱 섬기고,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고 우상숭배에 빠져든다면 결국에는 가나안 족속들과 똑같이 비참하게 쫓겨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무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상이란 꼭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위치하는 모든 것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즉 지식, 명예, 재물과 심지어는 배우자, 부모, 자식들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이들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실로 우상 숭배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추악하고 가증한 범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우상숭배의 위험을 극복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보다 중히 여겨야 할 문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항상 깨어 있는 신앙으로 언제 어떠한 우상을 섬기는 위험이 닥쳐올지라도, 이를 주목하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어느 날 여우가 바닷가에 왔습니다. 바다 속 고기들에게 ‘여러분 어부들이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으려 합니다. 그러니 물에서 나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물고기들은 긴급히 회의를 하였습니다. 여우는 지혜로운 동물이니 그의 의견을 따르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해도 물속에서 살자는 의견이 많아 그렇게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우에게 말했습니다. “여우님, 고맙지만 우리는 그냥 물속에서 살기로 하였습니다. 위험해도 물속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고기가 물속에서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성도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에게까지 은혜와 사랑으로 베푸시지는 않습니다.
 시편 50:22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성공으로부터 오는 교만에 빠질 수 있는 세상의 위험들을 피하고, 그리고 우상숭배의 위험을 반드시 극복하여 복 받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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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4 Jun 2018 03:42:00 +0900
(생명시냇가)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신11:18-22 /엡6:1-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02 이강평목사.jpg
이강평 목사(서울기독대학교 총장)
 
부모들은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만 자녀 양육에 의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수용하는가는 가정을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만듭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이 자녀 양육의 스트레스를 잘 소화시키는 것은 자녀들이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원인이 됨을 생각해보고 본문을 통하여 은혜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우리 모두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자녀 양육을 시켜야 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가정에 스트레스가 되고 가정은 자녀들의 장래에 대해서 혼동을 하게 됩니다. 요즘에 부모들은 지방에 있고 자녀들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기러기 가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만 부모와 자식의 상봉이 가능한가 하면 어떤 가족은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런 부모는 일반적으로 자식 양육에 대해 아주 유연합니다. 반면에 또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을 너무 지나치게 엄하게 양육하므로 자녀들과 견원지간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부모님들은 자녀교육과 양육을 위해서 세상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배운 지식과 그리고 여러분의 본능이 성경과 서로 상충된다면 폭풍 속에서 비행기 조종사들이 자동 비행 시스템에 절대 의지하듯이 여러분은 성경말씀에 절대 의지하셔야 됩니다.
 ※ 성경이 주는 자녀 교훈
 ① 어린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사랑 받아야 될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② 자녀들도 죄의 본질을 갖고 태어나는데 그 본질은 절제되고 제어되어야 합니다.
 ③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양육되어야 합니다.
 ④ 여러분의 자녀들은 사랑으로 훈련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⑤ 자녀들은 적당한 시간이 되면 보내주어야 합니다.
 둘째로, 가정은 어린 자녀 중심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결혼 중심의 가정을 유지해야 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가정은 아이들 중심으로 되는 가정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현대 부모들은 자녀들을 과대하게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가정의 머리가 되게 합니다. 요즘의 많은 부모들은 “미안해요 나는 예배를 못가겠습니다. 우리 집 아이가 무용발표가 있어, 초등학교 야구시합이 있어서요, 학원에 데리고 가야되어서요”라고 합니다. 이런 이유는 어쩌면 한 가정에 한 명씩 낳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현대 부모들이 모두가 일하기 때문에 미안함 마음을 자녀 과잉보호로 나타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녀 중심의 가정은 자녀들을 위해서 건강하지 못하고 부모의 결혼생활을 위해서도 건강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 가정이 자녀중심이 되면 부부가 서로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정 밖으로 관심을 갖게 되고 심하면 비합법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성장해서 가정을 떠나게 되면 부부생활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이혼하여 결혼생활을 끝낼 이유를 찾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가정의 중심으로 두지 말고 자녀들의 영적 생활에 대한 관심을 우리 가정의 중심으로 두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이 가정의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이 가정이 첫째이고, 부부관계가 둘째이고, 그리고 자기들은 셋째라는 것을 깨달아야 됨을 인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여러분의 자녀에게 결혼의 고귀함과 거룩함을 가르쳐 주어야 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가능하면 세상의 철학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이 세상의 아무것도, 특히 결혼의 신성함을 존중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 교육을 가능하면 때를 연령에 맞추어 일찍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은 온 사방으로부터 사탄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되고 여러분 부모님들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 자녀를 위한 4단계 프로그램
 ① 1-5세 : 이 시기에는 “권위에 대한 존경”을 기릅니다. “순종과 복종”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부모가 역할을 잘 하지 못하면 나중에 성장해서 문제가 있게 됩니다.
 ② 6-11세 : 이 시기에는 양심과 의식적 프로그램을 적립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로 하여금 올바른 “양심과 의식”을 잘 지키도록 자녀들의 손을 잡고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과 행위의 발걸음”을 잘 인도하셔야 됩니다.
 ③ 12-18세 : 사춘기에 있는 자녀들에게 코치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 경기하는 옆에 있습니다. 때로는 작전을 해야 하고 격려해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시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스스로 발전해 나가도록 코치를 해야 됩니다.
 ④ 19세 : 이 시기부터는 부모는 자녀들과 우정의 관계로 발전시켜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들은 자녀들과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단순히 교회에 오는 것 보다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듣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위해서 성경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들이 누워있을 때나, 앉아있을 때나, 걸을 때나, 생각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삶의 일부분입니다.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자녀들의 생각과 철학과 행동에는 어머니가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분야에서는 아버지의 태도가 자녀들의 태도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도덕 기준과 교회에 참석하는 것과 믿음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성경은 “아버지들이여, 자녀들을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가정의 영적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님들이여! 여러분의 가정에 영적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의 진리 안에 거하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안전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구세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고, 세례 받게 됨을 믿으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7 May 2018 02:47:00 +0900
(생명시냇가)사탄의 역사(마16:21-2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46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원로)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영적 세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거룩한 세계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악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두 세계의 싸움은 치열할 뿐만 아니라 계속적입니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사탄의 역사는 더 강하게 나타날 것이고 말씀과 진리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일수록 사탄의 역사는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사단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또 성도가 기도하면 그 응답을 방해하는 자입니다. 또 꼭 알아야 할 것은 인간들의 행복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역사를 알아야 사탄에 속지 않고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하려면 사탄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1. 사탄은 항상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에 역사합니다.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 진리이고, 복음의 핵심 내용이고, 기독교를 떠받들고 있는 기둥들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예수님의 모든 사역 중 가장 중심 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본문은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말씀하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이때 사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에 사탄의 음모와 전략이 숨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십니다. 사단을 가리켜 뭐라고 말합니까?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사단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로 중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정체가 뭐냐”거짓인 것입니다. 거짓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려고 하면 교회가 영적인 교회가 되려고 하면 사탄은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사탄은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일에는 사탄의 활동이 더욱 강하다는 이 원리를 이해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중요한 일, 결정적인 일, 영적인 일을 예사롭게 생각하거나 기도 없이 행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기도로 정신 차리고,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이 정말 필요합니다.
 2. 사탄은 항상 가까운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여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은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제자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통해 사탄은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 역사합니다. 아내나 남편을 통해, 식구와 가족을 통해, 가장 신임하고 사랑하는 자를 통해, 가장 무게 있고 영향력 있는 자를 통해 역사합니다.
 3. 사람의 일을 생각할 때에 역사합니다.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자기의 스승이 죽는다는데 죽지 말라고 간하는 것은 예의에도 맞고, 체면에도 맞고, 도리에도 맞고, 이치에도 맞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무랄 때가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을 보고 사탄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를 통해 역사하고 있는 사탄을 보고 한 말입니다. 베드로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충동질하고 속이고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숨어있는 사탄을 보고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결론
 사울은 악신이 들자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 충만하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번영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악신이 임하면, 마귀, 사단이 임하면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합니다. “죽임”은 사단의 역사이지만, “살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최근에 한국사회가 관심을 많이 보이는 사자성어가 명견만리(明見萬里)입니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미래의 일을 살펴서 환하게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 충만을 받아 사탄의 전략을 바로 파악하고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막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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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Wed, 25 Apr 2018 23:22:00 +0900
(부활절 설교)“예수 부활하셨다!” (마28:1-1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069 하경남목사(서울교회).jpg
하경남 목사(서울교회 담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감옥 중에 하나가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알 카트라즈 감옥입니다. 샌프란시스코로부터 2키로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바닷물이 차갑고 상어가 우글거리기에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감옥이 있습니다. 죽음의 감옥입니다. 이 감옥은 일단 들어가면 누구도 살아서 나오지 못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 자체가 썩어버리기 때문에 살아날 수도 없고 살아도 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게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젊은이도, 아이도, 부모도, 친구도, 심지어 자식도 잡아갑니다. 지진이라도 터지면 한꺼번에 수만 명을 잡아 가는데도 정원 초과가 없습니다. 한 번 죽음에 잡혀간 사람 중에서 다시 살아온 사람이 없습니다. 이게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망의 옥문을 부수고 다시 살아오셨습니다. 그것도 몰래 탈출하신 게 아니라 당당하게 옥문을 박살내시고 영광스런 몸으로 살아오셨습니다. 마지막 날 주 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이 나올 수 있도록 먼저 죽음의 문기둥을 뽑아 멀리 던지셨습니다. 우리도 죽음에서 나오라고 준비하신 겁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합니다. 6절.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1. 주님의 말씀은 절대 진리입니다.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오늘 성경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살 것을 말씀한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공자의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사람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답한 사람아 살아있는 것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아누?” 공자가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기도와 부탁입니다.“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십자가에서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죽으신 겁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살아 나셨습니다. 약한 몸이 아니라 강한 몸으로 다시 사셨고, 썩을 몸이 아니라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사셨습니다. 이게 부활의 몸입니다. 이제 하늘나라에 몸을 갖고 입성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몸은 썩는 몸은 안 됩니다. 약한 몸도 안 됩니다. 강하고 영광스런 몸입니다. 이게 주님의 부활입니다. 당신이 죽고 삼일 후에 살아난다는 것을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하신 말씀은 모두 다 진실이요 진리요 진짜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마귀는 환호했을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제 세상인 줄 알았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며 자신의 손아귀에 하나같이 움직일 인생들을 생각하며 희희낙락(喜喜樂樂)했던 것은 단지 3일뿐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마귀의 음모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그 3일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꾼 3일을 모르는 자들은 어려움이 다가올 때 크게 낙심합니다. 언제 그 고통이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그 시간은 3일뿐인 것을! 1991년 8월 19일, 굉음과 함께 탱크들이 모스크바 거리로 진입했습니다. 당시 소련연방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크림반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소련 보수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 크림반도로 파송된 쿠데타 세력에 의해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고립 당했고 모든 통신은 두절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소문은 쿠데타가 성공한 것 같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정변(政變)은 8월 21일,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역사에서 사라질 것 같았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정변 3일만 인 21일에 모스크바로 귀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3일의 여파는 훗날 세계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이천 년 전 죽음에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 역사(役事)하시면서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에게 “3일만 참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 못 한 어려움 가운데 있으신 교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삼일 후의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산다는 말씀이 그대로 이뤄졌다면 예수님의 다른 모든 말씀도 다 이뤄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2. 부활은 복음입니다.
 구약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대속죄일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일 년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피를 갖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백성을 위해 제사하기 전에 반드시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 먼저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의 죄를 위해 피를 갖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지성소에 있는 법궤 뚜껑인 속죄소에 피를 뿌립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백성을 보실 때 피가 백성의 죄를 가리웁니다. 그래서 용서받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대제사장일 제사를 집례하는 딸랑딸랑 하는 은은한 소리를 듣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모든 제사를 마치고 대제사장이 살아나올 때,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갖고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그 피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받으시고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사를 받으신 겁니다.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시지 못했다면 우리 모두의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단순히 부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죄가 해결되었다는 용서의 선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이 분을 믿으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나도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전 15:58)
3.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십시오.
 주의 일이란 교회 일을 말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 자기 일 하는 사람 많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고, 자기 이름을 위해 일하는 사람 많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구원받은 자들은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기 전에 그 분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주인이신 주님으로, 그리고 구원자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구원받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면서 우리는 조용히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 되신 주님께 순종하는 겁니다. 그때 하는 모든 일이 주의 일입니다. 미국 보스톤 남쪽에 뉴잉글랜드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120명의 청교도가 정착해서 시작된 도시입니다. 당연히 철저한 청교도 사회였지요. 그런 청교도 마을에 어느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동네 어른들은 그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지 추궁을 했습니다. 임신한 처녀가 입을 열었습니다. “아기의 아빠는 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의 궂은일을 도와주는 수도사입니다.” 수도사는 곧바로 체포되었습니다. 수도사는 마을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와 도와주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발로 차고 때린 뒤 추운 겨울 감옥에 가뒀습니다. 수도사는 결국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죄 값으로 말입니다. 장례를 치를 때 마을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수도사가 여자였습니다. 수도사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처녀를 살리기 위해 죄를 대신 뒤집어썼습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한 존귀와 권리를 누리지 않고 포기하셨습니다. 사람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리 포기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분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기로 길을 나서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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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Wed, 28 Mar 2018 20:58:00 +0900
(고난주간설교)강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눅23:39-4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047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원로)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주님의 좌우편에 함께 못 박힌 두 강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두 강도 중 한 강도는 죽음 직전에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낙원을 허락받았습니다. 이제 십자가상에서 구원받은 강도는 어떤 믿음을 소유하였길래 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눅23:39-40).
 십자가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눅23:40).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상대편 강도에게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왜 두려워 아니하느냐”고 꾸짖어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강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동기는 그가 자기 죄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토록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그전에 그 흉악한 강도짓을 일삼았을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뒤늦게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된 이 믿음은 매우 소중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죄를 꾸짖는 믿음을 가졌습니다(눅23:40).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한 사람, 이 회개한 강도만이 예수님을 옹호하고 비난하는 동료를 꾸짖었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요한복음 16:8-9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 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마당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믿고 옹호한다는 것이 쉬워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토크 쇼 중에 필 도나휴 쇼가 있습니다. 이 쇼에 출연한 사람 중에 프락터 갬블(P&G)이라는 회사 사장이 출연했습니다. 이 사장은 사탄교회(Satan Church) 신봉자였습니다. 그가 “경영하는 회사 이익금 중 많은 액수가 사탄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쓰여진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자가 물어보았습니다. “당신 회사의 이익금이 사탄 교회를 위해 쓰여진다고 공개적으로 발언을 하게 되면 불이익이 오지 않겠느냐?” 프락터 갬블사 사장은 이렇게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회사에 타격을 줄 만한 신실한 신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엔 사실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탄 숭배자들에게 타격을 줄 만한 신실한 신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명백한 죄에 침묵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무리들의 명백한 잘못을 알고도 그냥 있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행악 자는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3.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눅23:41).
 누가복음 23:41에서 회개한 강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정직히 인정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행악 자는 자신의 죄와 그 죄로 말미암아 받을 벌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4.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임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예수는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5. 죽음 이후에는 기회가 없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그는 주님의 나라, 영원한 나라에 대해 스스로의 힘으로는 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괴로운데 그의 영원을 지옥 형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지금 죽는다면 여러분의 영원을 어디서 보내시겠습니까? 천국입니까? 아니면 지옥입니까?
 6.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눅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행악 자는 회개하고, 다른 동료를 책망하고, 예수께서 아무런 잘못이 없는 분임을 증거한 것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위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그리스도에게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았던 강도는 이제 자기의 불의한 모습으로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무 죄도 없으신 거룩한 분으로 믿었으며, 또한 세상을 구원할 구주로 믿었습니다.
 7. 큰 방해를 받았으나 잘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결단은 정말 훌륭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십자가에 달려 지켜 본 모든 상황은 믿음을 갖기에는 방해가 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극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마다 비난하는 사람, 조롱하는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다 달아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홀로 믿음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8.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믿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구함으로써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내다볼 줄 아는 믿음을 지녔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구원받은 강도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런 믿음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임을 확신하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함으로, 그리고 주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는 믿음으로 주님께 기억하는 자가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믿음을 소유하여 하나님 앞에 신실한 자로 기억되고 구원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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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Wed, 21 Mar 2018 21:49:00 +0900
(생명시냇가)인생의 역전을 꿈꾸라(수24:14-18)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976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인생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생존하는 수준의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즐기며 살 것인가 만을 궁리합니다. 둘째는 성공 지향적인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 뜻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며 성공을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인생으로 영적으로 성공하는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은혜와 축복 속에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땅에서도 복된 삶을 살며 죽어서는 하나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난 뒤, 노년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두령들을 세겜 땅에 모으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자신의 신앙의 결의를 표하고 백성들에게도 새로운 영적 결단을 촉구하며 우상과 세속적인 것들을 버리고 영적으로 성공하는 인생들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1.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를 선택합시다.
 신본주의의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인본주의의 주제는 인간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하며 살아갑니다. 천사장 루시퍼는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 중에 자신의 영광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천사장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사야 14장 14절 말씀을 보면 그가 “지극히 높은 이와 비기리라” 고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루시퍼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위에 자신의 보좌를 펴려고 도전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내어 쫓기게 된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의 기로에서 인간의 영광을 선택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시날 평지 위에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거대한 바벨탑을 쌓아 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역사는 중단 되었으며,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신본주의를 택할 것인가? 인본주의를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과거 사람들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양자택일의 결단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2. 영적 자원을 가지고 창조적인 삶을 삽시다.
 삶이란 살아서 움직이며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창조적 삶의 근원은 영적 자원에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창조적인 삶을 사는 영적 자원이 됩니까?
 1) 꿈과 환상입니다.- 꿈과 환상이야말로 창조적인 삶을 이루는 근원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꿈과 환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약속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약속의 씨앗을 마음속에 심으면 이성을 초월한 꿈의 꽃이 피어납니다. 말씀을 떠난 꿈과 환상은 헛된 것입니다. 꿈은 내일의 재료입니다. 꿈이 미래를 만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2)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꿈은 믿음을 산출하는 어머니입니다. 꿈과 환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믿음화”시키지 않으면 기적을 창조하는 힘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꿈과 환상을 어떻게 “믿음화”할 수 있습니까? 마음에서 설계된 꿈과 환상을 영에 전달하여 그것을 창조적인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께서는 마음속의 꿈 을 영으로 전달하여 믿음화 시키기 때문입니다.
3) 꿈의 성취를 향한 출발과 인내입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내적 에너지는 행함을 따라 넘쳐 나와 불가능의 벽을 무너뜨리고 기적적인 성취가 산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의 성취를 위한 노력 중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상을 얻느니라 너희에 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10:35-36)이라고 말씀합니다.
 3.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삶을 삽시다.
 사람이 겪는 불행이나 실패는 그 근본 원인이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 서 남이니라”(잠4:23)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 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을 바깥으로 돌리기 전에 먼저 우리 마음속을 들여다보아 야 합니다. 즉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위인들을 볼 때,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들이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4. 나누어주고 베푸는 삶을 삽시다.
 성경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도다”(행20: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고 도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웃에게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1) 가장 값진 복음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볼 때, 복음을 나누어 준 국가나 민족이 흥하지 않은 사례가 없습니다. 이는 그들이 가장 귀한 것 즉 생명을 나누어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물질을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물질을 가지고 가난한 형제를 돕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형제의 불행을 외면하거나, 형제의 불행에 무관심 한 것은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서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은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에 참여하시는 성도 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려운 이민 생활 속에서 생존하는 수준에 머물며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즐기며 살 것인가? 에 올-인하면 지금의 형편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에 뜻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고 성공을 위해 몸부림치며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아도 결국은 “허무”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공하는 인생.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 인정받게 됨으로 인생 역전의 삶을 짜릿하게 맛보게 됩니다. 이제 가는 길을 멈추고 내 삶을 점검해보십시다. 그리고 돌이켜 회개하고 영적 자원인 말씀과 기도로 영적으로 성공하십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육적 삶도 함께해 주시고 주 앞에 서는 날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고백을 나의 고백으로 삼으십시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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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2 Feb 2018 21:21:00 +0900
(생명시냇가)행복을 빼앗기지 마세요(요15:7-11)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890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원로)
 
우리는 부자가 행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면 큰 만큼 행복도 커집니다. 믿음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자신감을 주고, 삶의 위기를 잘 극복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유언 설교의 일부분인데, 이 말씀을 통해  행복을 간직하고 사는 비결을 배우겠습니다.
 1. 약속을 바라보며 삽시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은 주님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환경 중심적인 마음(circumstance-centered mind)을 갖고 환경에 행복의 근거를 두면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환경을 더 믿습니다. 그처럼 환경을 크게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항상 원망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은혜로 그들을 출애굽 시켰는데 그들은 광야에서 물과 음식이 없다고 금방 불평하며 그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하루살이 믿음을 가졌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들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 21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염려했던 의식주 문제를 40년 동안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평했던 일들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염려하는 일들은 대부분 다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환경만 바라보고 기쁨과 행복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이 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환경보다 더 크고 위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며 그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2. 무조건 사랑하며 삽시다.
 본문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님은 이 구절에서 두 번이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중심적인 마음(self-centered mind)을 가지고 살면 있는 행복도 사라지고, 사랑 안에 거하고 베풀며 살면 없는 행복도 찾아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행복을 막는 제일 요소는 바로 요구하는 심령(demanding spirit)입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축복을 받는 것만 좋아하고 축복을 나누며 사명을 행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요구하는 심령은 하나님을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하는 채무자처럼 생각하고, 자신에게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면 안 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 받아야 하는 이기적 기복주의 신앙을 가짐으로 매우 위험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공중으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소리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것을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요구조건을 상세하게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뤄줘야 할 범위까지 지정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요구하는 심령에는 찾아오지 않고 순종하는 심령에 찾아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채무자로 몰면서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대로 해달라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나중에 반드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특히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바라보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물질적인 축복과 연결시키면 ‘요구하는 심령’만 커지게 되고, 그런 심령을 가지면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삶에서 항상 문제와 고통은 있기 마련이고, 기복주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불평하면 문제와 고통은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구하는 심령은 자꾸 남과 비교합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돈을 버는 것 같은데 자신은 힘들면 그것이 상처가 됩니다. 어떤 부부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자신은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상처가 됩니다. 또한 어떤 교회는 잘 크는 것 같은데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으면 그것도 상처가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있는 사람, 즐겁게 사는 사람에 대해 분노를 느끼다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우리에게는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복된 존재가 되려면 요구하는 심령에서 사랑하는 심령으로 극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요구하는 심령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심령은 고난 중에 오히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뚜렷하게 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번성할 때보다 고난 중에 더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예수님도 사람과 함께 고통을 체험하시기 위해서 고통의 현장으로 내려오셨고,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의 고통을 가장 극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체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는 생각은 절대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음미하며 나보다 약한 이웃을 살피는 영유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5-6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3.날마다 충만한 기쁨으로 삽시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십자가의 낌새를 눈치 채고 우울한 분위기에 젖어있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 설교를 하시면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하게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행복을 막는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놀이의 부족(A lack of play)’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바쁘게 살기 때문에 놀 시간이 결코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운동할 시간도 없고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생각할 시간도 없고, 웃을 시간도 없고, 장난할 시간도 없습니다. 그처럼 무엇인가 항상 일을 해야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사람은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중세의 위대한 수도사 겸 신학자였습니다. 언뜻 보면 그런 분에게 노는 얘기를 꺼내면 당장 날 벼락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십니다. 하나님은 놀려고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놀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노는 일도 소중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놀이가 넘치는 그분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하셨다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어떤 분은 너무 심각하게 삽니다. 그래서 농담을 전혀 할 수 없고, 그런 분들 옆에 가면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마치 큰 죄를 짓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곁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물론 그런 분들도 대개 보면 다 좋은 분들입니다. 속으로는 마음도 따뜻합니다. 그러나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볼수록, 그리고 성경적인 이해와 신앙적인 이해의 폭이 넓어질수록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관계는 신앙생활의 핵심 요소입니다. 인격 관계에서 승리해야 신앙생활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심각하고 너무 바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바쁜 것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바쁘지 않는 것을 게으르게 생각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항상 팽팽한 상태로는 살 수 없습니다. 활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그 줄을 풀어놓아야 활의 탄력을 잃지 않게 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에스라 선지자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을 때,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8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결론
 우리는 환경에 반응하며 살라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환경을 창조하며 살라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행복은 많은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모습대로 자기 일을 찾아 창조적으로 살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욕심을 부릴 때 대개 ‘깊이에 대한 욕심’보다는 ‘넓이에 대한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넓은 삶’보다는 ‘깊은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 가짜 행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요사이처럼 살기가 힘들 때는 더욱 진짜 행복이 필요합니다. 행복은 고난을 이기는 최상의 힘입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보면 그녀는 다락방에서 절망 속에 숨어 살면서도 매일 빠짐없이 가족들에게 “나는 행복해요”라고 말하면서 그 어려운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행복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첫째, 처지를 탓하지 말고 약속을 바라보며 살고, 둘째, 무조건 사랑하며 살고, 셋째, 과업 중심적인 마음(work-centered mind)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 안에 거하여서 올 해도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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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26 Jan 2018 18:56:00 +0900
(신년설교)“새해엔 믿음의 기본을 다집시다.” (렘33: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836 하경남목사(서울교회).jpg
하경남 목사(서울교회 담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기도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기도의 내용보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태도와 자세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1절은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로 시작합니다. 가장 무서운 시위대 감옥입니다. 예레미야의 기도제목은 억울한 옥살이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감옥에 감자도 꺼내지 않으시고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기본입니다. 새해엔 믿음의 기본을 다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때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 영혼을 깨웁니다.
 저는 지금도 알람시계가 없으면 새벽에 못 일어납니다. 정말 중요한 모임 때는 두 개의 시계 놓고 자야 안심합니다. 소리가 사람을 깨웁니다. 새벽 개인기도 시간에 묵상하며 기도하려하면 성령 충만이 아니라 잡념으로 충만합니다. 주님을 묵상하는 게 아니라 잡념을 묵상하다가 털고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잡념을 이기는 게 뭘까요? 소리입니다. 소리는 잡념을 몰아냅니다. 잡념을 이기고 망상을 이기는 기도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시작은 어렵습니다. 내 영이 깨어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럴 때 기도하기 전에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 나의 기도가 잡념을 이기고 망상을 이기며 주님으로 충만한 기도되게 해 달라고 시작하는 겁니다. 소리 내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입니다. 믿는 것과 시인하는 것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입으로 소리 내야 합니다. 은혜로운 교회의 특징 중에 한 가지는 교회가 시끄럽다는 겁니다. 기도소리, 찬송소리가 힘차고 시끌시끌합니다. 아멘 소리가 우렁찹니다. 애기들도 힘차게 웁니다. 소리입니다. 은혜로운 소리, 영혼이 깨는 소리입니다. 건강한 교회입니다. 소리는 흘러갑니다. 반드시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기질적으로 우울하거나 쉽게 침체에 빠지는 기질을 갖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소리 내어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깨웁니다. 예레미야의 문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게 아닙니다. 낙심입니다. 낙심으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잠들어 있는 겁니다. 영혼이 주저앉아 있는 겁니다. 이때 주님의 처방은 ‘부르짖어라’ 영혼을 깨우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몸에만 관심을 갖고 평생을 삽니다. 내가 누굽니까? 이 몸이 나입니까? 이 몸은 시간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병들고 늙어서 더 이상 데리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몸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게 우리 몸입니다. 그런데 이 몸이 나 인줄 알고 조금만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아끼고 몸의 즐거움을 위해 삽니다. 그런데 알아야 합니다. 몸보다 귀한 게 영혼입니다.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시42편은 영혼을 깨우는 시입니다. 내 영혼이란 말이 다섯 번 나옵니다. 영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의 시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낙심과 불안이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이 잠들지 않게 하십시오. 깨우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손 댈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잠들지 않게 하십시오. 시106:1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도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게 없고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그때 하나님께서 그래? 알았다. 너희가 요구한 것을 준다. 그러나 너희 영혼은 쇠약할 것이다. 원망과 불평으로 기쁨이 사라진 마음이 쇠약한 영혼입니다. 영혼의 건강 진단을 정기적으로 받으세요. 그래야 병에 걸리지 않아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고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고” 몸은 늙더라도 영혼이 늙으면 안 됩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영혼입니다. 이 영혼이 바로 나입니다. 이 몸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땅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픔이 없고 늙지도 않고 쇠약하지도 아니하는 몸을 입혀 주실 때까지 몸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영혼을 깨우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아! 그렇구나. 로 끝나면 아무 유익 없습니다. 정말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말인지 압니다. 정말입니다. 깨어나십시오.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두 번째 유익은...
 2. 부르짖는 기도는 사물을 움직입니다.
 여리고 성 무너뜨릴 때 무기는 소리였습니다. 함성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외치는 소리에 강력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할 때 찬양의 소리에 옥문이 열렸습니다. 여호사밧 왕이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공격 앞에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전쟁할 때에 군사들 앞에 찬양대를 세워 노래하게 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자기들끼리 격렬하게 싸워 서로 몰살하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헨델의 할렐루야가 있습니다. 처음 연주될 때에 영국 여왕이 너무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연주가 되야 감동이 됩니다. 악보만 갖고는 감동이 안 됩니다. 악보를 보세요. 네 파트가 엇갈리면서 너무 복잡합니다. 야! 잘 만들었다. 어쩌면 사람이 이런 곡을 다 만들 수 있을까? 이해는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연주가 되니까 감동이 되는 겁니다. 마음을 움직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한 겁니다. 심지어 사람이 춤을 춥니다. 이게 소리의 힘입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일본의 물리학자가 물을 연구한 책입니다. 물도 칭찬을 받으면 우리 몸에 좋은 입자를 만든다지요? 그 물이 우리 몸에 소화를 잘 시키게 만든답니다. 너는 참 시원해. 음식 중에 최고야. 내 목을 시원케 해 줘서 고마워. 하면 물이 변한답니다. 육각형의 모양의 입자로 말이죠. 육각수랍니다. 그런데 더러워. 미지근해. 기분 나빠. 듣기 싫은 말에 물의 입자가  날카로운 별 모양으로 변한답니다. 그 물은 배탈 나게 하는 물이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70프로가 물입니다. 우리 몸이 어떤 소리에 좋은 반응을 할까요? 믿음의 소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 축복의 소리. 이런 소리는 내가 먼저 듣습니다. 나를 건강하게 하는 소리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긍정적입니다. 먼저 자기 영혼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불같은 오순절의 성령 충만을 받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라진 게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이전에는 형식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10일간의 기도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정말 좋은 것은 기도로 얻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기도가 달라졌습니다. 이젠 오직 기도입니다. 믿음의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베드로와 요한이 외친 말입니다. 병원에 입원중인 어느 목사님이 치료하러 오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외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말 그대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외치십시오. 예수의 이름은 능력입니다. 선포하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역사하십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세 번째 유익은...
 3. 악한 영을 물리칩니다.
 소리는 대립적입니다. 한 쪽 소리가 크면 다른 소리는 잠잠합니다. 교회에 기도소리가 크고 찬송소리가 크고 아멘 소리가 크면 사탄소리, 인간의 소리는 잠잠해집니다. 공간은 소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귀가 떠들기 전에 뜨겁게 부르짖어 기도해서 공간을 장악해야 합니다. 공간도 믿음으로 장악해야 합니다. 악한 영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게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무당 어머니를 둔 젊은 여집사님이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은혜 받아 집사가 되었는데 무당 어머니가 불쌍합니다. 새벽마다 강단 앞에 나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때마다 시커먼 무언가가 자기를 누른답니다. 무서워서 기도를 못해요. 전도사님에게 요청했어요. 그 전도사님이 내린 처방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치세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권능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떠나가라 외쳤습니다. 얼마 후 미국을 방문하신 그 무당 어머니가 그 교회의 수련회에 참석하셔서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 세계는 전쟁터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외치십시오. 사탄의 소리를 묵사발내야 합니다. 인간의 소리가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상황은 한가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영혼을 흔들어 깨워라. 너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악한 영을 몰아내라. 감옥에서 나오게 한다는 게 아닙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을 보여주시겠다는 응답입니다. 영안이 떠지는 겁니다. 주위에 가득찬 하나님의 군대를 본 엘리사처럼 말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어떤 소리에도 네 기도소리 빼앗기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 소리에 기도가 방해돼서 신경질내다 돌아가지 마십시오. 더 크게 부르짖으십시오.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도록 기도소리 빼앗기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영혼을 깨우는 무기가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낙심과 두려움을 날려 보내는 무기입니다. 기도와 찬송소리가 여러분의 공간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인간의 소리에 여러분의 기도소리 빼앗기지 마십시오. 새해는 믿음의 기본으로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겁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찬송으로 시끌시끌한 우리 교회, 기도로 시끌시끌한 우리 가정, 아멘으로 시끌시끌한 우리 교회로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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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05 Jan 2018 01:14:00 +0900
(성탄절설교)Merry Christmas, Sorry Christmas(빌2:5-11)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817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원로)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날 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의 키워드는 임마누엘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은 성탄절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여행을 계획하고 그저 자기들이 하루를 노는 축제와 같은 날로 생각해서 먹고, 마시고, 선물 주고받고, 파티를 하면서 이날을 그냥 보냅니다. 심지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까지도 그 분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이 그 날을 소중히 보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망의 고통과 삶의 절망과 어려움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넘치는 평화가 임한 날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라고 한 것입니다.
 1.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본문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셔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 이것이 바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인간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겸손의 모습으로 한평생 많은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자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온유를 옷 입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마음속에 너무나 담아두고 있는 것이 많아서 예수님 모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탐욕이 담겨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세상의 인기,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담겨 있습니다. 그 마음속에 미움과 원망과 불평이 담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모실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낮아져야합니다. 아니 더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지면 마음에 평안함이 임합니다. 우리 맘에 쉼이 드디어 찾아옵니다. 마음에 미움이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마음에 원망과 불평이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마음에 분노가 있는 한, 평안함이 다가올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성탄을 맞아 낮아지신 예수님의 겸손을 깊이 생각 하십시다.
 2. 주님의 섬김과 희생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본문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한평생 낮고 천한 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사람 취급받지도 못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어디 갈 곳 없어 길에서 노숙하던 사람들, 거친 인생을 사는 사람들, 사람들이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비웃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 라고 기록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이라면 주님의 섬김과 희생의 본을 세상에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도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그 옛날 성탄절은 불신자들도 교회에 가득히 나와 예배에 참석하던 시절이 그리워  집니다. 교회에 출석은 안 해도 새벽 송은 자기 집도 해달라고 하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이제 우리는 불신자처럼 성탄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탄을 바로 정성껏 준비해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의 사랑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하나님께는 정성껏 예물을 준비하고 어려운 이웃을 향하여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십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성탄절의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삶을 우리 삶 가운데 실천하지 못하고 살았던 부끄러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나. 돌아보며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낮아지려 오셨는데 늘 높아지려고만 했고, 예수님은 섬기고 희생하셨는데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만 했고 전혀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만 했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가. 돌아보십시다. 안타까운 것은 성탄절이 오게 되면 성도들보다도 불신 세상이 먼저 호들갑을 떨고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야단들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과 감사보다는 향락을 위해 존재하는 절기인양 둔갑 된지 오래입니다. 술과 음란이 만연한 절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탄절이 즐거운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가 아니라 주님께 너무나 죄송한 크리스마스(Sorry Christmas)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탄을 준비하여야 할 성도들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탄을 바로 준비해하여야 합니다. 요셉처럼 믿음으로 준비하고, 마리아처럼 순종함으로 준비하고, 목자들처럼 현재 위치에서 성실함으로 준비하고, 동방 박사들처럼 정성껏 예물을 준비해 헌신함으로 즐거운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되도록 우리의 신앙생활을 재정립하여 임마누엘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1 Dec 2017 19:23:00 +0900
(생명시냇가)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15:1~11)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760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우리가 쓰는 속담 중,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보다 믿음의 간증을 남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까? 사람과 함께 이끌어 가십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이끌어 가십니까? 각 나라 대통령과 함께 아니면 각 나라 재벌들과 함께 각 나라 과학자들과 함께 이끌어 가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믿음의 백성들과 함께 각 나라들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면 그 곳에 누가 가장 높임을 받겠습니까? 이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호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들이 살아 온 믿음의 간증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구약시대 믿음의 간증을 갖고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또 역시 신약 성경에도 12제자들과 복음을 위해 일한 믿음의 간증자들이 나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지금은 믿음의 간증자들을 안 찾으십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 믿음의 간증자들의 이름이 매일 매일 하늘에 보고가 됩니다. 저의 이름도 올라갑니다. 여러분들의 이름도 올라갑니다. 그럼 이 믿음의 간증자들이 고백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 제목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하고 고백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복음을 자랑합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구나’하며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무리 세상에 있는 것을 다 가졌다 해도 예수가 없으면 지옥으로 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자랑합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 저는 복음이 너무나 좋아요. 내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자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미국 보잉회사에 다니는 제 둘째 아들이 지난번 매니저 인터뷰에 떨어졌습니다. 그 때 저희들 부부가 아들에게 “아들, 우리는 아들이 자랑스럽다. 감사하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 주신다.”하며 위로했고 저는 하나님께 “아들 매니저 인터뷰 떨어져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추수 감사절 때 아들에게 전화를 했는데 매니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년부터 일을 한다고 해서 “아니, 어떻게 된거냐”했더니, 두 군데 인터뷰를 했는데 먼저 것은 떨어지고 나중 것은 합격했답니다. “그래, 그럼 연락하지”했더니, “조금 이따 미국에서 만날 때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연락 안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회사에서 부장만 되어도 자랑스러운데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자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정말 나 같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이 은혜받기 전에 사울이었을 때는 스스로를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과 깊은 교제 속에 들어가면서 점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말 죄인이구나 하는 느낌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겸손하게 됩니다. 정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영생을 얻었네”라는 찬송의 시가 나의 간증이 됩니다. 이 찬송을 지은 존 뉴톤은 노예상인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오면 올수록 죄인임을 깨닫고 ‘Amazing Grace’ 이 노래를 지어 불렀고 283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을 눈물로 드리면서 변화가 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믿음의 동역자가 팔요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롬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롬 16: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달라진 것은 자기를 돕는 동역자를 많이 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같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예수님을 의지했지만 동역자들에게 꼭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도움을 부탁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써서 뵈뵈라는 여성에게 로마 교회로 보냈습니다. 이 일은 그 당시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특별한 사명입니다. 생명같은 귀한 일인데 자기가 갈 수 없으니 제일 신임하는 여성인 뵈뵈에게 맡긴 것입니다. 이 뵈뵈는 목숨을 걸고 로마로 이 편지를 가져갔고 이 로마서가 온 세계로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로마서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불을 붙였고 요한 웨슬레를 변화시켜 영국을 변화시켜 감리교회가 시작되었고 이후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구원시켰고 드디어 우리도 구원받게 하신 은혜입니다.
 제가 브라질에 와서 깊이 느낀 것은 사람들의 도움이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깊이 알면 알아갈수록 사람들이 귀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15년 이라는 긴 세월을 아름답게 사역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도들에게 입혀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스가랴 10장에 보면 “사탄이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지나니”하셨는데 이 말씀을 예수님이 마 26: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사역자는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동역 중에 기도의 동역이 너무 중요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 기도해야 합니다. 목자가 건강해야 그 젖을 성도가 먹습니다. 제가 구태여 대한교회 파송 선교사가 되려는 이유는 바로 믿음의 동역을 서로 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한국 땅 먼곳에 있지만 믿음으로 기도하고 대한교회를 도울 수 있고 대한교회 성도들은 저를 위해 기도함으로 제 사역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서로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며 고백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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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07 Dec 2017 03:43:00 +0900
(추수감사절 설교)감사의 흔적을 남기세요(고전10:30~3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693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감사는 ‘믿음의 꽃’이라 말합니다. 성령님의 아홉가지 열매에 감사가 안 들어간 이유는 모든 한약에 감초가 들어가듯이 모든 은사에 감사가 꼭 있어야 되기 때문이라 봅니다. 아마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나온 나라 중에 감사를 제일 많이 한 나라가 미국일 것입니다. 또 감사로 제일 큰 나라가 된 것도 미국일 것입니다. 세계를 다녀본 사람들이 미국같이 전 국토가 고르게 발전한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미국은 시골에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문화 시설이 골고루 잘 되어있는 나라입니다. 어떻게 미국이 짧은 역사인데도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는가요? 그 이유는 미국이 시작될 때 감사의 흔적을 남기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계속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흔적들은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긴 흔적들이기 때문에 이대로 우리가 살기만 하면 우리와 우리 후손도 잘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감사의 흔적의 출발은 추수감사절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시작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어보겠습니다.
 1. 한 끼 양식에 감사하는 흔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온 청교도들인 Pilgrim Father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영국에 살고 있던 개신교도들은 메리 여왕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메리 여왕은 1558년 처녀의 몸으로 여왕이 되어 신교도들을 잡아 불에 태워 죽일 정도로 악랄했습니다. 그녀의 별명이 피의 여왕으로 불려지다가 온 몸에 욕창이 나 여왕이 된 지 5년 만에 죽었고, 그 다음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제임스 6세가 다스리면서 역시 핍박이 계속되자 1620년 9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메이 플라워(5월의 꽃) 배를 타고 고국을 떠나 네덜란드로 갔으나 그 곳도 신앙 지키기가 어려워 목숨을 걸고 다시 배를 타고 102명이 신대륙을 향해 떠나 61일 간의 죽음의 항해 끝에 미국 케이프코드라는 곳에 도착했으나 인디언들이 무서워 다시 한 달여 동안 항해해 미국 플리머스라는 곳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도착한 때가 12월로 그 해 겨울이 몹시 추워 여러 사람이 얼어 죽고 또 인디언들의 공격으로 죽고 어린 아이는 어려서 죽고 노인들은 약해서 죽고 하여 남은 사람은 52명이 되었고 그 중 남자는 불과 7명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다 봄이 되었는데 마침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가 있어 선장이 여기 있으면 다 죽으니 돌아가자고 할 때 그들 중에 한 명도 돌아가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는 이 고생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이곳에 왔습니다. 이제 봄이 왔으니 새 땅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셨겠습니까? 아마 하나님께서는 옆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저 사람들을 보니 예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군. 저들이 고난 가운데에도 죽음 앞에서도 감사하는군. 우리의 모습을 저들도 가졌구먼! 우리가 이 세상 나라들 중 어떤 나라에 복을 주겠는가! 어떤 후손들에게 복을 주겠는가!”하셨을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그곳에서 교회당을 짓고 집을 짓고 땅에 씨를 뿌렸고 추수를 하여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고 그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며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과, 같이 먹을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2. 이렇게 감사할 때 더 많은 감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먹는 것을 감사하라고 하셨을까요?
 고전 10: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아무리 권세가 많아도 세상을 다 가졌다 해도 못 먹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루에 세 번 먹게 하신 것도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하루 세 번 중, 한 번은 잊지 않겠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어떤 중년 부인이 동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늘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래 슈퍼마켓 주인이 “아줌마 무슨 슬픈 일이 있어요?”했더니, “아니에요.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무엇이 그리 감사해요?”, “얼마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어떻게 살아가나 아이들을 굶겨서는 안 되지 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집에 들어 갈 때, 이 슈퍼마켓에 와서 먹을 것을 살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남편에게 감사해요. 남편이 돈 벌어다 줄 때는 슈퍼에 올 때마다 원망이 생겼어요. 왜 우리 남편은 돈을 못 벌어 남들처럼 이것저것을 살 수 없나, 왜 나는 능력있는 남편을 못 만났나... 했었는데 막상 내가 돈을 벌어보니 먹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일자리를 주시고, 건강 주시고, 또 두 아이들 부끄럽지 않게 잘 키우려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동안 가정을 위해 죽기까지 일한 남편을 생각하면 슈퍼마켓에 올 때마다 눈물로 감사합니다.”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끼니의 양식에 감사해야 됩니다. 이것이 감사의 시작입니다.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사람입니다. 일용할 양식쯤은 내가 얼마든지 벌어 먹을 수 있다고 하지 마세요.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매일 매일 기도에 하루 먹는 양식을 구하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에, 나의 일에 매일의 양식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죽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감사는 지남철(자석)과 같아 감사감사하면 더 많은 감사들이 나에게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살면 망하는 것같이 보여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려 예수님같이 감사의 흔적을 남기시기 바랍니다.
 3. 우리 민족도 청교도 신앙의 후손들로 인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서울 양화진이라는 곳에는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선교사들의 묘가 있습니다. 이들 묘지에 써 있는 묘비명들을 보면 이렇습니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의 묘지에는 “나는 웨스터 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는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배제학당, 이화학당을 지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에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고 써있습니다. 캔드릭 선교사의 묘비에는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 그리고 A.K 젠슨 선교사의 묘비에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써있습니다. 이 분들은 진정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의 귀중한 생명을 한국 땅에 바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너희의 친구니라”하신 말씀을 따라 이들이 바로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는 조그만 나라, 한국 땅에 와서 청교도 신앙의 씨를 뿌리고 죽었습니다. 이들의 뿌린 피의 씨앗들이 살아 큰 나무를 이루어 우리 한국 민족이 미국처럼 복 중의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를지라도 구원받고 믿는 사람들은 선교사들의 순교의 신앙을 기억하며 이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드리며 선교사들에게 감사 감사하여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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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7 Nov 2017 03:30:00 +0900
(생명시냇가)예배 등불/말씀 떡/기도 향(대하13:10-1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607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오늘 우리는 당나귀의 만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영광을 드립니다. 당나귀의 만남은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말합니다. 그럼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오늘 읽은 역대하 13장 11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날 수 있는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세 가지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꼭 하나님께서 만나주십니다.
 1. 예배의 등불을 환하게 밝혀드려야 합니다.
 대하 13:11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번제는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제물을 전부 다 태워서 드리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23대 대통령인 헤리슨 대통령이 존 워너 메이커(John Wanamaker)라는 분에게 체신부 장관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이 분이 대통령에게 요구한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꼭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조건을 받아주시면 장관직을 맡겠습니다.”라고 하여 허락을 받고 주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한 번은 기자가 장관직보다 주일학교 교사직이 더 중요하냐고 물었을 때, “장관직은 이 땅에 잠시 맡는 직이지만 예배드리는 일은 사람이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일을 하는 것이고 주일학교 교사직은 이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귀한 사람을 만드는 하늘의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모든 것보다 우선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복에 복을 더해주셨습니다. 그는 세계 여러 나라에 YMCA 기독교 청년 단체를 세워 회관 건물을 지어주어 청소년 복음에 앞장섰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종로에 빨간 벽돌 건물로 YMCA건물을 지어주었습니다.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벽돌 건물로 그 당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저도 예배를 잘 드려 복에 복을 받는 사람입니다.
 2. 날마다 말씀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대하 13:11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구약 시대 때는 성소 떡상에 떡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새 떡을 드리고는 물려낸 떡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이 떡은 바로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외우고 또 소리를 내어 하나님 앞에 들리도록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시고 운동하시고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셔서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십니다. 수술해 주십니다. 영을 고쳐주시고 육신을 고쳐주시기 때문입니다.(히4:12) 아까 말한 워너 메이커는 11살 때, 2불 75센트를 주고 빨간가죽 성경책을 샀습니다. 그 때 너무 가난해서 할부로 사서는 항상 그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삼아 매일같이 말씀을 읽고 기도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렇게 늘 말씀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가 청년 시절 어느 물건을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 잘못 샀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바꿔달라고 했더니 주인이 화를 내며 거절했습니다. 그는 그 때, ‘내가 장사를 하면 무조건 바꿔줄 것이다.’라고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그는 23세 때 남성 의류정장 사업을 시작하면서 “친절과 마소는 돈도 시간도 안 든다. 그러나 사업을 번창시킨다.”는 말과 함께 장사하여 1896년 58세 때, 뉴욕 브로드웨이에 거대한 백화점을 세웠고 그 후 백화점 왕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신문기자가 “당신이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 가장 성공한 투자는 무엇입니까?”할 때 그는 망설이지 않고 “제가 11살 때 할부로 2불 75센트를 주고 산 이 빨간 성경책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제 담임 목사 사역을 쉬게 되면 성경을 많이 읽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목회하면서 썼던 컬럼을 정리하여 책을 만들어 전도용으로 쓰려고 합니다. 꼭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3. 기도의 향을 항상 올려야 합니다.
 대하 13:11 “매일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 앞에 번제를 드리며 분향하며 또 깨끗한 상에 진설병을 놓고 또 금등잔대가 있어 그 등에 저녁마다 불을 켜나니...” 요한 계시록에 보면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제물인지 놀랄 말씀이 있습니다. 계 5:8 “책을 취하시며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 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계 8: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제가 당회에서 교회를 사임하면 대한교회 선교사로 파송해달라고 했습니다. 선교비는 안받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서로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매일 지금처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성도들은 저희 부부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해서입니다. 어제 주일 설교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 어느 집사님이 카톡으로 동영상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새벽 기도 때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제 저는 한국에 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한국에 전쟁이 난다고 하는데 왜 한국에 가려고 합니까?”하는데 마음에 통곡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 이 죄인이 그래도 한국에 가서 어느 한 구석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하며 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보내준 동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꼭 하나님이 저를 찾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여기 그 가사를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으리 이 나라를 사랑하기에 순교자들의 피로 값주고 산 나라/ 어둠에게 내어주지 않으리 나의 기도가 이 나라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결코 이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으리 우리 기도로 이 나라 회복할 수 있다네/ 피로 멍든 낙타무릎 간절한 눈물의 기도”
 사랑하는 성도님들! 남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바랍니다. 결국 기도가 마지막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감람산에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승리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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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2 Oct 2017 03:45:00 +0900
(생명시냇가)승전비를 세우자(삼상7:5-1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563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때로는 이가봇 시대가 있었고, 때로는 에벤에셀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가봇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린 시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손에 붙인바 되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에벤에셀 시대가 있었습니다. 에벤에셀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셨다!” 입니다. 하나님이 도움이 있는 시대, 그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승리가 있었고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붙드시고 지켜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가운데는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시대 중 어느 시대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시대
 때는 엘리가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게 제사장의 업무를 맡겼습니다. 엘리는 몸도 늙었지만 마음이 더 늙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했습니다. 한나가 성전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그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알 정도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희귀했습니다. 그곳에 제단은 있었지만 기도가 없었고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 제단은 불 꺼진 제단이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불량한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자 할 때 중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빼앗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는 성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음란한 짓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이르켜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그때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서 나아갔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나버렸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은 싸움에서 패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싸움에서 죽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마저도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98세 노년의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는 가운데 그 소식을 전해듣고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때 엘리의 자부, 곧 비느하스의 아내는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여러 가지 비극적인 소식이 한꺼번에 전해졌을 때 그는 갑작스럽게 해산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렸다!”는 비극을 표현한 이름입니다.
 2. 에벤에셀의 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에벤에셀 시대를 새롭게 준비하셨는데 그 시대를 여시기 위하여 사무엘을 준비하셨습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사무엘이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 서원했고 서원대로 젖을 떼자마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지만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시면서 자신의 뜻을 어린 사무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나면서 하나님은 사무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무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엘리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전국적으로 회개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이방신들을 다 제하고, 오직 참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온전히 섬기게 했습니다.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족속들로 하여금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운동을 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명에 따라서 미스바로 모여 금식하며 철저하게 회개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블레셋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고 그들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군대를 일으켜 미스바로 올라왔습니다. 그들은 철병기로 무장한 군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의 말발굽소리를 듣게 되자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을 위해서 쉬지 말고 부르짖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을 취해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큰 우뢰가 블레셋 사람들의 진 사이에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뇌성벽력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뒤를 추격해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승전비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 승전비의 이름은 “에벤에셀”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이러한 뜻입니다. 요즈음 북한 핵과 미사일 보도를 보면서 혹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에벤에셀 시대를 살아야 하겠으며 승리하여 승전비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본문을 보십시다. 5절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명을 내렸다. 6절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사불란하게 미스바에 다 모였다. 에벤에셀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소식이 블레셋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미스바로 올라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철병기로 무장한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싸우기 위해서 미스바에 모인 것이 아니고 성회를 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무기다운 무기도 없었고 기도하기 위해서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무엘을 향하여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8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9절) 사무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결론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북한이 핵무기 보다 더 큰 무기를 가졌다 해도 우리는 모여 회개하며 부르짖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힘든 이민생활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십니까? 혼자서 고민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백성들이 에벤 에셀의 복( 하나님이 도우셨다)을 받았습니다.
 ①블레셋이 굴복했습니다.(13절) ②잃었던 땅을 회복했습니다.(14절) ③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14절) 우리 조국과 교민들에게도 에벤에셀 시대가 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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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1 Sep 2017 23:18:00 +0900
(생명시냇가)다윗과 솔로몬(대상22:7-1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525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오늘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고 마지막 유언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와 자손들이 이렇게 살도록 하십니다.
 1. 왜 하나님께서 다윗의 다음 왕을 솔로몬으로 삼으셨을까요?
 죄에 대한 용서와 축복입니다.
 삼하 12:24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 12:25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
 솔로몬은 다윗의 부하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 사이에 난 아들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하고 임신하여 그 일이 탄로날 것 같아, 남편 우리아를 죽게 했고 결국 이 일로 태어난 아이는 죽었습니다. 이 일로 다윗 왕은 침상이 썩도록 눈물로 회개하여 용서받았고 두려움과 죄로 떨고 있는 밧세바를 위로하시고 선물까지 아들을 주시고 그 이름을 솔로몬 여디디야라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살렘이라는 뜻으로 평화를 상징하고 여디디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대상 22:9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솔로몬 아들을 주셔서 죄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축복하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사랑과 축복을 주신 모습입니다.
 2. 다윗 왕이 평생에 갖고 있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24장을 보면, 다윗 왕이 인구 조사를 하는 범죄를 하고 그 벌로 이스라엘 백성이 전염병으로 하루에 7만명이 죽자, 회개하며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 여부스 족 사람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고 그 예배를 받으셔서 전염병을 그쳐 주셨습니다. 그 때 다윗이 외친 말이 역대하 22장 1절입니다.
 대상 22:1 “다윗이 가로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그리고 이 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는 전쟁을 많이 해서 내 집을 지을 수가 없다. 그 대신 네 아들 솔로몬에게 짓게 해주겠다. 네 아들에게 내가 평안을 주고 주변 모든 나라와 화평케 해주겠다”하셨습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재료를 다 준비해주며 아들에게 내 마지막 소원은 하나님 집을 지어드리는 것이니 꼭 지어달라고 유언을 했습니다.
 대상 22:6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
 3. 그럼 왜 다윗 왕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려고 했을까요?
 아들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축복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상 22:11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며”
 대상 22:12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너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지금 다윗 왕은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 동안 살아온 모든 일생을 뒤돌아 봅니다. 목동이었던 자기를 왕으로 삼아주시고 죽을 죄를 지은 자기를 용서해주시고 수많은 전쟁에서 보호해 주시고 큰 나라를 만든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 왕은 사람의 일생의 행복과 불행이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 길은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려 그 곳에서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후손들이 축복받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젊은이들 사이에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악한 일들이 번지고 있습니다. ‘이태백’이라는 말은 “이십대 태반이 백수 건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이구백’이랍니다. “이십대의 90%가 백수”라는 말입니다. 최근에는 ‘십장생’이라고 하여 “십대들도 장차 생지옥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우리 자녀들을 서서히 죽게 합니다. 이런 일들이 남의 일입니까? 내 자녀는 다 커서 괜찮습니까? 손자, 손녀는 모르겠다는 것입니까? 오직 우리의 자녀들을 살리는 길은 하나님의 집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 성도님들께 너무 감사합니다. 교회가 모든 시설을 다 갖추어서 우리 아이들이 언제든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놀고 밥먹고 참 좋습니다. 교회는 마치 산부인과 병동과 같아야 된다고 합니다. 새생명이 태어나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지금 식당 위쪽에 학생부 예배실을 새롭게 꾸미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바닥에 비닐 장판을 해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신발을 벗고 예배드리기 원해서입니다. 때로는 기도드릴 때 바닥에 엎드려서 기도하기 위해서 랍니다. 참 내 자신이 목사로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아파야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이만큼 은혜를 받고 평안한 있는 이유는 우리 자녀들이 모두 믿음이 있고 진실한 기도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숨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교회 가족들을 돌보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쓴 이용규 선교사가 2005년 몽골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에서 예배드리던 중에 일어난 일이 쓰여 있습니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기도를 통해 몇 달 전에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입니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내버려두고 예배를 드리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온 것입니다. 그때 이용규 선교사는 하나님께 “그녀가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그 자매가 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안 되면 자신의 실패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도했습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먼저 찾아온 것입니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습니다. 먼저 믿은 우리 중에는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언제나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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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Wed, 06 Sep 2017 23:51:00 +0900
(제72주년 8.15 광복절 기념 연합예배 설교)자유와 평화(눅4:18-19)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500 강성철.jpg
강성철 목사(디아스포라선교회 대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즘 많은 사람들이 불확실한 사회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걱정과 근심으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근래에 교포사회에 집회와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찬수 목사를 모시고 순복음쌍파울로교회에서 가진 부흥성회, 작은씨앗교회가 성전을 마련하고 드린 입당감사예배. 올해도 기독교연합회가 마련한 어버이 효도잔치를 참석했습니다. 그러고 제가 느낀 것은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합니다”라는 찬송가가 생각나면서 어려우니까 교포들이 주를 의지하는 마음이 집회와 모임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 볼 때 참 좋은 현상입니다. 어떤 목회자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일명 가나안 교인)”는 사람이 만 명이 넘는다”합니다. 이때 목회자의 사명이 크다고 봅니다. 교회부흥의 조짐이 일어 날 때 즉 다시 말하면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온 교회가 일어나 전도에 힘써야 할 때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는 광복72주년 연합예배를 드리면서 왜 우리 민족이 36년간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는가? 한마디로 약했기 때문입니다. 약소국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기먼서도 말도 못하고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집과 땅을 빼앗겼고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고,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 아들 딸도 강제로 징집되고 위안부로 끌려 갔습니다. 신앙의 자유도 앗아 가므로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잃었습니다.
 물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1907년 고종 밀사로 이준이 네넬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회의에 참석하여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으나 강대국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919년 3월1일 대한제국 고종독살 소문을 계기로 남녀노소 전국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33인이 마련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한일병합조약 무효를 외치며 비폭력 만세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더 큰 시련과 고통속에 희생을 당하고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 땅 위에 독립될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부 동포들 중에는 일본 국을 흠모하고 일본인이 되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그 앞에 충성하였고 일본을 위하여 몸과 정신까지 바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1938년에는 일본 형사의 총 칼 앞에 평양, 평서, 안주노회가신사참배 헌의안을 총회에 제출하고 9월 10일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때 배위량. 한부선 선교사가 이 결의는 일본의 강압에 의한 불법 결의라고 항의했으나 그들은 일본 형사대에 의해 축출당했습니다. 한국 교회사의 범죄는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무시하고 서울은 한강에서, 부산은 숑도 앞바다에서 일본 천조대신(아마데우스 오미가미) 이름으로 세례(미소가바라이)를 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에 아부하는 종교모리배들이 일본경찰과 합세하여 일본 신을 숭배케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환난과 핍박가운데 신앙을 지키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회개하기를 촉구하며 옥에 갇히고 순교한 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의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폭정을 펼친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고 신앙의 자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했기 때문에 약소국가로 일본의 탄압과 지배를 36년간 받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이룬 해방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1986년 8월 14일 동아일보 시론에 서울대 정치학 교수 이정복씨는 “독립과 자유의 참 뜻”이란 제목하에 “독립과 자유를 되찾았다고 환희에 차 있던 8.15의 감격을 오늘날 우리는 느낄 수 없다. 그러한 감격을 느끼기에는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억압하는 객관적인 조건들이 너무나 많이 존재해 있기 때문이다” 강원용 목사는 그가 쓴 “빈 들”이란 책자에 “내가 살아 온 한국의 70년은 계속 빈 들이라. 이 빈 들은 성서에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 만능, 경제제일 주의, ‘악마에게 절하라’ 절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눈 권력 숭배사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비합리적이요 광신적인 기복종교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마4:1-13)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가지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여러 차례 역사의 전환도 시도했으나 여전히 악의 영(물질만능, 권력숭배, 광신적종교)의 세력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한국은 지금 위기 가운데 서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자유가 없고 모두가 불안해 하고 있으며 모두 얽매여 있고 눌려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때에 그 형상대로 지으시고 사람에게 양심을 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범한 후 그 성품이 부패하여지고 여러가지 죄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본래 받은 자유와 평화를 잃어 버렸습니다. 심령의 자유를 아주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모든 방면에서 인생이 얽매여 있습니다. 오늘 세계 정세를 보세요. 악한 독재자의 정치하에 노예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가진 자들의 횡포와 갑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며 신음하고 있는가? 사회적 제도속에서 젊은이들이 꿈과 희망을 상실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실업, 난민, 가난, 병속에 신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누가 이들을 억압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줄 것인가?
 그 해답은 성경에 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가 사 61:1에 예고하였고 눅 4:18-19에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하고, 눈먼 자를 보게하시고, 눌림받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로 잡힌 자와 눌린 자를 해방해서 그 얽매인 쇠사슬을 풀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은 모든 자유의 근본이 되시는 자유입니다. 사람의 심령속에 그 심령을 얽매는 모든 죄악의 쇠사슬을 풀어서 심령 속에 자유를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버림 받은 삭개오와 마태에게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반면에 네로 황제에게는 그런 자유가 없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방대했던 로마제국의 모든 정권과 백만 대군을 한 손에 잡고 있는 그였지만 네로의 생활을 들여다 보면 그는 얽매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죄악에 얽매여 있었고 악한 성품의 종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감정에 늘 눌려 있으므로 마침내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일본과 미국을 자극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북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김정은도 따지고 보면 종입니다. 악한 성품에 매여 있습니다. 어떻게 될지... 성경은 답하고 있습니다. 시 1:6에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분명히 망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72주년 광복해방주일을 지키면서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와 평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으로 하여금 부자연스럽게 하는 죄악의 형상을 깨드리고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주십니다. 오직 십자가로 심령의 죄와 사망의 올무를 끊으시고 세상 그 무엇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주시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주십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 난민의 문제, 가난의 문제, 병의 문제, 억압된 인권의 문제, 폭정속에 시달이는 북한 동포를의 해방은 오직 예수만이 해방을 시킬 수 있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31 Aug 2017 23:38:00 +0900
(생명시냇가)후회 없는 삶(요19:28-3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483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c.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희교회)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생애를 두 마디로 압축한다면 ‘감사’와 ‘후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는 있었어도 후회는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입니다(요19:30). ‘내가 몸을 찢기고 보혈을 흘려서 내 몸으로 너희 죄 값을 다 치러 주었다. 내가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이겠습니까?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와서 유감없이 살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후회 없이 사신 주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자라서 후회가 없으셨고 세상 권세를 누렸기에 다 이루었다고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온 몸과 마음과 영혼을 기울여서 모두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주의 은혜로 구원 받고 이 땅에서 천국시민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진정 주님을 본받기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1. 깊은 신앙으로 살아갑시다.
 신앙은 연조나 태생이나 배경이나, 예배에 참석한 횟수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은 깊이입니다. 예배도, 주님과의 관계도, 주님을 섬기는 마음도, 신앙의 인격도, 진리의 깨달음도 다 깊이에 속한 일들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과실을 맺는 것은 주의 말씀의 생수에 깊이 뿌리내려 영성이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하셨습니다. 바울은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서...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들었으니”(고후12:2-4). 그는 표현할 수조차 없는 놀라운 일들을 들었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영적 체험의 깊이가 얼마나 깊었던지, 자기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두 번씩이나 괄호를 열고 닫아가며 강조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본질은 깊이에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도 깊이이고 주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깊이입니다. 우리 삶의 전체를 넓이로 살지 아니하고 깊이로 산다면 우리들은 감사가 늘어나 결코 후회가 늘어나는 인생으로 마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2. 깊은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을 본받아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자 하면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 위하여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까닭을 다 이루시는 그 십자가의 현장에서 마지막 그의 영혼이 떠나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엄밀히 말하면 우리를 향해 퍼부어주신 그의 사랑에 대한 마지막 종결장입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까지 사랑했노라” 하는 사랑의 깊이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고 사랑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지금 이 땅의 문제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의 깊이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 결혼하고 사랑을 위해서 한 가정이 되었는데 왜 그렇게 문제가 많습니까? 사랑의 깊이 문제입니다. 저도 목사로 일생을 살면서 많은 양의 무리를 섬겼지만 ‘정말 주님처럼 목숨을 다하여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사랑해 왔는가?’ 라는 질문에 할 말이 없어집니다. 결국 우리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기보다는 사랑의 깊이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사랑이 떠나면 그 관계는 아픔으로 변할 뿐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사랑의 깊이를 다시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후회가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3. 온전한 순종으로 살아갑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깊이 중의 깊이는 순종의 깊이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유감없이 살았다, 받은 삶을 후회 없이 살았다,” 즉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신 그 뜻을 다 이루어드렸다는 뜻입니다. 순종의 깊이까지 들어갔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그 유명한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순종입니다. 특별히 순종의 깊이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의 기질에는 순종이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순종의 훈련은 잘 받는데 정작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이 대목에 가서는 잘 안 맞습니다. 심지어 서울 같다 온 사람과 같다 오지 않은 사람이 싸우면 안 갔다 온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구역예배 후 음식을 먹으면서 두 집사님이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이 무엇이냐?’며 성경공부나 구역예배와는 아무 관계없는 아마존강과 양자강을 두고 언쟁을 부립니다. 결국 백과사전에 힘을 빌려 아마존강이 제일 길다고 해도 양자강이 제일 길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은 입으로만 하는 순종이지 정작 나와 내 마음과 내 성질을 꺾는 순종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지 못한 채 순종의 깊이 없이 살다가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가장 뼈아플 부분이 바로 후회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주에게 순종할 걸...” 순종은 깊이 들어갈수록 신비한 영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주고 하나님 앞의 영광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해주십니다. 영국의 조지 윗필드 목사님은 주님을 위해 자기 몸을 있는 대로 다 쓰며 순종하며 살다보니 주님처럼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친구들이 몸을 잘 보전하라고 권했을 때 그가 유명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나는 내 몸을 잘 보존했다가 녹이 슬어서 없어지기 보다는, 주를 위해 쓰고 쓰다가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넓이보다도 중요한 것이 깊이인 것처럼,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인 것처럼, 우리에게 정말 의미 있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잘 위하는 것보다 우리의 존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이루어드려야 될 이유입니다.
 결론
 여러분과 제가 브라질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주님 앞에 깊이깊이 묵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한번은 7.1도짜리 지진이 LA 북쪽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에 발생했습니다. 집집마다 금이 가거나 물건들이 쏟아지고 파괴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이민에 성공하고 자리 잡은 부인들은 마치 성공을 과시하듯 찬장을 하나씩 사다놓고 고가의 접시들을 멋진 조명아래 전시해 놓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남편에게 조차 커피를 담아 주지 않고 아끼던 이 그릇들이 지진에 몽땅 넘어져 깨졌습니다. 그러나 집집마다 깨지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이는 물 뿌리고 설거지할 때 쓰는 플라스틱바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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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4 Aug 2017 22:29:00 +0900
(생명시냇가)마지막은 사랑입니다(삼하18:5-1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437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지난 주로 주일학교 전 기관 겨울 수련회가 주님의 은혜 가운데 끝났습니다. 늘 수련회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선생님들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아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목사로서 성도를 똑같이 차별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돌아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사람은 더 관심을 갖고 더 간절히 기도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즉시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잘 나오지 않고 교회에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지난 주일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아들 압살롬과 할 수 없이 싸우게 된 다윗 왕은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를 장수로 삼아 군사들을 몰고 전쟁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은 이 명령 속에서 다윗 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은 사랑으로”하라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보여주십니까?
 1. 다윗의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나타납니다.
 삼하 18: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지금 다윗은 압살롬과 싸우러 나가는 장군들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살리라고 명령합니다. 부탁합니다. 압살롬은 죽어 마땅합니다. 구약 시대 때는 아비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니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다윗 왕은 압살롬을 살리려 하니 다윗 왕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의 이런 마음을 기뻐하셨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다윗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와도 안 죽이고 살려주는 이런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지막 마음이십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마지막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2.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우연과 마침이 죽음이 됩니다.
 성경 말씀에는 마침과 우연의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삼하 18:9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간지라” 자,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압살롬이 죽는 장면입니다. 압살롬이 다윗 왕의 부하들과 마주쳤습니다. 앞 절에서 보니 압살롬의 군사들이 에브라임 수풀에서 2만명이 죽었습니다. 아마 압살롬은 겨우 살아 수풀 밖으로 나왔는데 그때 마침 다윗의 부하들을 만났습니다. 압살롬은 놀라 싸우지도 못하고 노새를 타고 도망합니다. 이 때 노새가 큰 상수리 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마침 압살롬 머리털이 상수리 나무에 걸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받은 요압 장군은 달려가 칼로 죽였습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나에게 맡기라 내가 갚아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 다음은 악한 자의 마침과 우연은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은 제대로 싸움도 못해보고 도망가다가 우연히 나뭇가지에 머리털이 걸려 죽었습니다.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악한 왕인 아합이 어떻게 죽느냐 하면 아합 왕이 왕복을 벗고 한 군사의 옷을 입고 병거타고 무리 속에서 움직이는데 아람의 활 쏘는 병사가 우연히 활을 쏘았는데 아합 왕이 맞아 죽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도 마침내는 죽고 망합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우연과 마침이 축복이 됩니다.
 어떻게 축복이 됩니까?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모세가 태어납니다. 그 때 애굽 왕이 이스라엘에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다 죽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 기르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갈대 상자를 만들어 나일 강에 띄웁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바로의 딸이 나일 강가에 목욕하러 나오다가 상자를 발견하여 시녀에게 가져오라 하여 열어보았더니 히브리 사람의 아기였습니다. 그러면 당장 죽여야 됩니다. 그런데 그 때 공주의 마음 속에 아기를 기르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이 넣어주어 모세를 자기 양자로 키우고 모세의 엄마를 유모로 삼습니다. 이 사건이 우연의 사건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주시려는 계획을 마침내 이루시는 시작이지 않습니까? 신약 성경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이방인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는 놀라운 모습이 나옵니다. 고넬료라는 로마의 백부장이 하나님을 잘 믿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고넬료야, 네 기도와 구제를 하나님께서 보셨다”하며,“지금 사람들을 욥바 가죽 만드는 시몬의 집으로 보내 그 곳에서 지내고 있는 베드로를 너희 집으로 청해 그가 전하는 내 말을 들으라”하셨습니다. 고넬료는 집안 하인들과 경건한 부하 한 명을 욥바에 보냈습니다. 이 세사람이 욥바 시몬의 집에 가까이 갔을 때,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보니 땅에 있는 짐승과 공중의 새들이 담겨있었습니다. 그 때,“베드로야, 잡아 먹으라”하는 소리가 들려, 베드로가“나는 더러운 짐승은 안 먹습니다”하니,“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더럽다 하지 말라”하시면서 세 번 이런 일이 있다가 그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생각할 때에, 행 10:17“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행 10:18“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행 10: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행 10: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지금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구원을 시키신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시는 사건이신데 이 성경 말씀 가운데 “마침 생각할 할 때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에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사건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든 것의 마지막은 하나님 사랑이고 사람 사랑입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은 전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십니다. 세상에 애쓰지 마시고 하나님께 애쓰십시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1 Aug 2017 01:14:00 +0900
(생명시냇가)충성된 사자가 되라(잠25:1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367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사람들 가운데는 유쾌 지수를 최고로 높여주는 사람 그 사람 때문에 모두가 즐거워할 수 있고 상쾌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능률적으로 잘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불쾌지수를 높여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목욕탕처럼 덥게 하는 사람, 추수할 것은 많고 시간은 없고 날씨는 더운데 오히려 일하는 사람들의 불쾌지수를 높여주는 사람, 기분이 좋았다가도 그 사람만 보면 갑자가 더워지고 열 받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운 여름을 더욱 덥게 하는 그야말로 불쾌지수를 최고로 높이는 사람입니다.
 1. 보내신 자를 위해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은 충성된 사자들이 되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내졌고 교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보내신 이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소명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헌신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선 영조 때의 암행어사 박문수는 겉보기에는 행색이 초라하고 남루하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들이 무시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했지만 그 가슴 속에 있는 마패를 꺼내드는 순간 모든 사람이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남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없어도 남들이 가지고 있는 학식과 명예가 없어도 우리의 가슴속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너는 내 사람이다. 너는 내 사자이다. 너는 내 자녀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패가 있기 때문에 보내신 자를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이끌어왔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조건이 화려하고 외모가 뛰어난 어떤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이끌어 왔던 믿음의 사람들은 그 심장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마패를 가졌던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어사로서 지금까지 뿌린 피와 땀과 눈물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 복음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자기 직분에 충성하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했습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직분이 있고 그 직분에는 반드시 직무가 있습니다. 목사와 교사, 장로, 집사, 권사 등의 직분이 있습니다. 각각의 직분과 직무에 충성을 다해 그 직무를 감당할 때 우리 주님께 충성된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아둘람 굴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대상11:15~19). 그곳은 물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블레셋 군대가 진치고 있었던 자기 고향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시원하고 맛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을 모시고 있던 세 용사는 블레셋 군대를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습니다. 다윗왕은 그들의 목숨을 건 충성스러운 행동을 보고 그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은 “이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대상 11:19) 하면서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세 용사는 충성된 사자들이었습니다.
 3.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되라.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영혼 구원의 열매를 바라보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 구슬방울 같은 땀을 온 몸에 적시며 충성하는 사람들. 이들이 충성된 사자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에 동요도 되지 말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지도 말고 오직 말씀을 따라 흔들림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가운데 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아들이 고삐를 잡고 가는 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뭐라 그랬어요? “아이고, 어린 아들을 고삐를 잡게 하고 자기가 떡 타고 가는 저런 나쁜 애비가 다 있냐?” 그 다음에는 애를 태우고 자기가 고삐를 잡았더니 “저런 불효자가 있나, 아버지를 저렇게 고삐를 잡게 하다니”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할 수 없이 둘 다 나귀를 탔더니 “저런 나쁜 놈들이 있나, 저 어린 나귀를 두 사람이 타고 가다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나귀를 둘러메고 갔다고 하잖아요. 여론이란 항상 이런 것입니다.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평가입니다. 충성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그것만이 옳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 할 것도 아닙니다. 남보다 땀을 더 흘렸다고 그것가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논하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바쳤다고 그것만으로 내가 스스로 충성을 평가 받으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충성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다 생각지도 말아야합니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 바라보시고 충성을 다하십시다.
 결론
 본문의 시원하다는 말은 ‘딱 좋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물의 온도가 차다, 뜨겁다는 말이 아니라 ‘좋다, 딱 좋다’는 표현입니다. 답답한 마음이 풀릴 때 ‘시원’이요,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것이 ‘시원’입니다. 더부룩 하던 속이 뻥 뚫림이 ‘시원’이고, 미뤘던 일들이 잘 끝마쳐지는 것이 ‘시원’입니다. 앞에 가림이 없이 전망이 확 트임이 ‘시원’이요, 거칠 것이 없이 달리는 것이 ‘시원’입니다. 더울 때는 차가운 것이 ‘시원’이고, 추울 때는 따뜻한 것이 ‘시원’입니다. 바울의 서신에 보면 시원하게 하는 사람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전16:18)고 하였습니다. 답답하고, 짜증나고, 열 받는 일이 많은 세상, 연일 계속되는 무더운 날씨 속에서 얼음 냉수 같은 사람이 그립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분의 모습을 본받아 서로 섬김으로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우리를 보내신 이에게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십시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0 Jul 2017 23:55:00 +0900
(생명시냇가)섭리 신앙의 사람(삼하15:13-1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341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복을 주십니다. 그럼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럼 그 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창세기 25장에서는 에서와 야곱의 장래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동생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럼 “왜 형이 아니라 동생이 장자권을 받습니까?”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 답은 하나님의 섭리하고 합니다. 다시 창세기 45장에 가면 요셉을 팔았던 형들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된 동생 요셉 앞에 모두 엎드려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떱니다. 이 때 요셉이 형들에게 “내가 애굽에 팔린 것은 형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살려주시고 큰 민족을 만드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섭리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이러한 사건이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나타납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로 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예정과 계획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영어에서는 아주 쉽게 표현했습니다. ‘God’s will’이라고 합니다. 영어에서 will 이라는 단어는 의지, 뜻, 마음의 결정을 할 때 씁니다. 예레미아 33장 2절에서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이시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만드시는  예정, 계획, 창조, 통치, 보존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섭리하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를 순종하여 따르는 사람을 ‘섭리 신앙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평안하고 분쟁이 없는 교회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입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럼 섭리 신앙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섭리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순종합니다.
 삼하 15:13 “사자가 다윗에게 와서 고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다윗 왕이 전령의 이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팠겠습니까? 자기 아들이 아버지를 배신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은 그 아픔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받아들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하나님이 다윗이 범한 이 사건을 보시면서 마음에 배신감을 느끼셨을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이 느끼고는 아들 압살롬의 배신을 그대로 받아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다윗이 취한 행동이 어떠합니까?
 삼하 15:14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다윗 왕이 어떤 장수입니까? 장수 중의 장수입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군을 얼마든지 격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아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 싸움터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다윗 왕의 모습에서 우리가 교회를 어떻게 지켜야 하고 교회 지도자는 자기의 자존심과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2. 섭리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는 절대로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삼하 15:16 “왕이 나갈 때에 권속을 다 따르게 하고 후궁 열 명을 남겨 두어 궁을 지키게 하니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납니까? 어떻게 다윗 왕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여자 열 명이 왕궁을 지킨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자기 아내들 아닙니까? 이것은 다윗 왕이 이 열 명의 후궁들 보고 죽으라는 뜻 아닙니까? 어떻게 다윗이 이렇게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럼 이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누가 이 일을 만들었습니까? 왜 이 일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이 계획을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삼하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지금 이 일은 다윗이 계획한 것도 아니요, 다윗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는데 후궁 열 명을 남겨두었어요. 어떻게 다윗이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면 다윗의 대답은, “나는 몰라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안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이루십니다.
 3. 섭리 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선한 마음으로 대하면 반드시 화가 복이 됨을 믿습니다.
 삼하 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삼하 16:9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삼하 16: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삼하 15:20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이 장면은 다윗이 아들을 피해 도망하는데 사울의 친족 중 시므이가 다윗을 향하여 저주하는 소리입니다. 그때 다윗이 그 저주를 다 받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망명한 블레셋 잇대 장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나와 같이 죽지 말고 네 동포들을 데리고 블레셋으로 가라. 살길을 찾으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죽을 환경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같으면 잇대에게 “내가 너를 살려주었으니 이제 너도 나를 위해 싸워달라.”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게 할 수 없어서 돌아가라 한 것입니다. 어려운 중에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다윗의 마음이고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지은 다윗을 징계하시지만 다른 은혜를 더 많이 부어주십니다. 결국 압살롬은 죽었고 다윗 왕은 다시 왕으로 돌아왔고 더 강한 왕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는 다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섭리를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고 좋은 사람을 보내 주시고 화가 복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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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4 Jul 2017 00:36:00 +0900
(생명시냇가)사업가 인생에서 사역자 인생으로(행16:11-1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291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본문의 주인공 루디아라는 여성은 터키 지방 두아디라 출신 패션사업가입니다. 그는 로마 상류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역하는 상당한 수준의 여성 CEO였기에 귀부인(Lydian Lady)이라는 호칭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을 만나 새로운 변화를 받으므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배경은 사도바울은 유럽선교의 첫 관문 도시인 빌립보에 들어가 예배 처소를 찾았습니다. 빌립보 도시는 로마 식민통치 지역으로 로마 종교이외에는 예배모임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즉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거기가 곧 성문 밖 강변 빨래터 근처의 유태인 기도처였습니다. 거기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첫 눈에 들어오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루디아였습니다. 성경은 루디아의 프로필을 아주 훌륭하게 소개합니다. 첫째, 이방인이었는데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사람, 둘째, 그는 큰 사업가였는데도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비즈니스 활동이 바빠도 예배를 성실히 드리는 사람. 셋째, 그는 부유층이었는데도 기도하는 사람, 한마디로 그는 아쉬울 것이 없는데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문제가 많아서 기도하는 사람보다 문제가 없는데도 새벽마다 나와 기도하는 사람이 훌륭한 신자입니다. 그는 이방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사업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와 기도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만난 후 훌륭한 헌신자가 되어 위대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업가 인생에서 사역자 인생으로 도약한 것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제 2차 선교여행부터 로마 선교까지 약 15년 동안 너무 훌륭 사역자 인생을 살았습니다.
 1.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주인공 루디아는 이방인이요, 부유한 사업가이었는데도 사도바울의 설교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즉 마음을 쉽게 열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옥토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을 연다.”는 헬라어로 양쪽 대문을 활짝 여는 장면을 뜻합니다. 한 쪽 문만 연 상태가 아니고, 두 쪽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를 말합니다.(14절) 이처럼 루디아는 마음을 활짝 열고 바울의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그래서 쉽게 변화 받았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변화를 잘 받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잘 듣는 사람. 둘째, 반응을 잘 보이는 사람. 셋째, 잘 적응하는 사람입니다. 예배 중에도 은혜를 잘 받는 사람은 잘 듣고 잘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설교하든지 은혜를 잘 받는 사람이 건강한 신자입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 84:10)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쉽게 여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하늘 문을 열어 축복하십니다. 마음을 여는 만큼 믿음도 커지고 축복을 담을 그릇도 커집니다. 그래서 크게 쓰임 받는 인물이 되게 하십니다. 어려운 때 일지라도 말씀 앞에 마음문은 활짝 열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2. 감성지수가 건강해야 합니다.
 루디아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바울의 설교를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 모든 식구와 직원들까지 모두 초청하여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본문 15절의“집안 식구”라는 헬라어(oikos)는 광범위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사업가로서 자기가 거느린 모든 구성원들을 다 세례 받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루디아는 자신도 감동을 쉽게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쉽게 감동 시킬 수 있는 EQ가 건강한 사람입니다. 감화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다 감동시킬 만큼 감화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일수록 감동의 사람들입니다. 심령을 움직이는 감화력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잘 받는 사람일수록 쉽게 감격할 줄 알고, 눈물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가슴이 뭉클해지고, 변화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감동의 사람을 크게 쓰십니다. 다윗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감동을 쉽게 받는 만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바울도 성령으로 변화 받은 이후로는 큰 감동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물과 감격, 희열, 따뜻한 가슴으로 위로와 격려로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3. 결단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 소개되는 위인들은 성령께서 터치할 때 쉽게 결단하고, 쉽게 행동했습니다. 사람은 결단하는 만큼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결단하는 만큼 새로워집니다. 루디아는 결단력이 탁월했습니다. 그는 사도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 자기 집을 완전히 개방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즉 바울 일행과 함께 선교사역에 헌신하기로 위대한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교 팀을 강권하여 자기 집에 머물도록 주선했습니다. 결심과 결단이 얼마나 단호했던지 사도 바울에게 간곡히 간청하고 강권했습니다.(15절) 우리는 결단하는 만큼 발전합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미술가 밀레는 원래 누드 화가였습니다. 그것도 돈을 많이 버는 인기 있는 누드 화가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전시회를 열었는데 두 청년이 와서 그의 누드화를 보고는 낄낄거리면서 음담패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어찌 이런 수준 낮은 그림을 그리고 앉아 있는가? 이제부터는 인간의 심성을 맑게 해주는 그림을 그려야 되겠다.’ 결단을 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아름다운 전원풍경과 소박하게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린 그림이「만종」입니다. 단 한순간의 현명한 결단이 밀레를 최고의 작가로 변모시켜 주었습니다.
 결론
 루디아는 바울과의 첫 만남을 기점으로 마음을 열고 결단하여 선교 사역에 큰 일군이 되었습니다.    첫째,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는 유럽 선교의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선교의 헤드쿼터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그리고 빌립보 교회로 옮겨졌습니다. 루디아라는 한 여성의 고귀한 헌신 때문입니다. 그만큼 큰 영향력의 인물이 된 것입니다. 셋째, 유럽 최고의 선교헌신자로 크게 활약했습니다. 루디아는 벌써부터 글로벌 리더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선교를 후원하는 것 같았으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중도에 멈추거나 포기하고 탈락했습니다. 대부분 용두사미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일평생 초지일관 묵묵히 헌신했습니다. 연약한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멍에를 같이 하며 목숨 걸고 헌신하는 동역자였습니다.(빌립보서 4:3,15) 큰 인물의 공통점은 초지일관입니다.
 어려운 이민 생활에 지쳐 주저 않아 탄식하지 말고 일어나 루디아처럼 마음을 빨리 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결단을 하여 크게 쓰임 받는 좋은 일군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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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23 Jun 2017 02:57:00 +0900
(생명시냇가)내가 정금같은 인생이 되려면(욥23:8~1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255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사람들이 생활이 어려워지면 그 원인을 남에게서 찾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한명회’ 등을 써서 TV작가로 이름이 나있는 신봉승씨가 ‘남을 욕하는 손가락’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지 않을 때는 보행자였으므로 자동차 운전자를 욕하고 자동차를 몰고 다닐 때는 운전자였으므로 보행자를 욕하고 자동차가 많아져서 홍수일 때는 길이 뚫리지 않으므로 신호등을 욕하고 모든 날, 모든 때, 모든 것을 욕하면서 내게는 성한 곳이 없었다. 오늘 욥에 대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욥이 어떤 사람인가 욥기 1장 1절에서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의 생활을 하나님도 칭찬하였습니다.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루 아침에 완전히 망했습니다. 10명의 자녀가 다 죽고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기왓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내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십니까?”하며 불러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욥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터져 나옵니다. 무슨 말이 나옵니까? “내가 정금같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정금같은 인생이 됩니까?
 1. 내가 정금이 되려면 ‘말씀의 오뚝이’가 되라 하십니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이 부르짖어도 외쳐도 아무 응답이 없었는데 갑자기 마음에 “욥아, 내가 너의 가는 길을 안다. 염려 말거라”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때 욥은 “아! 하나님이 아신다. 내가 지금 어떤 형편에 있는지 하나님이 아신다”하며 마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새벽 기도회 끝날 때 부르는 복음송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는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만 모시고 계시면 다시 일어서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오뚝이 믿음입니다. 오뚝이는 넘어뜨리는 재미로 하는 장난감입니다. 그런데 넘어뜨려도 다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가운데 추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중심에 말씀이 있는 사람이 오뚝이와 같습니다. 중심에 말씀이 있으면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면 정금같은 인생이 됩니다.
 2. 내가 정금이 되려면 ‘감사 자석’이 되라 하십니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다른 말은 잘 못해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중독증에 걸릴 정도로 훈련해야 합니다. 오늘 욥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며 가져가시는 자도 여호와시니 나는 감사할 뿐이다”하였습니다. 여러 성도님들! 아름다운 피부를 갖기 원하십니까? 스트레스를 물리치기 원하십니까? 건강한 몸을 원하십니까? 감사라는 약을 날마다 입에서 내시기 바랍니다. 이 약은 먹는 약이 아니라 입에서 내어뱉는 약입니다. 세 자녀에다 간암 수술을 받은 82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김은혜라는 분은 100일 감사하기로 작정하고 계속 “감사합니다.”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자꾸 이런 생각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감사할 일도 없는데 왜 감사해야 하는가? 미운 사람에게도 감사해야 되는가? 지금 하는 일도 안 되고 어려움이 태산 같은데 감사를 꼭 해야 되는가? 이렇게 말로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러나 정말 지극 정성으로 달여 먹는 보약을 먹는 것처럼 “감사합니다”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주위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화장품을 쓰세요. 너무 피부가 고와요. 윤기가 나고요”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요새 좋은 일 있어요? 기분에 그렇게 느껴져요.”합니다. 예전 같으면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걱정이 태산 같은데”하며 대답한 자기였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좋은 일 많지요.”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놀라는 것입니다. 변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수할 때 얼굴이 참 보드랍다는 감촉이 왔고 화장할 때는 “참 잘되는구나. 이제 보니 내가 참 이쁘네” 하는 것입니다. 계속 감사하니 주위가 변화됩니다. 삼수 끝에 이대에 들어간 딸이 현대 그룹 인재 육성 프로그램에 뽑혔습니다. 아들은 사범 대학을 나와 계속 교사 자격시험에 떨어졌는데 붙었습니다. 남편은 김 사업을 하는데 매년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나서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장사가 부도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82세의 시어머니도 좋아지셨고 또 정성과 감사의 마음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내 마음 밭에서 캐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약은 내가 먹어서 병이 낫는데 감사약은 내 마음에서 캐내기 때문에 남에게 주어야 병이 낫게 되고 그 약을 받은 이웃과 세상이 치료가 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밭인데 이 밭에는 두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감사 열매와 불평 열매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 밭은 자석과 같습니다. 감사하며 열매를 캐내면 불평 열매도 감사 열매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석에 쇠붙이를 오래 붙여 좋으면 그 쇠가 자석이 되듯이 감사는 모든 것을 감사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모두 감사 자석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내가 정금이 되려면 주님을 향해 믿음의 발걸을 걸으라 하십니다.
 욥 23: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수원을 지나고 있다면 서울에 가까이 있는데 “이 기차가 어디갑니까?” 하고 물으면 “부산에 간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있는 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내가 향해 가고 있는 방향이 중요한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 중에 누구의 죄가 더 많으냐고 한다면 당연히 야곱의 죄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바로 인간적인 눈으로 신앙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향으로 파악하면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집니다. 야곱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들판에서 돌배게를 베고 자며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의 복을 열망했습니다.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복을 구하느라 생명을 걸고 씨름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서에게는 그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에게 장자권이란 배고프면 얼마든지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릴 수 있는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00는 신앙이 개떡 같은데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그 이유는 지금 그의 신앙과 믿음은 아주 어린아이 같지만 그가 걷고 있는 쪽은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의 신앙이 정금같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나는 오래 믿었으니, 초신자가 아니니, 그 말씀을 이미 다 들었으니 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 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파내버리고 세상의 썩어갈 것들을 심으면 에서 같이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가”입니다. 주님을 향해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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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08 Jun 2017 23:11:00 +0900
(생명시냇가)주인의 마음과 종의 태도(삼상 25:26-3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179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사무엘상 25장 1절에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픔의 장례식을 치뤘다고 했습니다. 아마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가 죽은 소식을 듣고 정말 허전했을 겁니다. 그리고 사울왕의 공격이 더욱 강해질 것 같아 자기와 함께 하는 백성들을 데리고 마온이라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 곳에는 나발이라는 큰 부자가 아름다운 여인 아비가일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 나발이라는 사람은 돈으로만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다윗이 자기 병사 10명을 나발에게 보내 우리가 너의 모든 재산을 늘 지켜주었으니 우리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나발이 성을 내며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 아니냐 그는 자기 왕을 배반하고 떠나 지금도 도망다니는 녀석이 무슨 양식을 구한단 말이야”하며 쫓아 버렸습니다. 다윗의 병사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자 다윗은 병사 400명에게 칼을 차게 하고 나발을 죽이려고 갑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발과 거기 있는 남자는 다 칼에 죽고 여자들은 종이 되고 재산은 다 없어지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때 집안을 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들의 마음을 닮아 가도록 하나님이 보여주십니다.
 1. 주인의 마음과 종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삼상 25:14 “소년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삼상 25:17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 한 사람 종이 멸망당할 나발 가정을 살리게 됩니다. 이 종은 자기 신분이 종이지만 그 마음은 주인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 종은 비록 자기 주인 나발이 악하고 욕심 많고 종들을 개 부리듯 하였지만 멸망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회든지 주인의 마음을 갖고 있는 종들이 많으면 그 사회는 바르게 갑니다. 요셉이 비록 노예로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일하였지만 언제나 주인 같은 마음으로 일할 때 하나님이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 장군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특히 성도는 종 같은 주인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종 같은 마음은 섬기는 마음입니다. 주인 같은 마음은 아무리 힘들어도 어려워도 속상해도 때로는 억울해도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도 주인이기 때문에 일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로 주인이시지만 종 같은 태도로 일하셨습니다.
 2. “문제의 뒤처리는 내 책임입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삼상 25: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삼상 25: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사람은 언제나 실수 합니다. 잘해 보려고 해도 실수하고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안 좋은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일은 뒷수습을 잘 해야 합니다. 지금 종으로부터 남편 나발이 다윗에게 악하게 한 소식을 들은 아내 아비가일의 뒷수습하는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을 녹이기 위해 물질로, 마음으로, 몸으로, 말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허물과 죄를 자기가 질 것이니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악한 남편, 미련한 남편을 지키기 우해 몸부림을 칩니다. 남편과 다투지 않습니다. 책임지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마음이 무슨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인간의 죄는 내 책임입니다.” 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아담아, 왜 내가 먹지 말라 한 선악과를 먹었느냐 하실 때 아담이 “네, 제 잘못입니다. 제 아내를 용서해 주세요. 제 책임입니다.”했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을 겁니다. 주인은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내 책임입니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뒤처리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삼상 25: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다윗의 마음은 복수심에서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로, 그리고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는 칭찬으로 바뀌었습니다. 삼상 25: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이제 결론은 간단합니다.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은 내 이웃은 모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주신 사람들임을 알고 그래서 관계가 좋으면 더 좋게 하고 혹시 불편하면 좋은 관계로 만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종의 섬김을 갖기 마음원합니다. 내 책임임을 항상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와 관계된 사람이나 사건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1 May 2017 21:29:00 +0900
(생명시냇가)하나님이 감동하셨습니다(대하1:7-1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143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솔로몬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사람이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탁월한 지혜와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셨습니다. 솔로몬만큼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누린 사람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이렇게 특별한 복을 쏟아 부어 주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드린 제사(예배)가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없는가? 찾고 계십니다. 솔로몬에게 은혜와 복을 부어주신 것처럼 그 은혜와 복 주시고자 우리의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1.감사의 제사(예배)에 감동하셨습니다.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능력 있는 자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솔로몬에게 왕위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왕위는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그의 세력과 나라는 심히 창대하게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여 주시기 때문이었다.(1절) 솔로몬은 형통이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살펴주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자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기 혼자만 제사(예배)드리지 않고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재판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족장들에게 명령을 내려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온 회중과 함께 여호와의 장막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고 절대권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였음으로 교만해지기 쉬운 자리였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온 맘을 다해 감사의 제사를(예배)드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사로 드리는 예배에 감동하십니다.
 2. 최선의 제사(예배)에 감동하셨습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놋 제단 위에 일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증언합니다. 천 마리의 번제에는 솔로몬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잘 나타내 줍니다. 특히 주님에 대한 솔로몬의 진정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부자라 해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많은 소를 잡아 각을 뜨고 태워서 드린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이 남다른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최선을 다해서 힘껏 드리고 싶었던 솔로몬의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배드리면서 “내가 최소한의 시간만을 드리고 최대한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을까?” “최소한의 물질을 드리며 최대한으로 큰 은혜를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를 언제나 생각하며 그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감사가 넘치는 예배를 드리며 최선을 다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왕이 되었어도 불행하게 살다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은 세계 각국의 왕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찬사를 아끼지 않은 왕으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기회는 주어져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일을 등한이 여기지 말고 하나님이 감동하시는 예배를 드립으로 위로부터 내리시는 은혜와 복을 받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방에 전파하며 어려운 때를 이겨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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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7 Apr 2017 20:41:00 +0900
(부활절 설교)예수님의 부활 생명(고후 4:7~1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103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매년 부활절이 돌아올 때마다 전하는 말씀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입니다. 어떤 생명입니까?
 1. 죽음을 죽이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죽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 앞에는 다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죽이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만이 죽음을 죽인 것입니다. 고후 4장 11절에서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왕으로 들어오는 순간 죽음은 항복한 것입니다. 여러 분들의 마음에 이미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모든 고난과 환란을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죽이며 사는 것입니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을 죽이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죽음 같은 일들을 죽이면서 사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2. 죽음을 죽이시고 부활시키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입니다.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죽음이 승리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귀에게 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죽이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몇 번째 열매인지 모르지만 우리도 부활합니다.
 3.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오시면 우리는 보배가 됩니다.
 며칠 전, 국민의당 대통령 대선 후보가 된 안철수 후보가 수락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겨울이 물러가야 봄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오면 겨울은 물러갑니다.”하는 소리에 내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빨리 겨울아 가라, 따뜻한 봄이 오게”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빨리 따뜻한 봄이 오거라, 추운 겨울이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내 안에 오시면 죽음같은 두려움도 물러갑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왕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바로 새로운 부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죽음의 마귀는 물러갑니다. 예수님이 말을 타고 군대를 거느리고 오시지 않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은 누구든지 나귀 새끼같이 힘없고 멸시받고 천대받은 사람들도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받으면 말을 탄 군대도 왕도 다 이기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나무 이야기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산에 올리브 나무, 떡갈나무, 소나무가 살았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화려한 보석을 담는 상자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수가 올리브 나무로 짐승이 먹는 먹이통을 만들어 꿈이 다 깨져버렸습니다. 떡갈나무는 자기를 큰 배로 만들어 세계를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배 만드는 사람이 자기를 베어 조그만 낚시 배로 만들어 그 꿈이 다 깨져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소나무는 좋은 집의 재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를 원했는데 어느 날 벼락이 쳐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올리브 나무로 만든 짐승의 먹이통에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여 모든 왕들이 절을 하였습니다. 떡갈나무로 만든 낚시 배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타시고 갈릴리 호수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번개맞아 죽은 소나무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택하시고 은총으로 자녀 삼으시고 은혜로 날마다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얼마나 낙심하고 절망하는지 다 잘 아십니다. 사형수에게 가장 큰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대통령의 사면령 아닙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부활하여 천국 가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항성 먼저 구하십시오. 우리 교회 층계에는 이런 말을 써 놓았습니다. 층계 계단을 올라가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게 했습니다. 믿음 시작 의심 끝 믿음이 시작되면 의심이 끝납니다. 칭찬 시작 시기 끝/ 축복 시작 저주 끝 / 사랑 시작 미움 끝/ 소망 시작 절망 끝/ 용서 시작 다툼 끝/ 부요 시작 가난 끝/ 행복 시작 불행 끝/ 성공 시작 실패 끝/ 나눔 시작 욕심 끝/ 감사 시작 불평 끝. 날마다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응답하시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아멘.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받았으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축복합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3 Apr 2017 02:07:00 +0900
(생명시냇가)예수님이 우셨습니다(눅19:41-4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059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피와 땀과 눈물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속에 주신 가장 고귀한 3대 액체입니다.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피를 흘림으로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땀은 노력의 상징입니다. 땀을 흘리면 값진 성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눈물은 정성과 사랑의 상징입니다. 눈물의 강이 흘러가는 곳에 감동이 있고 사랑과 나눔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들입니다. 피땀,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웃으셨다는 기록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뻐하셨다는 표현은 자주 나옵니다. 누가복음 10:21에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 또 요한복음 15:11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시의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기와 파탄에 빠져 있었던 시기였기에 정말로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께서 적어도 세 번 우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  우셨던 곳이 모두 감람산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일 먼저 우신 곳은 베다니의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였습니다(요 11:35).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요? 질병 앞에서 힘없이 쓰러진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보고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5:13)고 하였습니다. 고난당하는 욥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울며 각자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도 없이 땅에 앉아 마주보고 지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행8: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이 첫 그리스도인 순교자의 죽음에 뒤따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세상에 질병이 들어왔고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처럼 병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 앞에 인간은 한없이 무기력합니다. 그러나 이 질병과 죽음 문제를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해결해 주셨습니다.(사53:4-5)
 2. 조국의 멸망을 내다보며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우신 두 번째 경우는 예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호산나를 외치는 많은 무리들의 환호소리를 들으시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는데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시며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군중들이 ‘호산나’ 하고 외치지만 이제 며칠이 못가서 바로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고 외쳐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들을 보시며 우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이 눈물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로서 자기 민족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담겨있는 눈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릴리를 출발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동족이기에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 속에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 없어도 신앙 안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행 17:26).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도 모두가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유명한 역사학자인 스펭글러(Oswald Spengler)는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나라의 멸망은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적 때문이다.’ 즉 그 나라 안의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타락하게 되면, 그 나라는 다른 나라가 굳이 침략하지 않아도 스스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국에 와서 이민자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조국 대한 민국을 생각하며 느헤미아와 같은 애국의 눈물을 흘려야 할것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느1:4-5)
 3. 십자가를 앞에 놓고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신 곳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였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상황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가 보여준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담 이후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흘린 눈물, 곧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꾸어 놓게 될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눈물은 절망이기보다 오히려 인류 구원의 감격이 담겨 있는 눈물이라 하겠습니다. 눈물의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결론
 크리스소톰(John Chrysostom)은 성도에게 눈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죄의 불꽃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눈물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왜냐하면 눈물은 허무의 용광로를 끄며 죄의 상처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우신 것처럼 울어야 할 때입니다. 병든 자들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자들을 바라보며 주님의 긍휼을 간구하며 울어야 합니다.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평화적으로 조국이 통일되기를 바라면서 울어야 합니다. 말세의 징조들을 직감하며 주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기억하고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을 향해 질주하는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시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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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24 Mar 2017 19:59:00 +0900
(생명시냇가)임마누엘, 아멘(삼하5:10-1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8004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제가 가끔씩 여러분들에게 카톡이나 이메일로 문자를 보낸 후, 끝에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그리고 제가 개 띠이기 때문에 재미로 웃으라고 개가 손을 흔드는 모습의 이모티콘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하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신약에서는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로”라는 뜻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이요, ‘임마누엘’은 성경 용어입니다. 임은(with 함께), 마누(us 우리와), 엘(God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God is with us.”입니다. 그런데 제가 며칠 전 말씀을 준비하다 일본의 ‘빙점’이라는 글을 쓴 미우라 아야꼬가 쓴 다른 간증 책을 읽다가 놀라운 글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전할 때 불교 신자가 많았습니다. 또 일본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기독교에는 불교에서처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없습니까?”하며 질문 할 때, 처음에는 “없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뜻은 나무는(의지한다), 아미타불(영원한 부처)이라는 뜻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이 말이 마음에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인데도 영원히 의지한다는 말이 있는데 왜 우리 기독교는 없는가요 했더니 하나님이 “‘임마누엘, 아 멘’이 있지 않느냐”해서 그녀는 그 다음부터는 기독교인의 세계 만국의 신앙 용어는 “임마누엘, 아 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1999년 77세로 하나님이 불러가실 때까지 병상에서 늘 병과 지내면서 “임마누엘, 아 멘”을 입으로 고백하면 마음에 평안을 느끼며 새 힘을 받아 글을 썼다고 합니다. 이 “임마누엘, 아 멘”은 미우라 아야꼬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아 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고 계십니까?
 1. “임마누엘, 아 멘”은 형통케 하십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이 장면은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으로 잡혀가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이 보니 요셉이 자기 집에 온 후로 잘 되는 것입니다. 왕의 신임을 더 받고 하는 일이 잘 되어 왜 이렇게 잘 되나 했더니 요셉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 믿는 신이 돕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 보십시오.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자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를 겁탈하려했다고 뒤집어 씌우며 증거물로 요셉의 겉 옷을 보여주었는데도, 보디발이 요셉을 죽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죽여야 합니다. 그 일이 사실이든 아니든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이 안 죽이고 감옥에 가둡니다. 왜 입니까? 요셉이 믿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복덩어리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는데도 역시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창 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느 곳에서나 어떤 환경 가운데서나 형통케 하십니다. “임마누엘, 아 멘”을 외치시기 바랍니다.
 2. “임마누엘, 아 멘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복을 받게 합니다.
 창 26:28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위의 장면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이방 땅 블레셋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100배나 거두었습니다. 이것들을 본 블레셋 백성들이 시기가 나서 이삭의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때마다 이삭은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또 빼앗겼습니다. 그 당시 우물을 빼앗긴다는 것은 지금의 유전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잘 되거든요. 이것을 본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친구 비골과 함께 이삭에게로 와서 서로 화친하자고 합니다. 그 때 이삭이 “네가 내 재산을 다 빼앗고 쫓아내더니 왜 화친하자고 하느냐”하니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다.”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두렵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는 이삭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화를 당할 것 같아 화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면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은 “너처럼 나도 복을 받기 위하여 너와 화친하고 복을 빌겠다.”하는 말입니다. 삼하 5장 10절 말씀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하시고는 11절에서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임마누엘, 아 멘”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이웃나라 왕으로부터도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안 다윗은 삼하 5장 12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왕을 삼으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3. 이제 우리는 “임마누엘, 아 멘”만 외치면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무슨 말이던지 말하고는 “임마누엘, 아 멘”을 하십시다. 혼자 있을 때는 크게 소리내어 하시고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조용히 속으로 하십시다.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임마누엘, 아 멘” 하십시다.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임마누엘 아 멘” 하십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임마누엘, 아 멘”, 일하며 “임마누엘, 아 멘”, 저녁 잠자기 전 “임마누엘, 아 멘” 자다가 깨어 잠을 못 이루는 분들은 “임마누엘, 아 멘”하시면 다시 자게 됩니다. 만사를 “임마누엘, 아 멘”하십시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0 Mar 2017 01:45:00 +0900
(생명시냇가)마땅히 사랑해야 할 이유(롬13:8-1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965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신자를 포함해서 불신자에 이르기까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 전반절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빚지는 삶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올해 가계부채가 1300조원을 돌파하여 한국의 가계는 대단히 위험한 상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해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 빚은 복음 증거의 빚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이 사실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빚을 갚는 자세로 열심히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2-13절) 우리는 죄에게 져서 죄악에 끌려 다니며 살지 말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죽이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야 하는데 하는 빚을 가지고 항상 살아 가야합니다. 이외에도 이웃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한 빚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지속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8절에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9절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0절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무거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사랑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은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2. 사랑은 천국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1-14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내세를 준비하는 것이고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현세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천국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내세를 어떻게 준비할까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또한’은 영어로 ‘Besides’(그 외에도)입니다.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이유 외에도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현세가 지나가고 내세가 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워오고,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보다 완전한 구원이 이뤄질 날이 가까워 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지금 성도의 참된 삶이 현세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내세에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한 번 살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내세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 함은 사랑은 영원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현세에서도 가치가 있고, 내세를 위해서도 영원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내세를 잘 준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전념합니다. 우리는 지금 밤을 지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세는 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해서 영생하는 그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 낮을 어떻게, 무엇으로 준비해야 할까요? 사랑으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런데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을 하려면 1)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12~14절) -12절 후반에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기록합니다. 2) 단정히 행해야 합니다.(13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14절) -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사랑하기 위한 이 조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14절 전반의 말씀이 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 예수님과 연합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결론
 카네기는 영국에서 수직공(手織工)의 아들로 태어나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어려서부터 방적공 ·기관조수 ·전보배달원 ·전신기사 등의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철강업을 경영하기 시작하여 세계 최대의 철강 회사로 만든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들 가족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 여비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어머니의 친구 되시는 분이 영국 돈 20파운드를 빌려 주었습니다. 언제 돌려준다는 보장도 없이 그것도 멀리 이민을 떠나는 사람에게 빌려 준 것이기에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일을 해서 한 두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20파운드와 맞먹는 돈이 마련이 되어서 그 돈을 송금하던 날 온 가족이 모여서 서로 축하하면서 기쁨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카네기는 의미 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할 것입니다. 빚은 갚을 수 있을는지 몰라도 은혜는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구는 이 은혜에 대해 평생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그 부(富)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일생을 2기로 나누어 전기에서는 부를 축적하고, 후기에서는 축적된 부를 사회복지를 위하여 투자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실천한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성도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빚입니다. 우리는 빚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빚을 갚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이요 천국에서 많은 상급을 받는 일입니다.]]>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3 Feb 2017 21:48:00 +0900
(생명시냇가)기회(삼하2:8-11)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924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우리 삶에 돌아오지 않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가 화살입니다. 내 손을 떠난 화살은 과녁을 맞추던 못 맞추던 돌아오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내 입에서 뱉은 말입니다. 말은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지나간 과거의 시간입니다. 좋은 추억이던 나쁜 추억이던 지나간 과거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회는 앞 머리카락은 있지만 뒷 머리카락은 없다고 했습니다. 지나가면 못 잡으니 올 때 잡으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사무엘하 2장부터 4장까지에는 기회가 왔는데 그 기회를 악의 기회로 이용해 생명을 잃게 되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사람은 기회를 하나님과이웃을 위해 삼도록 해야합니다.
 1. 기회는 성공과 실패 두 가지를 줍니다.
삼하 2:8~9 “사울의 군장 넬의 아들 아브넬이 이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마하나임으로 건너가서 길르앗과 아술과 이스르엘과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더라”
 사울 왕이 죽고 나서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었는데 아직 온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왕이 되지 않았을 때, 사울 왕의 숙부의 아들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항복하지 않고 사울 왕의 네 번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자기가 권력을 누렸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나중에 둘 다 죽게 됩니다. 삼하 3장 27절에 보면 아브넬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의 칼에 맞고 죽습니다. 그리고 이스보셋 왕은 삼하 4장 7절에 레갑이라는 사람이 침상에 누워있는 그를 죽여 머리를 잘라 다윗 왕에게 가져왔습니다. 레갑은 이스보셋 이스라엘 왕의 머리를 가져 다윗 왕에게 바치면 큰 상급이 있을 것을 바라고 좋은 기회로 알고 다윗 왕에게 가져왔는데, 다윗이 한 마디로, “이 악한 레갑아, 네가 어찌 너의 왕을 죽여 내게로 가져왔느냐”하며 그를 죽이라고 하고 이스보셋 이스라엘 왕의 머리를 아브넬의 무덤에 매장시켜주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 속에 삽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내가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고 나쁜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스보셋 왕이나 아브넬 군대 장관이 다윗에게 항복하였다면 그들의 남은 여생은 대접받고 평안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정말 좋은 기회를 만났는데 아주 나쁜 기회로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가롯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택하신 제자 아닙니까? 그런데 그만 사단의 유혹을 받아 죽음의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만일 그가 자기에게 온 기회를 잘 감당했다면 천국에서 예수님 옆에 12지파 대열에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나쁜 기회를 만나 버림받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 자기의 아끼던 향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부어드렸을 때, 예수님께서 감동하시고 “앞으로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인이 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여 주리라” 하셨습니다. 기회가 오는가 안 오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좋은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2. 믿음의 사람은 항상 어떤 문제든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이 세상에 문제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가정이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죽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곳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교회는 문제가 없습니까? 문제가 있지요. 목사인 저부터 문제가 많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평안한 교회로 지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문제를 좋은 기회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서로 덮어주고 이해해주고 참아주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 몸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따르지는 못해도 아직도 미움이 있어도 용서가 되지 않아도 교회의 평안을 위해서 참고 또 참는 것 아닙니까. 저는 요셉을 참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45장에서 형들이 살아있는 요셉을 보자 이제 죽었구나 하며 두려워할 때, 이렇게 형들을 위로합니다.
 창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이 장면이 클라이막스입니다. 요셉의 위대함입니다. 지금 요셉의 이 말이 평생 가슴에 후회와 아픔으로 살았던 형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갈 6장 10절 말씀대로 우리에게 모든 문제가 생길 때, 언제나 착한 마음으로 해결하십시오.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가정은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이렇게 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롬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살고 나를 택해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어떤 기회를 만나던지 좋은 기회, 나쁜 기회, 내가 지은 모든 죄로 생긴 모든 결과들까지 다 모두 합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언제 누구와도 어떤 문제를 만나도 좋은 기회로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삼하 5:4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 년을 다스렸으되”
 삼하 5:5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윗 왕이 평생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준비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기회입니다. 이 재림의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다 주신 기회입니다. 또한 재림 신앙은 말세 신앙입니다. 우리는 말세, 그 말세가 언제입니까? 아마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안 올 거야. 오지도 않는 주님을 기다리는 거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말세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말세이고 또 하나는 나의 말세입니다. 세상의 말세는 주님이 천사들을 데리고 영광 가운데 오시는 것입니다. 나의 말세는 나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니지요.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있느냐 주님을 못 만나는 것이냐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을 믿게 해주셔서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죽으면 주님 만나십니다. 그러니 주님 만날 때 주님이 주시는 상을 받으셔야 됩니다. 무슨 상입니까? 영혼 구원시킨 상입니다. 이 상을 받는 일을 금년에 하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오는 기회를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이웃에게는 복을 주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09 Feb 2017 22:40:00 +0900
(생명시냇가)위대한 꿈을 이루라(행16:6-1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884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미국에는 세 사람의 생일을 기념하여 제정한 국경일이 있습니다. 프레지던트데이 (President”s day)이라고 해서 매년 2월 셋째 주 월요일로 지키고 있는데 바로 두 명의 대통령을 기념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초대 대통령인 죠지 와싱턴과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로써 매년 1월 15일에 지킵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모두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꿈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초대 대통령 와싱턴은 미국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에게는 독립국가에 대한 강렬한 꿈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국가의 초석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링컨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자유에의 꿈을 가진 그는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노예제도를 폐지시켰습니다. 킹 목사는 미국의 흑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소외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특히 그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은 세계 최고의 명연설로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의 물결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똑 같지는 않습니다. 정말로 빈손처럼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참으로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을 살다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꿈의 차이입니다. 꿈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동물은 먹이를 먹고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꿈을 먹고 삽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꿈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불행은 국민들에게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다름 아닌 꿈 때문에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 지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꿈이 있으면 살고 꿈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과 내가 스스로 갖는 꿈입니다. 전자를 ‘비전’이라 말하고 후자를 ‘망상’이라 합니다. 바울은 1차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실라를 데리고 2차 선교여행길에 나섰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문을 두드렸지만 열리지 않았습니다. 힘쓰고 애써보았지만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신 것입니다.(6,7절) 바울은 처음에 성령보다 앞서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몇 번 길이 막히자 겸허히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밤에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9절에 마게도냐인이 나타나 건너와 우리를 도와달라고 손짓을 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성령께서 복음의 발걸음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돌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자기의 꿈, 아시아에 대한 꿈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꿈, 성령의 비전에 순종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2.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받는 장면입니다. 성전에 엎드린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즉각적으로 “하나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주시옵소서” 하나님 주신 꿈에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처럼 꿈은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하여 수많은 환난을 통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환난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기도를 통해 이루어갔습니다. 그가 마케도냐 사람의 환상을 기도하는 중에 보았고 빌립보로 건너가서도 기도하기 위해 강가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예비하신 동역자 루디아를 만났고. 그리고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쳤습니다. 그 일로 옥에 갇히게 되었고 또한 옥에서 기도하다가 간수장의 가족을 구원 시켰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보여주신 꿈을 이루기 위하여 혹독한 대가를 치루며 이루어갔습니다.
 3.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꿈으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바울이 그 어떤 환경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꼭 포기하고 싶을 때가 다가옵니다. 바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아무 죄도 없이 죽도록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 발은 쇠사슬에 꽁꽁 묶였습니다.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꿈의 인도가운데 빌립보에 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꿈을 가진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포기할 만한 상황을 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포기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꿈의 사람은 절대로 어떤 일을 닥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때문입니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알기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헬렌 켈러를 아실 것입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던 그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시력은 있는데, 꿈이 없는 사람이다.’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합니다. 오늘에 의해서만 자극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급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당장 필요한 것에만 집착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꾸는 자가 창조적인 사람입니다. 꿈꾸는 자만이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꿈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주는 강력한 힘입니다.
하나님 주신 꿈으로 위대한 2017년도를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6 Jan 2017 23:59:00 +0900
(생명시냇가)다윗에게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삼하1:1-1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853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골프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너의 실수가 나의 이익이다.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다.”라는 말입니다. 경기 중에 상대방이 샷이나 퍼팅에 실수를 하면 그 것이 나에게는 좋다는 뜻입니다. 골프뿐만 아니라 다른 경기도 그렇지요. 그런데 경기만 아니라 우리 삶에서 이런 생각과 말들이 오가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교회까지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가 분쟁이 생겨 성도들이 많이 나갔다고 하면 안타까운 마음보다 혹시 나간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오지 않는가 하는 바램입니다. 오늘 사무엘하를 시작하면서 다윗에게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1. 다윗은 사울 왕의 죽음을 진정 슬퍼했습니다.
 삼하 1:11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삼하 1:12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삼상 31장에서 사울 왕과 세 아들이 블레셋과 전쟁하다 다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다윗이 사울의 진영에서 도망 온 아말렉 병사로부터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지 않습니까? 그 동안 수 없는 날들, 자그마치 10여 년 동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사울 왕이 죽었으니 이제부터는 다윗 시대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은 소식을 듣고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옷을 찢으며 울며 금식하였습니다. 삼하 1장 17절에 보면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2. 어떻게 이렇게 슬퍼할 수가 있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실까 생각했습니다.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삼상 26:10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 가서 망하리라”
 다윗은 도망 다닐 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동굴에서 또 한 번은 그가 막사에서 잘 때였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라고 말한 것이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자를 내가 손을 델 수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절대적으로 인정해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왕으로 기름부은 사울을 하나님이 치시리라 했는데 다윗의 말대로 전쟁터에서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뜻은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희노애락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하나님이 택한 사람을 나는 손댈 수 없다.”하는 이 말을 들으실 때, 하나님도 눈물이 왈칵 나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렵든지 또는 아주 잘 되던지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을 제 일로 인정해 드리면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눈물도 흘리시고 가슴도 치십니다. 그리고 기뻐하십니다. 스바냐 3장 17절 말씀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스바냐 선지자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죄악이 세상 사람들을 악하게 하자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첫 번째 왕, 사울을 기쁘게 세우셨는데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마침내 전쟁터에서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다윗은 느꼈기 때문에 슬퍼한 것입니다.
 3.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받았습니다.
 삼하 1: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삼하 1:18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그토록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을 위해 직접 조가를 지어 백성들에게 부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영광이 죽었다고 하며 사울 왕이 행했던 악한 일을 하나도 말하지 않고 그가 행한 좋은 일만을 말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윗은 사울 왕을 용서는 할 수 있지만 높여 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울 왕을 높여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큰 사랑의 선물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생각해서 참았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보시고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중국책 ‘설원’이라는 책에 “절영지회”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갓 끈을 끊고 노는 잔치”라는 뜻입니다. 중국 초 나라에 장왕이 여러 대신과 장수들과 잔치를 벌여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방 안의 촛불이 다 꺼져버렸습니다. 그 틈을 타서 장웅이라는 장수가 왕이 사랑하는 여인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 때 여인이 그의 갓 끈을 끊어 손에 쥐고 왕에게 알렸습니다. 그 때 장왕은 수종드는 자에게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는 모두 갓 끈을 떼어 던지도록 했습니다. 왕의 명령대로 모두 갓 끈을 떼었으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2년이 지났을 때, 진나라가 초나라를 쳐들어와 초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를 몰고 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나라를 구한 장군이 바로 왕의 여인의 입술을 범한 장웅이었습니다. 그는 2년 전 죽었어야 했는데 장왕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동되어 목숨을 걸고 나라와 왕을 지켰던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도록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십시다. 내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가 왜 축복인지 아십니까? 먼저는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나의 잘못으로 인해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위로해 드리고 기쁨으로 바꿔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을 하나님께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 12:3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회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하신 것입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2 Jan 2017 22:41:00 +0900
(신년설교)"교회의 영광"(대하7:11-1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839 하경남목사(서울교회).jpg
하경남 목사(서울교회 담임)
 
솔로몬은 7년 성전 공사를 마치고 완공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11, 12절)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교회의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건물과 시설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것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되길 소망합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필역하고 무릇 그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어떻게 만들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11, 12)
 1.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가 교회의 영광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만 모여 예배드리는 줄 알았는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두 번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한번은 천 번의 제사를 드린 후 기브온에서 입니다. 성경을 보면 솔로몬은 천 번을 작정하고 제사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까지 드린 제사가 천 번의 제사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지 얼마 안 됩니다. 찾아오는 사람, 만나야 할 사람... 정치가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999번까지 응답이 없습니다. 인내의 제사입니다. 셀 수 없는 제물을 아낌없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999번까지 응답이 없습니다. 천 번 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될 때까지 고난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 다윗과 너무 다른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가 기록한 잠언과 전도서엔 고난에 대한 말이 안보입니다. 배고픔이 뭔지. 배신당하는 게 뭔지. 자식이 일찍 죽는 게 뭔지. 억울한 게 뭔지. 고난이 인생의 주제인데 고난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나는 아들을 잃은 같은 처지에 있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24살, 다 키운 딸을 잃은 아버지 목사님의 절절한 고백입니다. 마른 눈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눈물이 고이니 보이는 게 많아졌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고난을 통과한 아버지 다윗과 너무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솔로몬에게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응답이 없는 제사를 999번까지 드립니다. 인내의 제사입니다. 천 번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산 제사였습니다. 일부러 고난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릴 때까지 기다리던 솔로몬처럼 영적인 고난은 필요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31)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게 성도의 힘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너무 바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힘 입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을 기다리는데서 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가 교회의 영광입니다.  다른 데서 교회의 영광을 찾으려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13-15)
 2. 세상을 살리는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13-15)
 가나안의 농사꾼들에게 가뭄과 메뚜기와 염병은 재앙입니다. 늘 가까이에서 괴롭히는 재앙입니다. 하늘이 막혀 비가 오지 않는데 어떻게 모내기를 할 수 있나요? 수고로이 농사를 잘 지었는데, 추수철에 메뚜기가 떼로 몰려와 한 해 농사 다 먹어 치웁니다. 이유도 모를 병으로 사람이 쓰러집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재앙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재앙을 이길 방법이 있습니다. 놀라운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기도가 재앙을 이기게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긍휼을 베푸십니다. 세상을 살리십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부르짖습니다. 그곳이 영광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말을 기억합니다. “내가 천국에 가면 놀랄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도 적게 사용하고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말합니다. “기도할 게 전혀 없으신 예수님은 기도로 온 밤을 지새우셨는데, 기도할 게 산더미 같은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다.” 교회의 영광은 기도입니다. 기도로 깨어있는 교회는 이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합니다. 초대교회는 단순했습니다. 기도와 말씀입니다. 복잡한 게 신앙이 아닙니다. 단순합니다. 능력은 말씀과 기도에서 나옵니다. 단순하게 믿으십시오.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기도하는 무리들입니다. 거룩한 함성입니다. 그 기도가 세상을 살립니다.“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14)
 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네 가지(1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게 있습니다. 첫째 스스로 겸비하고, 둘째 기도하며 셋째 내 얼굴을 구하고 넷째 돌이키면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추구하며 교만하게 하나님을 거부한 잘못된 길을 부인하는 것이 겸비한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쉬운 게 아닙니다. 순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늘 나를 의지하고 내가 원하던 길을 가던 사람이 순종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야 삽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내 자아를 주장하는 태도를 버리는 게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는 태도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발견하려는 욕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겁니다. 이제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의지의 행동이 돌이키는 것입니다. 신앙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가 은혜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사울왕은 처음엔 아버지께 순종하던 자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던 자식이었습니다. 선지자에게 묻자고 하는 종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난 후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었는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이 갖고 있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을 살립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가 있는 교회, 세상을 살리는 능력의 기도가 있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한 모든 교회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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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05 Jan 2017 23:54:00 +0900
(성탄설교)준비된 성탄절(눅1:26-38)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814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성탄절의 키워드는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탄을 예언하면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중요한 것입니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독일에서 3천만 달러의 차관을 빌려와 경제 개발을 하려고 했지만 차관을 보증할 담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내게 된 것이 광부와 간호사였습니다. 이들이 독일에서 번 봉급을 담보로 삼아 차관을 빌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에 건너간 광부가 7,968명, 간호사가 1만 2천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 광부들은 지하 막장 천 미터 이상의 갱도로 내려가서 석탄을 팠습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찜통더위 속에서 목숨을 걸고 일해야만 했습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천정에서 돌이 떨어지면 얼굴과 팔, 등에 상처가 납니다. 문제는 상처부위에 석탄 가루가 그대로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른바 ‘광부 문신’이라는 것입니다. 광부들은 몸에 박힌 석탄 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울로 빡빡 문질렀지만 그 문신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부들의 얼굴에는 아직까지도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 있다고 합니다. 당시 대한민국 1인당 국민 소득액은 70달러였습니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들이 악착같이 일해서 고국에 보낸 돈이 그 당시 우리나라 외화 수입의 1/3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조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 배경에는 이런 분들의 눈물과 땀이 있었습니다. 낯선 나라에 가서 말도 통하지 않고 인종차별도 있지, 목숨을 걸고 하루 16시간씩 일만 하다 보니 이 분들의 가슴에는 다 시퍼렇게 피멍이 맺혔습니다. 그러던 차에 19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독일을 방문했습니다.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고국에 대한 향수병 때문에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졌습니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 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을 듣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울음을 터뜨렸고 식장은 이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식순이 다 끝난 뒤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설움에 목이 멘 광부와 간호사 한 사람 한 사람을 껴안고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나라의 백성이 남의 나라에 나가서 밑바닥 일을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할 때, 대통령이 함께 있어주고 함께 울어준 것이 감동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 같은 대통령, 어머니 같은 영부인이 오셔서 위로해주었을 때 눈물바다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 내 곁에 함께 있어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우리 곁에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날입니다. 그러므로 해 마다 맞이하는 성탄절이기에 큰 의미 없이 보내면 안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탄절이 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1. 요셉은 믿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을 했으나 동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마리아가 잉태 된 것을 알게 되었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매우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대로라면 마리아는 돌아 맞아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나 요셉은 조용히 정리를 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이 고민에 빠졌을 때 천사가 꿈속에 나타나서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잠에서 깬 요셉은 주의 사자의 말을 믿고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성탄을 준비하였습니다.
 2. 마리아는 순종으로 준비했습니다.
 마리아는 순종으로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본문 37-38절에 보면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라는 천사의 말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대답하며 아기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드렸습니다. 마리아의 대답은 쉬운 대답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했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역사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처녀가 잉태한 사건은 없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상태임으로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목숨을 내 걸고 자기 몸에 메시야를 받아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마리아의 순종이 있었기에 성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3. 목자들은 성실함으로 준비했습니다.
 목자들은 성실함으로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목자들은 들판에서 양을 지키다가 성탄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탄이 가까 왔을 때, 유대는 호적 정리로 어수선했습니다. 그때 아무도 밖에서 일하는 그들을 지켜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이 지켜보지 않아도 양을 지켰습니다. 밤새 위험이 가득한 밖에서 양떼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게 양을 지키고 있다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자들은 그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아기 예수님께 달려가서 경배하였습니다.
 4. 동방 박사들은 헌신함으로 준비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헌신으로 성탄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내노라 하는 성경 박사들은 주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한 말씀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주님에게 경배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별을 연구하던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해서 멀리서부터 찾아와서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바벨론과 메데 바사의 포로 생활을 했던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받게 된 사람들의 후예들일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주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먼 길을 걸어오는 헌신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많은 위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막과 강과 짐승과 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온 이유는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마 2:2에 보니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결론
 올해도 변함없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탄절이 오게 되면 성도들보다도 불신 세상이 먼저 호들갑을 떨고 상업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야단들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경배와 찬양과 감사보다는 향락을 위해 존재하는 절기인양 둔갑 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탄절이 즐거운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가 아니라 주님께 죄송한 크리스마스(Sorry Christmas)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탄을 준비하여할 성도들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없습니다.
 우리는 불신자처럼 성탄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답게 성탄을 바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요셉처럼 믿음으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순종함으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목자들처럼 현재 위치에서 성실함으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헌신함으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그리해서 임마누엘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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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2 Dec 2016 20:47:00 +0900
(생명시냇가)하나님을 선택하라(삼상26:1-1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780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어느 교회에 아주 회개를 잘 하는 집사님과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믿음 생활이 아름다운데 비결이 회개에 있었습니다. 정말 회개를 잘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회개를 잘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집사님 이야기가 하루는 꿈을 꾸었답니다. 자기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었는데 그 곳에 천국문과 지옥문이 마주보고 있더랍니다. 그런데 지옥문 앞에서는 문지기가 네 명이 있고 천국문에는 한 명이 있더랍니다. 그래서 천국문에 있는 문지기에게 왜 지옥문에는 네 명이 있냐고 물었더니 조금 이따가 보면 안다고 해서 보니, 한 사람이 툭하고 떨어지더니 그 순간 네 명이 팔 다리를 하나씩 잡고는 지옥문을 열고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지옥에 안 가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네 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문에 있던 문지기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고는 책을 보더니 “응, 너는 천국에 갈 수 있겠다. 그런데 회개를 너무 안했구나. 안되겠다.” 하길래, 이 집사가 문지기에게 사정사정하며 “어떻게 하면 천국을 갑니까?” 하였더니 “그럼, 저 뒤쪽으로 가면 큰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올라가면서 네 죄를 하나씩 회개하며 적으라” 고 하면서 분필을 주었습니다. 그래, 계단을 올라가며 죄를 적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사람이 있어 보았더니 자기 교회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 하도 놀라 “목사님, 아니 왜 내려오세요?” 했더니, 보지도 않고 “분필이 모자라, 분필이 모자라.” 하며 뛰어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꿈이 깨었습니다. 꿈이 깨고 나서 이 집사님은 정말 회개를 잘하게 되더랍니다. 그리고 고민하다 목사님께도 꿈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도 놀라면서 그 때부터 회개를 많이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천국과 지옥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이지만 예수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셨듯이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말씀이 “하나님을 선택하라”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보면 다윗이 마온이라는 곳에 사는 큰 부자 나발이라는 사람에게 부하들을 보내 먹을 양식을 구하였다가 거절과 함께 무시를 당하자 군사를 데리고 가 죽이려고 달려갈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달려와 많은 선물과 함께 남편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며 사정하자 다윗이 용서해줍니다. 그런데 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다음 날 남편, 나발에게 어제 있었던 사건을 말하자 나발이 놀라고 낙담하다가 몸이 돌과 같이 되어 죽었습니다. 그 후 다윗이 이 소식을 듣고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숨어있던 십 마을 사람들이 사울 왕에게 다윗을 고발하여 사울 왕이 다시 다윗을 잡으러 군사 3천 명을 데리고 십 황무지로 왔습니다. 다윗도 사울 왕이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기다리다 밤이 되어 군장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 왕의 군대로 들어갔습니다. 가 보니 사울 왕의 막사는 가운데 있고 왕과 병사들은 모두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그 때 아비새가 다윗에게 오늘 여호와께서 다시 사울 왕을 죽일 기회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못 죽이면 내가 죽이겠나이다” 했더니 다윗이 안 된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습니다.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자 보십시오.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왔는데도 못 죽이는게 아니라 안 죽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 결정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모든 일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자기의 생명도 맡겼습니다. 자기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도망다니고 숨고 하지만 다윗은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이 하심을 믿고 맡겼습니다. 그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맡기는 것입니다. 삼상 26:10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하나님께서 지금 다윗이 말하는 소리를 다 들으시고 보시고 계시며 그대로 응답하셨습니다. 사울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 31: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삼상 31:6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여호와께 결정권을 드리면 여 여호와께서 다 이루어주십니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우리는 내 인생의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3. 하나님이 나에게 준 결정권이 딱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사울 왕을 선택한 사람들은 결국 다 죽었습니다. 자기 아들 셋을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선택한 사람들은 다윗이 왕이 될 때 같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니 조카 롯에서 땅을 선택하는 선택권을 먼저 주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양떼는 풀과 물이 없어 죽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좋게 해 주심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둘째 소돔 왕이 주는 전쟁 재물을 거절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실 줄 믿었습니다. 셋째 아들 이삭을 재물로 드린 것도 죽을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백 번, 천 번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면 무엇 합니까? 외치면 무엇 합니까? 아브라함처럼 믿어야지요. 만나셔야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선택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십니다. 시 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잠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08 Dec 2016 23:37:00 +0900
(생명시냇가)참 감사합니다(합3:16-19)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725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1.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지난 주일은 추수 감사 주일이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삭막한 광야에서40년 간을 지내며 광야에서 초막(장막)을 짓고 살면서 하나님이 지켜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드린 절기로 성경에서는 초막절(장막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초막절의 의미는 알곡신앙인으로 천국창고로 표현된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됨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영국에서 매사추세츠의 플리머스 식민지로 이주한 필그림 파더스의 첫 수확을 기념하는 행사로 필그림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한 1620년에서 1621년 초의 겨울, 혹독한 추위에 매우 어렵고 많은 사망자를 냈으나 주위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언 부족 왐파노아그 족의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듬해인 1621년 가을, 특히 수확량이 많았기 때문에 필그림 파더스는 왐파노아그 족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먹은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브라질에 이민자로 사는 우리들은 이국 만리 먼 땅에 한 해 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새롭게 기억하며 크게 감사하는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를 형식적이고, 관례적인 감사절기로 지키지 말고 진정 기뻐하는 마음을 담아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처한 상황은 결코 감사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찬미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1. 하박국 선지자는 환난의 소식을 듣고 떨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내가 들었으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들은 말씀은 ‘무리가 치러 올라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무리는 ‘바벨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당대에 바벨론 사람들은 사납고 빠른 백성이었으므로 이 바벨론의 공격하는 날은 유다에게는 큰 환난 날이었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질문을 했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부패한 유다의 죄악을 그대로 방치하느냐”는 질문과 또 하나는 “어찌하여 하나님이 유다보다 못한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심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 말씀할지 기다리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의 대답은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그러나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에 대한 하박국 선지자의 응답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고 찬양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2. 이제 하바국 선지자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유다는 바벨론에게 참혹하게 짓밟힐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어주신다면” 크게 감사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조건이 충족되면 그에 따라 크게 감사하겠다고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참된 감사를 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무엇 때문에 즉 감사 이유가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는불신자나 심지어 짐승들도 표현하는 감사가 아닐까요. 하나님이 원하는 감사는  ‘비록 없을지라도’,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감사가 아닐까요. 여기에 어떤 조건과 이유가 붙지 않는 전천후적인 감사, 받은 구원의 은혜, 베풀어 주신 사랑,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살펴주시고 인도해주신 그분의 놀라운 섭리를 생각하며 ‘비록 없을지라도’의 감사가 크리챤의 감사가 아닐까요.
 3. 이제 하박국은 넘치는 소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 선지자의 현실은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주의 음성을 듣고는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며 기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비록 없을지라도’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면서, 주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힘이 되심을 믿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 밭과, 우리와, 외양간을, 소망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실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힘이 되어 그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한다는 소망으로 가득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앞으로 이룰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소망 중에 미리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와 감사의 기도를 올려 드렸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이 노래는 지휘자를 따라, 함께 불러야 할 노래입니다. 또한 악기에 맞춰서, 즐겁게 불러야 할 노래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린 감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금년 추수 감사 주일도 교포들의 형편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참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여야 하겠습니다. ‘비록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우리를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25 Nov 2016 00:03:00 +0900
(생명시냇가)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사는 축복(삼상23:19-29)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687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우리가 즐겨먹는 신(辛)라면의 한문의 뜻은 ‘매울 신’입니다. 또 ‘괴로울 신’, 슬픔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고를 많이 겪었다.”하면 고생을 많이 겪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신(辛)이라는 한자 말 머리에 한 일(一)자를 붙이면 행복할 행(幸)자가 됩니다. 그래서 이 말을 풀이하면 행복과 불행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행복과 불행이, 기쁨과 슬픔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 행복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일을 만나도 잘 감당케 하시는 한 분이 계십니다. 그 한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사는 축복’입니다. 아까 슬픔 ‘신’ 자에 한 ‘일’자를 붙이면 행복할 ‘행’자가 되는 것처럼 슬프고 괴로운 인생살이에 한 분 하나님을 만나면 확 바뀌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이 하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럼 하나님과 내 관계가 어때야 합니까?
 1. 하나님을 나의 울타리로 삼으면 됩니다.
 시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 말씀은 제가 여러분들의 가정이나 상점을 심방할 때, 자주 주는 성경 구절입니다.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라는 말씀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기서 줄로 재어 준 구역은 가정도 되고 상점도 됩니다. 줄로 재어 주셨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만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꼭 이렇게 믿고 고백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하나님 아버지, 내게 주신 가정과 내게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울타리로 둘러 주셔서 언제나 그 울타리 앞에서 살게 해주옵소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주신 장사의 터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장소이고 아름답게 하신 기업입니다.” 매일 매일 이렇게 말 그대로 하시면 이루게 됩니다. 지난 달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 지 499년째 되는 날입니다. 마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문 앞에 로마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95개의 반박문을 붙이고 목숨을 걸고 종교 개혁을 시작한 날입니다. 특히 면죄부에 대해 루터는 교황청을 향해 비판했습니다. 1515년 로마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테젤이라는 수도사가 책임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테젤은 마술사나 곡예사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들의 묘기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이 궤 속에 동전을 넣으면 동전이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죽은 영혼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연옥에서 벗어나 천국에 오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하던 부모나 가족들을 위해 죄를 용서받는 이 면죄부를 사서 고통받는 부모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리세요”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강탈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반박하여 교황청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합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드디어 재판하러 가는 날, 마틴 루터는 지금 우리 찬송가(통)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부르며 교황청을 향해 나갔다고 했습니다. 이 찬송은 마틴 루터가 1529년에 작사하고 작곡한 것입니다. 2절 가사를 보면, “내 힘 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냐 반드시 이기리로다”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기같은 엄청난 교황의 세력 앞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나의 울타리가 되심을 믿고 이 찬송을 부르며 나갔습니다. 드디어 승리하여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는 기독교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어로 ‘Protestant’라고 합니다. 즉 천주교에 대항하여 일어난 종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내 가정에 내 산업에 울타리가 되어 주심을 날마다 구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삼상 23장 27절을 보십시오.
 삼상 23:27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사울이 막 다윗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전령이 급히 달려와서 “사울 왕이시여, 지금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빨리 막아야 합니다.” 그 소리에 사울은 다윗 잡는 것을 포기합니다. 급 반전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필요하다면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우박과 지진으로 적을 치시고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모세가 애굽에서 행한 10가지 재앙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이 살고 있는 고센 땅에는 재앙이 내리지 않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2. 하나님을 울타리로 삼게 되면 예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롬 1: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
 신약 성경의 절반을 넘는 바울의 편지에는 언제나 시작할 때, 인사가 ‘은혜와 평강’입니다. 헬라어로 은혜는 카리스이고 평강은 에이레네입니다. 은혜(카리스)라는 말 속에는 기쁨, 즐거움, 긍휼, 감사 등이 포함된 인사입니다. 평강(에이레네)은 구약시대 샬롬입니다. 만사 형통, 건강, 좋은 관계 등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승리,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카리스)와 평강(에이레네)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 선물은 당연히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될 때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이 인사말을 쓴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왜나하면 카리스(은혜)라는 말은 그 당시 아시아나 중동에서는 잘 쓰지 않았고, 헬라인들은 에이레네(평강)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사말이 카리스(은혜)이고 아시아 사람들은 에이레네(평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두 인사를 합해서 은혜와 평강이라고 편지에 써 보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앞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 크리스찬들은 바로 은혜와 평강으로 살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나의 울타리로 삼게 되면 우리 삶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찾아오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울타리의 문은 하나 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구약 성경 출애굽기 27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짓게 하시고 동서남북으로 울타리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나드는 문은 한 군데만 만들라 하셨습니다. 이 문이 바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문은 매우 넓었습니다. 문 넓이가 이십 규빗이 되게 하라 하셨으니 약 10m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넓게 하셨습니까? 그리고 문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짜라고 하셨습니다. 바탕은 흰 바탕(베실)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출 27:16 “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 놓아 짠 이십 규빗의 장이 있게 할찌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희게 된 모든 사람들이 이 큰 문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으로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와 평강을 가지고 다시 나가서 살다가 또 들어오고 또 나가고 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이런 곳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 보세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교회를 이렇게 기뻐하고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시 122: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교회)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2:6 “예루살렘(교회)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시 122:7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시 122:8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시 122: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교회)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아멘”
 오늘 이 말씀 가운데 자꾸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평강입니다. 이무리 세상이 변하고 어려움이 닥쳐와도 우리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울타리 안에 있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와 평강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 성도들에게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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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10 Nov 2016 22:06:00 +0900
(생명시냇가)아직 기회는 있습니다(마21:28-3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658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포도원 일을 맡겼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맏아들은 간다고 대답만 해놓고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는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뜻대로 한 자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는 맏아들인가? 아니면 둘째 아들인가를 묵상하게 합니다. 
 1. 말씀 앞에 결단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더불어 논쟁하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입성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보며 심기가 몹시 불편했습니다. 자신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유대인의 지도자들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젊은 랍비 하나가 성전 비리를 폭로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것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다 못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께 나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마21:23)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에 3개의 비유를 들어 유대 지도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였습니다. 그 비유는 ‘포도원 주인의 두 아들에 대한 비유’(마21:28-31)와 ‘주인에게 거역하는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마21:33-40), 그리고 ‘왕의 혼인잔치를 거절한 사람들에 대한비유’(마22:2-14) 인데 오늘 본문은 그 중에 첫 번째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통해 자칭 유대 지도자라 일컫는 자들이야말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들은 말씀 앞에 결단을 할 줄 모르는 자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말씀 앞에 결단을 내린 자들이 모여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함으로 역동성과 생명력이 넘쳐나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인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아들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스케줄이 있고 계획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가서 일하라”는 말은 아버지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맏아들은 “아버지 가겠나이다”(29절)라고 대답은 했으나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라고 솔직히 대답을 했습니다(30절). 아버지의 면전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한다는 것은 매우 불손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명령대로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맏아들은 위선적인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유대 사회에서 세리와 창기로 대표되는 죄인들,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서기관, 바리새인 등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위선을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위선적인 신앙으로는 그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세리와 창기보다 천국에 들어갈 가망성이 더 희박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척도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3. 포도원의 일꾼으로 평생을 헌신해야 합니다.
 본문의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그 피 값으로 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해서 그동안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교회의 역사였고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은 세계로 전파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신앙이 유지되고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도원의 일군으로 평생 교회 생활에 헌신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교회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교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 날에 세상 나라들은 멸망 받으나 교회는 마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주께서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들 하나있는 분들은 골방에서 죽고 아들 둘 있는 분들은 길거리에서 죽고 딸만 있는 분들은 싱크대 앞에서 죽는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답게 살다 죽는 길은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라고 청소년 시절에는 교회에서 양육을 받고 훈련을 받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교회에서 헌신하고 늙어서는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영생 복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기회를 놓치지 말고 포도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충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7 Oct 2016 23:51:00 +0900
(생명시냇가)우리가 피할 곳이 어디인가?(삼상21:1-1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627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처음에 제가 브라질에 와서 아끌리마썽 해운대 식당 못미쳐 건너편에 맥도널드 햄버거 집을 보았을 때 반가웠습니다. 미국에서 늘 보던 모습을 보니 그 길도 좋아보였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여기저기 미국 식당들이 많이 눈에 띄어 낯설지가 않아 좋습니다. 버거킹, 서브웨이, 피자 헛 등등이지요. 또 하나는 많지 않은데 흰색 양복에 파란 넥타이를 맨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의 식당이 있습니다. KFC라는 영어로 된 간판이 있는 캔터키 후라이드 치킨 집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바로 이 닭 튀김 집을 시작한, 군대에서 퇴역한 육군 대령 커널 샌더스(Harland David Sanders)라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6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7살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빵 굽는 일을 시작하여 농장 일꾼, 보험 외판원, 직업 군인, 주유소 경영, 레스토랑 경영 등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계속 흥하고 망하고 하다가 미국 대공황 때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65세였고 그의 수중에는 중고 포드 승용차 한 대와 돈 105달러였습니다. 지금으로 계산하면 1,000불 정도 됩니다. 그는 마음에 깊은 병이 들고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루는 집으로 가다 교회가 있어 그 곳을 들어가 보니 어떤 노인이 교회 바닥에 엎드려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귀에 익은 찬송가였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샌더스 대령은 그 찬송이 끝날 때까지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너무나 마음 속으로 파고드는 찬송이었습니다. 자기의 지금 형편과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는 그 찬송을 부르며 집으로 오다가 시장에서 막 쪄낸 닭을 한 마리 사가지고 와서 저녁을 먹다가 문득 ‘이 닭을 찌지 말고 튀기면 어떨까’ 생각이 되어 다시 시장에 가서 찌지 않은 생닭을 사와 집에서 튀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먹어보니 맛이 색다르고 맛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몇 마리를 사서 튀겨가지고 닭 집에다 팔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지금은 세계 80여 나라에 1,300개의 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 망해 세상을 포기하려고 한 65세의 노인은 “예수님이 지켜주신다.”는 한 말씀에 새 생명을 찾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21장에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다 제사장들이 사는 성읍 놉 땅으로 갔습니다. 다윗 생각에 제사장들이 사는 곳이니 사울 왕도 여기는 못 오겠지 하며 그 곳으로 피했습니다. 그리고 앞 길을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곳에서 있던 사건을 통해 우리가 피할 곳은 오직 예수 그리스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1. 거짓말 하는 다윗이 우리입니다.
 삼상 21: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삼상 21: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가 골리앗 장군과 싸울 때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이렇게 믿음의 사람 믿음의 말을 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 다윗이 지금 제사장 앞에서 거짓말을 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도 위급할 때는 거짓말을 합니다.
 2. 다윗은 거룩한 떡을 달라고 잘못 구했습니다.
 삼상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거룩한 떡은 어떤 떡입니까? 레위기 24장 5~9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한 진설병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여 12개의 떡을 만들어 여호와 앞에 진열하라고 해서 진설병이라”고 했습니다. 매 안식일 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 놓게 하셨는데 물린 떡은 꼭 성전에서 제사장들만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너무 배가고프니 “그 물린 떡을 주십시오.” 한 것입니다. “거룩한 떡을 주십시오.” 하니, 제사장이 그 떡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입니다. 지금 제사장은 율법보다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제사장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장면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시는데 제자들이 배가고파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여 안식일을 어겼습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오늘 읽은 말씀인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것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면서 성전보다 더 크신 주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신 주님께서 율법보다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3. 다윗은 미친 짓을 하면서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제사장이 사는 땅에서도 사울을 피할 수가 없어 마침내 적국인 블레셋 땅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 곳에 가면 절대로 사울 왕이 못 쫓아오기 때문에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적국으로 갔습니다. 아마 다윗은 사람의 계획과 생각으로 블레셋 땅에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적국 블레셋에 도망가보니 아가스 왕 신하들이 다윗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삼상 21장 11절에서 “이 사람 다윗은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닙니까. 지금 이스라엘 왕은 사울인데 블레셋 신하들은 다윗을 왕이라고 합니다. 그 땅 사람들이 노래하며 사울 왕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이시여 이 다윗을 잡아 사울 왕에게 넘기십시다. 그럼 우리의 위협이 되는 다윗을 죽게하는 것입니다.” 하니 다윗이 이 말을 들을 때 ‘이제는 죽었구나.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하면서도 순간 미친 사람 흉내를 내었습니다. 살기위한 발버둥입니다. 삼상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면 안됩니다. 아마 다윗은 겉으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미친 사람같이 외쳐 불렀을 겁니다. 회개하며 여호와를 찾았을 겁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다윗이 죽음 앞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고 거짓말하며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배가 고파 죽을지경이 되었을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떡을 달라고 잘못구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 떡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모습을 다 보십니다. 다윗의 모습이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거짓말을 밥먹듯이 합니다. 그리고 해서는 안되는 일을 날마다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우리를 절대로 버리시지 않는다는 약속이고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피할 곳이 어디입니까? 주 예수님입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4 Oct 2016 20:05:00 +0900
(생명시냇가)다급한 속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라(마26:36-4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583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본문은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 지실 것을 눈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와 다급한 속사정을 모르고 기도하다 잠든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응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마 7:7)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특별히 지금처럼 극심한 어려운 때를 사는 우리들은 다급한 속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어 하나님을 움직이는 일 외에 살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시로 깨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게 됩니다. “시험”이란 마귀가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뒤 흔드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시험에 들어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시험을 자행해 왔습니다. 창3장에서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를 시험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살전3:5절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마귀를 “시험하는 자”라고 부르면서 마귀의 시험을 대비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마귀가 당시 교인들을 시험하여 많은 교인들이 믿음에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벧전5:8절에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면서 당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마귀의 작전에 대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지금의 상황 파악을 바로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체포되셔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걷기 직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대비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따르던 베드로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성을 가지신 주님은 다급한 속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 (눅22:42,44)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까지도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렸습니다. 왜 졸며 잤을까요? 그 이유는 상황 파악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운전하는 자가 졸거나 의사가 수술 팀을 꾸려 중환자를 수술하는데 메스를 손에 들고 졸 수 있겠습니까? 항상 깨어 있어야 하듯이 영적으로도  졸게 되면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되고 그 결과 깨여 기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포교회 성도들은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감지하여 상황 파악을 바로 하는 일이 급선무 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게 될 것이고 시험이 들이닥쳤을 때 시험을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여 기도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항상 깨여 기도함으로 시험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감지하고 기도로 대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이라도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해야 할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 아니고서는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기 전에 하신 일이 바로 40일 간의 금식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금식기도를 마치신 후에 마귀가 시험하러 예수님 앞에 나타났고 예수님께서 그 모든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로 시험을 대비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기도 후에 시험을 받으셨고 그 모든 시험을 넉넉하게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험은 기도로 이기는 것입니다. 시험이 임한 뒤에 기도하는 것 보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사전 기도가 더 중요합니다. 시험이 시작된 뒤에는 기도의 자리로 나가기가 힘들고 시험에 시달리면서 기도에 집중하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시험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막 14:34) 주님께서 기도 구속 사역을 시작하시고 기도로 구속 사역을 다 이루신 것처럼 우리들도 바로 지금 즉시 우리의 속사정을 숨김없이 주님 앞에 아뢰어 응답 받아 승리하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2 Sep 2016 23:53:00 +0900
(생명시냇가)좋은 친구가 됩시다(요15:15-1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553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우리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다 친구라고 합니다. 내 아들, 딸도 내 친구이고 내 부부도 내 친구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나의 벗이라 하셨고 예수님은 너희는 나의 친구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관계는 다 친구 관계이고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좋은 친구는 어떤 관계입니까? 영어 단어로 좋은 친구를 “BEST FRIEND”라고 하는데 이 10개의 알파벳이 좋은 친구의 내용입니다.
 1. Believe : 서로에게 믿음을 갖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우리가 믿는 것은 그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제 개인을 보고 믿는다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면 믿음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항상 내 친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 Enjoy: 서로에게 기쁨을 줍니다.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하는 말씀은 혼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8) 그 다음 사람과 기쁨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서 서라”(빌 4:1) 하셨습니다. 언제나 이렇게 구하시기 바랍니다. “00로 인하여 나는 기쁘다. 나는 너의 기쁨이 되기를 기도한다. 내 아들아 아버지는 너로 인하여 참 기쁘단다. 더욱 더 하나님을 잘 믿어 기쁨을 드리고 네 이웃에게 기쁨의 친구가 되기를 기도한다.” 하시기 바랍니다.
 3. Smile: 바라만 보아도 미소가 나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 맘때에 아들을 주리라 하시니 아내 사라가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아기를 낳나”하며 웃었을 때, 하나님께서 “왜 사라가 웃느냐.” 하십니다. 그 때 사라가 하나님께 거짓말한게 들켜 “아닙니다. 저는 안 웃었습니다.” 하자, 하나님이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지금 이 모습은 하나님이 사라를 보시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셔서 미소를 지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보시면서 조용한 미소를 지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에게 이런 조용한 미소가 있어야 합니다. 크게 기뻐하는 것도 있어야 하지만 조용한 묵상가운데 내 친구를 생각하며 미소가 있어야 합니다. 토요일이면 우리 아이들이 제 방에 와서 “목사님, 사탕 주세요.”합니다. 이제는 제가 직접 주지 않고 냉장고에 큰 박스에 각종 사탕을 가득 넣었습니다. “냉장고에서 가져가라” 하면 집어가지고 나갑니다. 어떤 아이는 “감사합니다.”하고 어떤 아이는 감사 인사 안 하고 가면 ”감사합니다.“ 해야지”하면 “감사합니다.” 합니다. 그 때 제 얼굴에 미소가 생깁니다. 이런 미소를 많이 만드는 관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Thank: 서로 감사가 있습니다.
 제가 새벽마다 늘 하는 기도는 교회 가족들을 부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얼마나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어려울 때 입니까. 그런데 열심히 교회를 나와서 예배와 봉사를 하는 모습을 보며 감사 뿐입니다. 서로서로 감사하셔야 됩니다.
 5. Feeling: 좋은 느낌을 갖는 관계입니다.
 여러 성도님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할 때하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합니다.”할 때하고 느끼는 감정(Feeling)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누구 아시지요? 어쩌면 그렇게 믿음이 좋지요. 참 부럽네요. 어떻게 저렇게 교회와 성도들을 잘 섬기지요. 하나님도 아시지요. 꼭 복에 복을 주시고 환란을 만날 때, 그가 기도한 것 꼭 들어주셔서 환란을 이기고 근심이 없게 해 주세요.”하시기 바랍니다. 느껴야 합니다.
 6. Respect: 서로 존중해 줍니다.
 빌 2장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삶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도 다르고 견디는 인내도 다르고 고통을 감당하는 힘도 다르며 시험을 이겨내는 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7. Impression: 서로 좋은 추억이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후로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하였습니다. 서로 같이 있을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항상 좋은 추억을 갖고 있는 관계가 좋은 친구입니다. 우리는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가야합니다.
 8. Excuse: 잘못을 용서하고 용서 받습니다.
 옛날에 어느 시골에 공부를 초등학교만 나오신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시골 조그만 교회라 목사님은 안 계시고 신학교에 다니는 신학생 전도사가 있어 주일에만 교회 예배를 인도합니다. 어느 수요일 저녁에 장로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5:13)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는데 소금을 사투리로 ‘소곰’이라고 했습니다. 이 장로님이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한테 너희는 소와 곰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소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일하십시다. 그리고 곰처럼 힘있게 마귀 새끼들과 싸워 이기십시다.” 하니 성도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무슨 영문인줄 모르고 “다 같이 이 말씀에 아멘 하십시다.” 하니까 모든 성도들이 크게 “아멘” 하였습니다. 나중에 장로님이 자기가 잘못 전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 수요일 설교 때 용서를 구했더니 성도들이 모두 “장로님, 더 큰 은혜 받았습니다. 소처럼 일하고 곰처럼 사탄과 싸우겠습니다.” 하여 교회는 더욱더 부흥되고 그 장로님은 성도들이 다 용서한 모습을 보며 더욱더 교회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9. Need: 서로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 필요합니다. 나는 필요없는 사람이다 하지 마시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교회나 친구들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10. Dream: 꿈을 갖게 합니다.
 실망과 절망 중에 희망을 갖게 합니다. 사명을 갖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지금 10가지 관계를 들었는데 여러분들 생각에 이것을 다 어떻게 할 수 있나 하겠지만 아닙니다. 이 10가지는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아멘. 민수기 14장 28절 말씀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의 친구로 삼으시면 예수님이 다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 말 한 대로 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좋은 친구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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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09 Sep 2016 02:00:00 +0900
(생명시냇가)주께서 주시는 면류관(딤후4:5-8)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523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2016년 리오 올림픽이 지난 6일 개막하여 지난 14일 저녁에 폐막을 하였습니다. 올해는 골프와 럭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28개 종목, 금매달이 306개가 수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도 잘 싸웠습니다. 태극기가 중앙에 개양되어지며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감동 속에서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아름다운 여러 가지의 면류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썩지 않을 면류관, 금 면류관등입니다.  이 면류관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섬김의 삶을 산 자들이 주님 앞에 서는 날 받게 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아름다운 상급은 이 세상에서도 주를 위하여 사는 자들에게 때를 따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사는 날 동안 교회를 통해서 주신 직분, 기업의 축복, 후손의 축복 등은 모두 세상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면류관인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계 2:10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면류관은 시험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핍박을 이기고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약 1:12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환난을 잘 참고 견디어 마지막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충성하여 최후 승리자에게 주는 생명의 면류관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 복음을 위하여 생명 받쳐 사역하는 선교사님들과 평신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북한의 지하교회에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중국이 공산화 될 때 기독교 인구가 450만 명이었으나 모든 선교사를 다 쫓아내고 모든 신학교를 문을 닫았지만 지금 중국의 상황은 그들이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결과로  450만이 1억이 넘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면류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제몫에 십자가를 지고 죽도록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맡겨준 일을 잘 감당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벧전 5:2-4에서 주께서 맡겨준 일에 충성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맡겨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우리는 억지로 하지 말고, 이해득실을 따져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여야 합니다. 마 25:21에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출마해 선거유세를 하던 중 주일을 맞게 되었을 때, 웬만하면 표를 얻으려는 뜻에서 큰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림으로 자기선전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주일 아침에 자기 고향 조지아주에 있는 교회에 돌아가 예배를 드렸고 23년 동안 주일학교 교사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일화는 오늘의 교회 일군들에게 귀감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셨습니다.(출20:6)
 절제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고전 9:25절 이하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했습니다. 운동선수가 금메달을 얻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들은 음식과 수면 그리고 체중을 관리하고 뛰어난 체력을 위해서 특별한 자기 관리를 합니다. 오죽하면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받는 선수들이 그 생활을 지옥과 같다고 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이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서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1-2) 했습니다.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딤후 4:8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했습니다. 여기 의의 면류관은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늘 사모하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소원은 오직 주님이어야 합니다.
 결론
 케네디 대통령 재직 때인 1963년에 대법원이 국립학교에서 성경 교육할 수 없다고 판결한 오늘의 미국은 그때에 비해 폭력 범죄가 560% 상승했고, 사생아가 400% 증가하고, 결손가정 아동이 3배가 늘고, 10대 자살은 200% 늘고, 대학입학시험 성적은 80%가 하락했다고 미국 전 교육부 장관 윌리엄 베넷이 책에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면 인생은 자기를 버리고 사회를 버리고 국가를 버리고 내리막 인생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브라질 이민교회도 점점 형식화되어져 가고 식어져 가고 있어서 큰 걱정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시기 위해서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손에 들고 계신 그 아름다운 면류관을 받아쓰도록 죽도록 충성하고  주께서 맡겨준 일을 잘 감당하며 절제하고 바로 살아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복을 받아 살며 주 앞에 서는 날  천군 천사들의 찬양 속에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썩지 않을 면류관, 금 면류관등 모든 면류관을 받아 주 앞에 드리며 영광을 돌리는 면류관의 주인공 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5 Aug 2016 23:21:00 +0900
(생명시냇가)하나님을 위하여(삼상16:1-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487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평생 집을 짓고 살았던 한 건축가가 나이가 많아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건축 회사 사장이 회사를 위해 수고한 그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 깜짝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은퇴를 앞 둔 건축가에게 집을 한 채 지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 건축가는 ‘내가 몇 달 후에 그만 둘 것인데 사장은 마지막까지 나를 부려 먹는군.’ 불평하며 집을 설계대로 안 짓고 자재도 나쁜 것으로 준비해 허술하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을 자기가 챙겼습니다. ‘이제 회사를 그만 둘 것인데.’ 하며 겉만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집을 다 지은 후, 사장님께 보고했더니 사장님이 전 직원을 집을 지은 곳으로 모이라고 하고는 건축가가 그동안 수고한 것을 칭찬하고 상으로 이 집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 소리에 제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건축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지을 때, 일한 일꾼들은 수군대었습니다. “자기 집이 될 줄 모르고 엉터리로 겉만 아름답게 했으니 저 집을 어떻게 하는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모두 인생의 집을 짓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 집을 믿음으로 잘 지으십시다. 겉으로만 잘 보이는 집이 아니라 속이 튼튼한 집을 지으십시다. 우리 대한교회가 오래 전에 불이 나서 많이 탔으나 기초가 든든해서 교회 위에 체육관도 짓고 깨끗하게 수리해서 우리가 아름답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집을 잘 지으려면 어떤 마음으로 지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짓는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 우리는 환란을 만날 때마다 너무 걱정하며 슬퍼하면 안됩니다.
 삼상 16: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는지라” 사람이 눈을 뜨고 사는 하루 동안에 슬픈 일이 많을까요, 기쁜 일이 많을까요? 슬픈 일, 걱정스러운 일이 많습니다. 잠 14:13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 슬픔은 우리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도 슬픔을 가지고 계십니다. 시 78:40 “저희가 광야에서 그를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할 때, 하나님은 슬퍼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자신이 지셨다고 했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하셨습니다. 성령님도,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은 어디서 옵니까? 첫 번째는 병으로 옵니다. 두 번째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옵니다. 세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의 어려움으로 옵니다. 우리가 환란과 슬픔을 당할 때 기억해야 할 사실은, ① 이 환란과 슬픔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②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잘 알고 계십니다. ③ 그러니 너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면 안됩니다.
 2.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일을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삼상 16:2 “사무엘이 가로되 내가 어찌 갈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오늘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너는 언제까지 슬퍼하고 있을 것이냐 내가 이제 새로운 왕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줄 것이니 너는 준비하여 이새의 집으로 가서 내가 세울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할 때, 사무엘이 “하나님 만일 사울 왕이 알면 나를 죽일텐데요.” 하며 무서워할 때, 하나님께서 “내가 안다. 그러니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이새의 집에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거라” 하며 자세히 가르쳐주셨습니다. 얼마나 세밀하시고 자상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목회 생활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여기 제가 왔을 때를 회상합니다. 그런데 어제 말씀을 준비하며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셔서 얼마나 제가 교만을 떨었는지 회개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올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하나님께서 “너의 기도보다 더 많이 기도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라” 하셨습니다. “너보다 더 안타깝게 울부짖고 기도한 사람들이 있었단다” 하십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대한교회 성도들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환란을 만나서 어려울 때, 안타깝게 기도한 사람들이 여러분들이라 하셨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없어서 목사님을 보내달라고 기도한 기도가 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얼마나 제가 교만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대한교회를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셨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어려울 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셔서 더 좋은 일을 준비해 주십니다.
 3. 그럼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습니다”하면 됩니다.
 삼상 16:4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가로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경기도 화성에서 오혜령이라는 분이 남편 권오성 목사님과 함께 무의탁 노인들과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해 평화의 집을 세워서 헌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오혜령이라는 분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39가지 병으로 그녀는 몇 번씩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고 나갑니다. 그런 가운데 글을 쓰면서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합니다. 그가 쓴 묵상집 “당신없는 인생은 빈 그물이오니”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당신 없는 생의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물고기가 잡히기를 바랐던 지난 나날들은 죽은 시간이었습니다. 오 주님! 이제 당신께서 그물을 채워주소서 그러면 저는 비로소 살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자리에서 서 계신 부활의 주님! 당신없이 한 평생 수고해 보아야 우리의 인생은 빈 그물이옵니다”
제가 전도사로서 미국 포틀랜드에서 교회를 시작한 후, 저는 두려움과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찌해야 됩니까? 이 빈 들 같은 곳,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 교회를 시작하게 하시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걱정되고 근심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습니다. 기억해 주세요.”하며 매일 새벽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 눅 5장 말씀이 들렸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래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할렐루야! 이 말씀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앞에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십시다. 언제나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합니다. 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고기가 안 잡히는 깊은 곳 같은 이곳이지만 고기를 몰아주셔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해주실 것입니다.”하고 선포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해주셨습니까? 매 주일 새로운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9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3년 만에 100명의 교회로 부흥시켜 주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교회 건물을 주시고 아름다운 소문을 내게 하셨습니다. 제가 대한교회에 올 때 와서 설교를 했습니까? 미리 와서 선을 보았습니까? 저의 목회계획을 말했습니까?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한 고백을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난 날의 은혜를 회상만 하며 살아가면 되겠습니까? 언제까지 옛날에는 은혜가 많았는데 하겠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하며 살아야 됩니다. 내일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하며 살아야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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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2 Aug 2016 02:15:00 +0900
(생명시냇가)부흥을 위한 간구(합3: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422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하박국서는 하박국 선지자가 기록했는데 “하박국”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포옹을 하는 자’ 영어로는 ‘embrace’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문제를 안고 씨름해서 하나님의 대답을 얻어낸 사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는 유다왕 여호야김 시대였습니다. 여호야김 왕은 대단히 악한 왕이었는데 25세에 왕이 되어서 11년간 통치하는 동안 악만 저질렀습니다. 이 여호야김 왕은 얼마나 악한 왕이었는지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두루마리에 적어서 그것을 읽어주면 칼로 잘라서 불에 던지며 말씀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파괴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심판을 하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주전 605년에 유다를 침공해서 여호야김 왕을 쇠사슬로 결박해서 잡아갔고 그때에 젊은 사람들 다니엘을 포함해서 다니엘의 셋 친구들을 인질로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가 이처럼 악한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시대상을 표현하자면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공의가 굽어진 시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시대에 살았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위해서 간구한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부흥을 위한 간구는 먼저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라는 하박국의 놀람이 나타납니다. 하박국의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하박국이 왜 두려워했습니까?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습니다. 이 말씀을 영어 성경에는 “O Lord, I have heard thy speech and was afraid”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의 말씀을 듣고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는 뜻입니다. 하박국이 놀라고 두려워한 이유는 깜짝 놀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까? 자기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정확한 대답을 들으려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은 기도도 안하고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답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시여 이 유다가 이렇게 부패하고 죄악이 관영한데 어떻게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묵인하십니까? 유다의 죄악을 무관심하십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하박국서 1장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유다의 죄악은 반드시 징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납고 성급한 백성 바벨론 나라를 일으켜서, 갈대아 언어를 쓰는 이 사람들을 일으켜서 유다를 징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또 문제의식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우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는 유다고 우리는 주를 섬기는 백성인데 저 바벨론은 우리보다 훨씬 악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더 악한 사람을 들어서 덜 악한 사람을 치시는 것을 그대로 보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박국 2장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이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무엇이라 대답하시는지 듣기 위해서 성문에 나가서 기다리고 성루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약탈을 일삼는 바벨론은 자기도 그 약탈을 일삼는 그것으로 당하게 될 것이고 치욕을 당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박국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여 이렇게 서로 약탈을 하고 약탈도 당하고 또 이렇게 물고 물리고 치고 당하고 이런 정치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라는 또 다른 질문에서 하나님은 현실이 변화무쌍하고 정치현실이 문제가 많다고 할지라도 “오직 의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환란과 고통과 변화하는 현실가운데서 반드시 건져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하박국에게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부흥을 전제 조건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여기서 하박국은 이런 문제의식이 부흥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하면서 부흥을 위해서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하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기도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였습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사람에게 의논을 해보아도 그 사람도 잘 모르고 나도 잘 모르고 그렇게 신통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정확히 주십니다.
 우리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불신자는 문제가 있어도 부르짖을 대상이 없으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문제가 있든지 부르짖어서 도움을 청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간구한 내용은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소서” 주의 일을 부흥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왜 응답을 못 받습니까? 그것은 나의 일을 부흥케 해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내 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약4:2-3을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기도 없는 부흥은 역사의 그 전례가 없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흥케 해 달라고 기도하면 가정도 교회도 국가도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인이나 사회나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도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주여 우리는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존재입니다. 부흥을 간구할 아무런 공로도 없고 아무런 의로움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죄악에 대해서 진노만 부으시는 무서운 분이 아님을 하박국 선지자는 알기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지금 하박국이 부흥을 위해 펴고 있는 논증은 “하나님은 진노하시다가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믿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한 것입니다.“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잘 한 것이 없지만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가정은 아무 복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오니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참 자랑할 것 없고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여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 국가가 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처럼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겨서 부흥을 이루어달라고 간구를 하였습니다. 하박국이 근거하고 있는 논리는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잘 들어 주시는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너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데 나는 모르겠다.”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 하면 소경도 눈뜨게 하시고 문둥병도 고쳐 주시고 죄인 중 괴수도 용서해 주시고 십자가 우편 그 흉악한 강도도 “네가 나와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면서 천국을 확실하게 약속하시고 보증하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라고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현재 우리 교포들의 사정은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와 같이 풍전등화(風前燈火) 가운데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아와 하나님의 정확한 대답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부흥하기를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한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간구하여 응답 받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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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22 Jul 2016 00:13:00 +0900
(생명시냇가)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삼상2:1-1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375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성경에서 대표적인 송가는 구약에서는 삼상 2장 1~10절에서 나오는 한나의 송가가 있고 신약에서는 눅 1장 46절에서 시작하는 마리아의 송가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한나가 하나님께 구하여 받은 사무엘을 하나님 전에 드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이고 신약에서는 천사로부터 예수가 네 몸에서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가 예수님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오늘은 바로 구약의 송가인 한나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을 듣게 되십니다. 우리는 한나라는 한 여인의 믿음의 집착과 믿음의 포기라는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아들이 없는 한나는 오직 하나님께 집착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려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얻습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정말 목숨 걸고 기도하여 얻은 아들을 하나님 앞에 서원하여 약속한 그대로 깨끗하게 포기하여 하나님 집에 데리고 가 바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 한나의 믿음의 집착과 포기를 통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일을 이루는 모습을 따라 가라는 것입니다.
 1.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뜻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고백입니다.
 삼상 2: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한나는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때문에 한나가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더 감사하고 더 찬송한다고 합니다. 한나가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라고 찬송합니다. 뿔은 힘, 명예, 권위의 뜻으로 아이가 없어 늘 죄지은 여인이 되고 브닌나의 구박 속에서 살았는데 하나님 때문에 높아졌다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 된 것과 살아가면서 환란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베풀어 주시는 은혜라고 합니다. 돌아보니 자식이 없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돌아보니 브닌나가 자신을 괴롭게 해서 하나님께 울며 매달리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돌아보니 하나님께 서원 기도 드린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돌아보니 남편의 사랑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돌아보니 서원의 기도를 드려 응답받아 아들 사무엘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돌아보니 아이 사무엘을 젖 떼자 마자 하나님 집에 바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진정으로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산다는 거짓 없는 신앙 고백이 있을 때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화과 나무에 가보니 열매가 없습니다. 포도 나무에 가보니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에 가보니 딸 수 있는 열매가 없습니다. 밭에 가 보았더니 거둘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 가보니 양이 한 마리도 없고 외양간에 가보니 소가 없습니다.(합3:17) 그러나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합니다. 나는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합니다.(합3:18) 왜냐하면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발을 사슴과 같에 하셔서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한나의 송가와 하박국 선지자의 송가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은혜를 떠나지 마십시오. 은혜를 무시하고 교만하면 하나님이 미워하십니다.
 삼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하셨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으로 산다는 뜻은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사람이 오래 살고 싶어 한다고 장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나는 오래 안 살 거야 한다고 일찍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정해진 시간대로 삽니다. 또한 가난과 부한 것도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절망치 말고 부자라고 교만치 말아야 합니다. 또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늘 듣는 요셉, 다윗 같은 분들의 삶을 보면 여러분들은 마음에 와서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있는 축복받은 이 사람을 보시면 확실합니다. 제가 바로 오늘 한나와 하박국 선지자가 부른 노래를 저도 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저의 목숨을 담보로 서원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 서원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쓸모없는 이 사람을 높혀 주시고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화 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날마다 외치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심방해 주십니다.
 삼상 1:19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삼상 2: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삼상 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지금 읽은 세 절의 성경 말씀에서 삼상 1장 19절에서 “여호와께서 한나를 생각하신지라”, 2장 11절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2장 21절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고” 하는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한나 집을 심방했다는 뜻입니다. 생각하신다는 말씀과 돌보신다는 말씀은 심방하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교회 주의 종들이 성도들을 심방할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방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떤 때는 목사님들이 깨끗지가 못하기도 하고 또 기도도 안 하고 또 다른 생각이 있기도 하면 제대로 된 심방을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성도는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심방을 오게 되면 언제나 “하나님이 심방하신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말 이해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제가 섬기던 교회에 문만석 장로, 문형석 권사 내외 분이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한국 순복음 교회에서 장로님이 되신 분인데 제가 섬겼던 교회로 오셔서 지금까지 충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장로님이 미국에 오자마자 부인 집사님이 암에 걸려서 가지고 왔던 돈을 수술비로 다 써버리시고 돈 한 푼 없이 되었습니다. 그 때 아이들 셋하고 매일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던 중 아래층에 살고 있던 권사님이 찾아와 무슨 일로 그렇게 울고 기도하느냐 하며 딱한 사정을 듣고는 그 분의 도움으로 그로서리를 시작하여 큰 돈을 버셨습니다. 그런데 부인이신 문형석 집사님이 다시 암이 재발이 되었습니다. 그 때 3번째 암수술을 다시 받게 되어서 그 집에 가서 함께 간절히 기도하다가 제 입에서 “하나님, 이 문집사의 암을 저에게 옮겨주시고 이 병을 치료해 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그 기도를 하면서 ‘아니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는가 만일 나에게 암이 옮겨지면 어떻게 하나’ 하며 ‘내가 이상한 기도를 하고 있구나’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요. 그런데 남편 되신 장로님이 나중에 목사님 “저는 많은 목사님을 만나 기도도 받고 했는데 목사님 같은 기도는 처음 받아 보았습니다.” 하길래, 저는 “장로님,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셨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장로님 가정을 생각하셔서 심방하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지금은 여자 집사님은 권사님이 되시고 지난 달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심장 수술을 위해 병원 입원 중이라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미국에 갈 때마다 늘 대접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왜 그런 기도를 하게 하셨는지는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 알게 되고서는 저는 혼자 펑펑 울었습니다. 오늘 엘가나와 한나는 아이 사무엘을 엘가나 제사장에게 맡깁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제사장입니다. 더욱이 한나가 가장 힘들 때 한나를 술 먹고 기도하는 여자로 오해해서 야단을 친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무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엘가나와 한나는 그 제사장 앞에 아이 사무엘을 맡깁니다. 엘리 제사장을 본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심방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면 심방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에게 심방을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심방하시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08 Jul 2016 00:36:00 +0900
(생명시냇가)무슨 소문이 났는가?(눅7:11-17)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338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I.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매 순간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승리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7장은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많은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지나쳤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자신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소문이 소문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는 ‘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주님의 말씀이 소문으로 들려지지 않고, 여러분들에게 기적으로 일어나는 역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II. 본론
 1. 백부장의 종이 나은 사건과 백부장의 믿음에 대한 칭찬의 말씀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나인 성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나인 성으로 들어가실 때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였습니다. ‘나인’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즐거움이 있어야 할 곳에 아이러니하게 ‘슬픔’의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그 슬픔의 사건이 무엇일까요?
 2. 즐거움의 성인 나인 성에 들어가실 때 주님께서 장례행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장례행렬은 일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가운데 슬픈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나인 성에 들어갈 때 어떤 기대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나인이라는 뜻은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게 된 상황은 가장 슬픈 장례행렬이었습니다. 오늘 그 슬픈 일에 슬픔이 더해지는 이유가 있었데요, 그것은 장례의 주인공이 ‘독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슬프게 하는 하나의 성경의 정보는 그 독자의 어머니가 ‘과부’라는 것입니다. 과부라는 것은 언젠가 자신의 남편을 먼저 보내고서 홀로 독자인 자식을 키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여인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남편을 대신해서 의지하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아들을 남편 삼아, 아들을 소망을 삼아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의 슬픔은 배가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장례가 슬프지만, 오늘 예수님이 만난 장례는 매우 비통한 장례였을 것입니다.
 그 비통한 심정을 성경은 예수님께서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슬픔을 목격하고서, 속 내장까지 뒤틀리는 듯 한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이렇게 비통함과 연민을 느끼신 예수님은 “울지 말라 하시고, 관에 손을 대고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니, 예수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정결’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들은 시신을 만지거나, 시신을 접한 관을 만지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게 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만진 자는 동네 밖으로 나갔다가 부정함의 기간이 끝나고서 들어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 장례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만지는 것은 매우 불결한 것을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당신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상식을 뛰어넘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당시에 사셨고 문화에서 교육받으셨기에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슬픔을 보시고서 그러한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정결 등은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관에 손을 대시면서 그 독자 아들을 살리셔서 홀로된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3. 슬픔 가운데서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적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이슈가 될 만 한 일입니다. 이슈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무슨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신 사건을 그 자리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려워하며’라는 말은, 무섭다는 의미가 아니라, ‘놀라움으로 가득 차다’라는 뜻입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그 자리에서 목격하고서 모두가 놀라움으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멈춰버린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들의 두 번째 반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 또한 매우 비통한 심정이었었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입니다. 자신들도 이 홀로된 여인의 독자가 죽은 것을 보고서 어떤 말로 위로를 하고, 무엇을 해주고 싶었는데, 전혀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낯선 분이 오셔서 그 일을 해주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홀로된 여인과 그 동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가정에, 동네에 슬픈 일로 인하여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들어가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독자를 살려주신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과부를, 그리고 자기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III.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볼보십니다’. 나 홀로 버려둠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속에,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셨던 것처럼’, 우리의 어렵고 힘든 삶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모른 채 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오늘도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계시다는 소문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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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3 Jun 2016 23:49:00 +0900
(생명시냇가)성령이 충만한 교회(행2:1-1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317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행 1:4절에 주께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당시의 상황을 전재한 말씀입니다. 당시의 상황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예수의 추종자들을 찾고 있으며 찾는 대로 옥에 가두거나 처형하는 무서운 핍박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그 가운데서도 책임을 져 주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리 두렵고 무서워 도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허탈감에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큰 힘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즉 성령받기를 기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전혀 기도에 힘썼고 기도한지 열흘 째 되던 날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님께서 오셨습니다. 2절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방 안에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홀연히, 그리고 하늘로부터 임했다고 함으로써 이 현상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소리를 분명히 들었고, 불이 활활 타오를 때 불꽃의 끝 부분이 여러 방향으로 퍼지듯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4절) 즉 성령의 임재는 분명 제자들을 압도하였고, 그들을 변화시켰으며 성령의 능력을 가진 증인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시작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교회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입니다. 성령께서 지상으로 임재하시는 광경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사건과 유사한데 특히 율법의 수여와 언약의 회복을 기념하는 오순절에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마치 바람처럼, 불처럼 제자들이 있던 다락방에 임하셨고 동시에 각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에 성도 개개인을 아시고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며 따라서 그 개인을 인격적으로 만나시고 감화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분명 믿는 자들을 압도하였고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식으로 탄생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순절은 교회의 생일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다.
 제자들이 부활의 확신도 갖고 사명도 이해하였지만 그들 스스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을 받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열흘 만에 성령이 그들에게 충만히 임한 것은 단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한 것은 이제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문턱을 넘어섰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제자들이 어떻게 말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말했는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으로 각처에서 온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그 백성들 가운데 행하신 놀라운 구원 역사를 가리깁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성령이 임하신 현장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근본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이 일을 최우선 순위로 삼고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결론
 성령 강림은 위대한 역사를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다 이루셨고, 성령은 그것을 선택한 자들에게 적용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거룩함과 생명력을 지닌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라 담대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들은 이 사건은 죄와 교만으로 흩어졌던 인류가 주님 안에서 다시 하나로 회복됨을 보여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무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마음으로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간증에는 힘이 있었고, 그들의 사역에는 풍성한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적로 에루살렘 교회는 주께서 날마다 그 수를 더하게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처럼 주님이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모든 부름 받은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포 교회 위에 오순절의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활기 있는 신앙생활, 열매 있는 신앙생활, 능력이 있는 신앙생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신앙생활을 할 뿐 아니라 성도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 치유와 회복과 화합이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7 Jun 2016 01:12:00 +0900
(생명시냇가)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삼상2:27-3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295 이수명목사(대한교회).jpg
이수명 목사(대한교회 담임)
 
요한복음 마지막장인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디베랴 호수에서 베드로와 6명의 제자들이 고기 잡는 곳에 찾아오셨습니다. 밤새 고기 한 마리 못잡고 실망하고 지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얘들아! 고기를 좀 잡았느냐”하니까 제자들이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할 때,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러면 고기를 잡으리라.”하셔서 제자들이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나중에 그 물고기를 세어보니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주님이시다하며 말하자 모두 다 주님 있는 곳으로 달려와보니 예수님께서 떡과 생선으로 아침을 준비해 놓으시고 “자, 이리들와서 아침밥을 먹자.”하시고는 함께 식사를 하신 후에 베드로를 보시고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하시고는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준비해주신 떡은 요한복음 6장 51절의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생선은 마태복음 4장 19절에서 베드로와 안드레를 제자 삼으실 때 “이제부터는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사명을 주시는 말씀이십니다. 물론 야고보 요한 등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신 말씀이십니다. 요 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마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럼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과 사람을 낚는 어부의 축복은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도록 구하라 하십니다.
 왜 구하라고 합니까? 내가 할 수 없으니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벌써 구약 사무엘상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삼상 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찌게 하느냐” 하나님은 생사화복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이 생사화복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복은 하나님으로 심는 것입니다. 삼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 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돈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 일로 사랑하면 자식을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제 일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돈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제 일로 사랑할 수 있는 복을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도록 구하라 하십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일어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복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지난 4월과 5월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나님의 근심을 많이 갖게 하셨습니다. 잠깐 저의 근심의 기도를 들어주신 간증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근심 속에서 저를 만나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목이 메일 뿐입니다. 저의 한 기도, 한 마디, 한 생각까지도 다 보고 듣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하셨습니다. 교회를 향한 근심, 성도들을 향한 근심을 통해 많은 회개를 하게 하셨습니다.
 건강하시던 어머님이 4월부터 갑자기 약해지셨습니다. 어머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모든 휴가 일정을 취소하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많이 약해진 모습을 보며 아내와 저는 옆에서 간호를 해드리며 하나님께 제가 있는 동안 어머니를 데려가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어느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제 마음에 하나님께서 “네 어머니 데려갈 때, 옆에 내가 있는 것이 더 좋으냐 네가 있는 것이 더 좋으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때 “주님이 같이 계시는 것이 더 좋지요.”하고 그 다음부터는 주님 뜻때로 하시라고 하고 상파울에 돌아와서는 계속 기도했습니다. 매일같이 어머니 상태를 미국에서 매부가 사진과 함께 보내 주었습니다. 나는 5월 14일에 효도 잔치 말씀을 증거하도록 되어있어 하나님께 어머니를 5월 15일 후 데려가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5월 20일 금요일 날,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고 속히 왔으면 한다는 소식을 듣고 22일 주일 예배를 드리고 그 날 밤에 미국으로 갔습니다. 떠나기 전에 6월 4일(토) 160번째 축복 안수 새벽 예배와 6월 첫 주일 성찬 예식이 있어 하나님께 6월 3일 금요일에 상파울에 다시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비행기표를 샀습니다. 미국에 가보니 어머니는 의식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듣기는 하시는데 말은 못하시고 음식을 조금만 드셨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불러가시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5월 28일(토) 아침에 가족들에게 어머니를 30일(월)에 불러 가실 것 같다고 하니까 매부가 나는 6월 1일 수요일에 불러가실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30일 날 아침에도 불러가실 기미가 안 보이셨습니다. 30일(월) 저녁 몸이 피곤하고 잠이 와 8시쯤 잠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2시간마다 몰핀을 드려야 되니까 계속 잠을 못잡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를 깨우셨습니다. 옆에서 아내가 곤하게 자고 있길래 나도 그냥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머니에게 가보아라” 하셔서 억지로 일어나 어머니께 가보았더니 이상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늘 입을 크게 벌리고 계셔서 아무리 입을 닫아드려도 또 벌리시던 분의 입술이 닫혔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부르고 흔들어도 반응이 없어 손을 만져보니 뜨겁던 손이 미지근 하였습니다. 발을 만져보니 온기가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었습니다. 조금 전 어머니에게 가보아라 하신 그 시간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나는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기도를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또한 어머님 교회 담임 목사님이 갑자기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사고로 수술을 받아 한국으로 가게 되어 아들인 내가 어머님 천국 환송식 집례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좋은 장례식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아침에 천국 환송식을 하게 하시고 예정대로 비행기를 타고 금요일에 도착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임종을 아들인 제가 옆에서 보게 하시고 그동안 어머니를 옆에서 모시지 못한 불효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시기 위해 직접 아들이 어머니 장례를 집례하게 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모른다고 하겠으며 안계시다고 하겠습니까. 저만 아니라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구나 만나주시고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죄인인 저는 목이 메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어머니 천국 환송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나 평안하고 감사하고 빨리 가서 교회와 성도들을 만나 이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전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저희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있는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근심이 많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심을 교회 성도들에게 다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중보 기도의 사명이 불타기를 구하라 하십니다.
 삼상 2:20 “엘리가 엘가나와 그의 아내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매”, 삼상 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오늘 이 기도는 엘리 제사장의 중보기도를 들어주셔서 엘가나와 한나 가정을 심방하시고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보면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약해있고 또 가정에 문제가 있고 아들들은 불량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중보기도는 하는 사람과 그 대상이 모두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중보 기도는 멸망직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게 했습니다. 성도님들! 우리 교회도 중보 기도로 여러 번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간증들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들마다 이런 성도들의 중보 기도가 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다 중보기도의 축복이 있기를 중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주의 종을 위한 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많이 꿇는 종이 되기를 중보 기도를 계속 해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와 우리 모두가 가장 큰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시기를 중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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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10 Jun 2016 00:25:00 +0900
(생명시냇가)세상으로부터 믿게 하소서!(요17:20-2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259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I.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브라질에서는 ‘어머니 날’이지만, 한국이나 교회에서는 ‘어버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로서 가정의 회복과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소원하고, 주님의 은혜와 복이 가득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는 기도하기를 성도들의 가정과 산업들이 큰 복을 받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복을 받고, 행복해서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이 돌보시고 축복하신다는 증거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교회당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시고 은혜 베푸시며, 축복하심을 경험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운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또한 전도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러한 마음은 저만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셨던 모습을 성경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II. 본론
 1. 예수님은 우리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좇아온 사람들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말들로 인해서 예수님 당신을 믿게 하신 이들을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말과 삶을 통해서 주님을 믿는 자리로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의 능력이요, 삶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의 능력, 삶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성도님들은 말의 능력을 회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를 잘 하면,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집니다. 아니, 그 사람의 영혼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말의 능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의 능력’이 있었던 이유가 21절에 나오는데요. 그 이유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서로 안에 계셔서 하나를 이루셨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되면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 안에 머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 말의 능력을 회복하면 ‘세상이 믿게 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2.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가 되어 세상에 무엇이 진리인가?를 알리시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는 ‘사랑’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도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그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처럼, ‘서로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세상에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밖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시기와 질투를 하는 모습이 밖으로 증거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주일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사람을 만났을 때 ‘교회의 사랑’, ‘성도간의 사랑’, ‘성도의 보살핌’을 이야기하셨습니까? 아니면, 누구는 이렇더라... 저렇더라... 라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주의 종을 잘 섬긴다,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이 세상에 증거 되기에는 예수님의 사랑, 교인들 간의 서로 사랑이 전혀 증거되지 않는 것입니다.
 3.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받으신 사랑과 영광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바람은 그들로 하여금 주님 당신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들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들 안에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이 함께 계시는 지를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를 원하시는데,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모실만한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여지가 없을까요? 그것은, 세상이 가득 차 있고, 자기 자신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자신을 비울 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마치,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또한 매일의 삶에서 자기가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면, 예수님이 거하실 여지가 없게 됩니다. 또한 온갖 걱정과 근심이 가득 차 있다면 예수님이 거하실 여지가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마음을 다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할 수 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생각과 자신의 독선적인 생각을 좀 내려놓고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매일 묵상할 때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III.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 안에 주님이 거하셔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이러한 역사가 결국은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를 변화시켜서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돌보심이 나타나면, 세상이 인정하게 됩니다. 나의 친구들이 나의 변화를 통해 예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나와 함께 한 가족들이 나 자신의 변화를 통해서 예수님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번 한 주간에 주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셔서,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시고, 그것이 증거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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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Thu, 26 May 2016 02:46:00 +0900
(생명시냇가)가장 행복한 가정(시128:1-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7238 김영수목사(사랑의교회).jpg
김영수 목사(사랑의교회 담임)
 
국가별로 행복지수를 조사해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 상위그룹에 속하는데 모두가 놀랐습니다. 방글라데시는 국민소득이 낮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국토개발이 거의 안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비가 오면 그대로 홍수를 당하는 나라입니다. 산업기반이 아주 빈약합니다. 문화시설, 기술문명, 모든 면에서 미개발국인 아주 못사는 나라로 정평이 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복이라는 것은 소유입니다. 좋은 집을 소유하고 큰 사업체를 가진 자들을 향하여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소유와 행복은 다릅니다. 행복은 소유하는데서 얻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가정의 행복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의 의미
 우리 식탁에 먹을 것이 푸짐한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맛있게 먹는 것은 행복입니다. 입맛을 가지고 음식을 맛있게 먹는 그것은 행복입니다.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침대를 방에 들여 놓는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그 침대에서 단잠을 주무시는 그것은 행복입니다. 여러분, 불면증에 걸리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만 걸리고 노숙자만 걸리고 무식한 사람만 걸리는 줄 아십니까? 대궐 같은 집에 사는 사람도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푹신푹신한 좋은 침대위에서도 잠을 못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유와 행복은 다릅니다. 남이 못 가진 것을 가진 것은 복입니다. 그러나 이 복을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주고 남을 유익하게 하는 거기에 행복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17절에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5절에는 “고난 받는 자는 그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우리 마음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절에도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가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놓고 잔치를 했다고 했습니다. 이 잔치가 곧 행복입니다. 행복하면 잔치분위기를 연상하면 됩니다. 이 잔치의 의미가 성도의 가정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은 언제나 잔치 분위기 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잔치집 같은 가정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이 잔치가 곧 행복의 의미를 전달해주는 용어입니다. 잔치집의 분위기를 여러분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잔치 집에 가시거든 항상 좋은 덕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잔치 집에 가서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조금 덜 반가 워도 “반갑습니다” 하세요. “잘 지냈습니까?” “건강이 좋아 보입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인사하는 게 잔치 집에 가서 대화하는 예의입니다. 빤히 쳐다보고 “요즘 영 안 좋아 보이네요.” 잔치 집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식 날은 신부가 조금 덜 예뻐 보여도 예쁘다고 하는 것은 원죄에 해당 안 됩니다. 제가 하객으로 가면 신랑, 신부 가족들에게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가서 신부 아버지를 보고는 “참 좋은 사위 얻으셨습니다.” 또 신랑 아버지를 보고는 반대로 “좋은 며느리를 얻으셨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고 하기 좋은 말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에 사탄이 좋아하는 말을 다 해소해야만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말이 우리 가정에 많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의 대화 속에, 생각 속에, 우리들 삶의 모든 행위 속에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잔치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의 가정들이 험악한 가정으로 되어 가느냐? 매스컴에서 가정의 달이라고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악마 같은 부모 이야기, 악마 같은 자식들 이야기, 아주 살벌합니다. 시편 9편 2절에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라고 했습니다.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성도의 영적잔치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행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복하신 그 행복이 내게 전달이 되어야 나도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복이고,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데 내가 여호와의 그 행복을 전수받지 못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기뻐한다는 말은 주님이 누리시는 그 행복을 나도 누린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기쁨을 누리시는데 그 예수님의 기쁨이 아닌 세상 기쁨을 찾고 있는 그것은 성도의 기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행복한 가정
 오늘 우리 사회의 위기 중 하나는 행복의 현재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행복은 지금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드 멜로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은 가까이 있는데 우리가 그 행복에 대해서 잘못 느끼고 있는 것은 집착 때문이다.” 행복은 가까이 있고 지금 내가 행복한데 이 행복의 환경과 여건과 방법과 조건에 자꾸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만해도 행복한데 ‘아니야, 나는 더 가져야 돼, 나는 더 높아져야 돼, 나는 아직 이것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 그 조건과 여건이 자꾸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낳아놓고 볼수록 귀엽고 아름답고 안 볼 때는 생각만 해도 귀여운 상태에서 애를 양육을 해야 됩니다. 애를 쳐다볼 때마다 ‘안 태어날게 나 가지고 왜 이래 속을 썩이나?’ 할 수 없어 키우는 그런 부모라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이 극단적인 양면이 우리 사회에 지금 얼마나 있는지 모릅니다. 자식을 저주하면서 키우고 있는 부모가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도 이제는 짐이고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부모 공경이 이제는 짐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자식 양육이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상호 비극입니다.
 이 양면성이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해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행복의 현재성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에서 행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 여러분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도 큰 복입니다. 그 복을 가지고 행복하십시오. 얼마나 더 가져야 행복하렵니까? 얼마나 더 조건이 갖추어져야 베풀고 선한 일을 하렵니까? 얼마나 더 있어야 불우한 사람에게 내가 자선을 하렵니까? 현재의 모습에서 하십시오. 그러면 행복해집니다. 지금 행복해집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행복의 현재성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 행복이 현재성을 잃어버리면 의무가 되고 집착이 되고 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복을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이 말은 복을 소유하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문맥은 복을 누리고 복을 나누고 베푼다는 뜻입니다. 복의 현재성을 말합니다. 복의 진행형입니다. 형통하다는 말은 현재형입니다. 지금 형통하다는 말입니다. 지금 형통하므로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의 가정이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네 집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아내, 푸른 감람나무 같은 자식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집, 이것이 가정의 모형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누릴 줄 아는 가정
 종교는 성격이 있는데 불교는 초상집이고, 유교는 제삿집이고, 기독교는 잔치집이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이것은 의미가 맞습니다. 불교는 죽은 자를 집착합니다. 장례식을 아주 엄격하게 의식을 갖추는게 불교입니다. 극락장생 하라고 온갖 것을 다 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라도 빠지면 죽은 자가 극락장생 하는데 장애가 될까봐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유교는 얼마나 제사를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조상 대대로 제사를 강조합니다. 그 집안에서 벼슬한 사람이 있으면, 몇 백년 대신이나 정승이 났다고 하면 오백년 고려조의 역사는 잊어버려도 그 집안의 정승을 한 조상은 안 잊어버립니다. 그만큼 제사를 강조하는게 유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죽은 자에게 얽매이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 잔치하는 집입니다. 어제 잔치한 집에 가는 게 아니고 오늘 잔치한 집입니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 병든 행복관, 조건에 집착하고 환경에 집착하고 계속 더 가져야만 행복할 줄 아는 이 복의 중독증, 이것은 병든 행복관을 낳고 마는 것입니다. 복의 여건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지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여간 큰 복을 받은 상태가 아닙니다. 복을 못 받은 게 아니라 받은 복을 누릴 줄 모르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이 상태에서 행복하시면 되는데 행복의 수용성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답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온 가족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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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설교> Fri, 20 May 2016 03:15:00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