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 오피니언 > 연재 http://nammicj.net/n_news/section.html?code=netfu_89053_16079&s_code=20110403032724_2582 "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 rss 보기 ko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세월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41 1Q5K1338 nm.jpg
 
돌을 다듬고 튼튼히 세운 건물인데
세월의 힘을 못 당해 돌 틈이 벌어지고
서로 어긋나고 틀어져 어깨 축 처진 돌집

무너질까 걱정에 나무기둥 몇 개를 세워
쓰러질 듯 기운 어깨를 받쳐주었는데
짓누르는 돌 무게와 버텨주는 나무가
누가 이길 지 뻔해 팔짱 끼고 웃는 세월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시편 89:47)

​- ​앙코르 왓, 캄보디아​ -​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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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2 Jul 2018 20:40: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1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37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태초의 창조와 그리스도 안에 창조
 성서적인 창조 신앙은 그리스, 로마의 세계와 만나 대결함으로서 고대교회의 창조 신앙을 지켰다. 창조 신앙은 고대교회의 신앙에서 특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헬라의 우주론이 창조 신앙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교부들은 헬라 우주론에 접근하였으나, 성서적 창조에 관한 계시론의 결정적 요소를 지켰다. 기독교적, 성서적 창조 신앙은 특히 영지주의와의 대결에서 신구약의 나타난 창조주와 구원자의 통일성의 창조를 강조했다. 영지주의의 이원론과 헬라의 창조 개념에 반대했다. 서방에서 창조의 진리와 철학적 이론을 조화시킨 이는 어거스틴이다. 그는 서방과 동방의 사상을 통합시켰다. 중세기 스콜라주의와 성서적 신앙과 철학적 사변이 종합을 이루었다. 개혁자들은 창조의 신앙을 성서적 입장에서 받아들였다. 창조에 대한 중세의 철학적 사변을 거부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 고백 제1조에서는 하나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모든 것의 창조주요 보존자로 고백했다. 초기 기독교의 창조 신앙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이다. 요한복음의 서론에 보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평행을 이룬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이 창조돼었다는 증언이다. 요한 1서 1장 1절, 2장 13절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를 증언한다. 사도들의 서신인, 골로새서 1장 15절-17절, 고린도 전서 8장 6절, 히브리서 1장 2절도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를 증언한다. 이같은 창조의 진술은 구약의 창세기의 창조 진술에 대한 유대적 전승의 직접적인 영향이다. 이같은 창조의 진술은 이사야, 시편, 잠언, 욥기 등에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창조 선언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종말론적인 사건 속에서 창조의 중보자 됨을 선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는 구속사적, 종말론적 측면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의 의미를 몇 가지로 설명한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라는 신학적 선언은 창조와 구원의 통일성을 진술한다. 그것은 ‘옛 창조’와 ‘새 창조’라는 이원론이나 영지주의를 배격한다. 양자는 서로 상호 보완적 관계이다. 하나는 지나가는 것이고, 하나는 오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라는 동기는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중요하다. 세계는 맹목적 사건이나 우연성도 아니다.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음은 세계가 근거가 있는 현실이고, 내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창조는 정적인 윈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하여 움직여 가고 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라는 선언은 단지 태초로 돌이키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종말을 향하여 세계의 과정과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메시야의 빛 아래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시작되고, 그에 의하여 종말론적으로 완성해 나간다.
 4) 성서적인 창조 신앙은 우주 발생론적 신화를 무력화시킨다. 창조 신앙은 하늘과 땅을 숭배하는 모든 종교의식을 무효화시킨다. 창조의 진술은 역사적 행위로 창조를 찬양하는 구원의 신앙 전개이며, 자신을 주님으로 하신 하나님을 믿는 창조의 신앙이다.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분출이 아닌 하나의 역사적 행위이며, 사건이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행위이다. 하나님 자신의 자유로운 필연성으로부터 일어난 사건이 창조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본질과 의지의 깊이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고 알려진 주의 은사임을 말한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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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2 Jul 2018 20:34:00 +0900
(사도행전 10분 묵상)28. 성령님께 순종하는 빌립 집사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36 김성현목사.jpg
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8:26-40]
 사마리아의 부흥의 출발과 기폭제가 되었던 빌립 집사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는 섭섭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핍박 중에 맺은 열매이기에 그들과 언제까지라도 함께하며 말씀으로 양육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빌립에게 일어나 떠나라 명하십니다. 26절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사마리아에서 부흥을 뒤로하고 떠나라 하시는 하나님,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광야로 가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빌립집사님을 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27-28절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빌립은 광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빌립을 광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 집사의 순종을 통해 사도들도 아직 이루지 못한 이방인 선교의 첫 장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재무부 장관이자 내시인 이 사람은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1,500km정도 되기에 수레를 탔다고 해도 한 달 이상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먼 거리를 간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이방인이라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방인의 뜰에서 예배했을 것입니다. 또한 내시이기에 부정하다 하여 성전입구에서 출입 자체가 통제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루살렘을 향했고 돌아갈 때는 이사야서 말씀을 묵상합니다.
 29-31절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났을 때,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그가 읽는 것을 깨닫는지 묻자, 가르쳐주는 이가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고 하며 빌립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 때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은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성령님의 계획하심이 놀랍습니다. 사마리아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있는 한 사람을 부르셔서 광야로 나아가게 하시고 바로 그 곳에서 그 시간에 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그것도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역사를 봅니다. 그 순종을 통해 유럽으로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아프리카로 먼저 복음이 전해지게 됩니다.
 39-40절을 보면 주의 영에 이끌린 빌립과 주의 말씀에 이끌린 내시는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바로 말씀을 깨닫는 기쁨과 세례를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구원의 기쁨입니다. 빌립 집사는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복음을 전하고 주의 영에 의해 또 다시 새로운 길로 나아갑니다. 사도행전 21:9절에 보면 바울과 그의 일행이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볼 때 이 후 그는 가이사랴에 정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와 아프리카에 복음을 최초로 전한 사람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바울 사도의 로마행의 기초를 준비하는 개척자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빌립 집사처럼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 광야 같은 삶에도 생명의 길을 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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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2 Jul 2018 20:33:00 +0900
(KWMA2018년 세계선교대회)중남미선교 정보 및 미래선교전략적 방향-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34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선교사(중남미선교전략연구소장)

 회교는 전체 인구의 0.34%로 약 140만명을 차지하고 있으며 불교는 0.16%로 약 2,3000명, 힌두교는 0.13%로 약 89,4000명, 유대교는 0.20%로 약 10만명을 차지하고 있다.
 2. 중남미 미래선교 전략적 방향
 1) 중남미지역은 지금도 선교지이다
 선교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 예수님의 지상명령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아 복음전퍼와 가르치고 지키도록 교육하는 일과 모든 질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사역을 하는 것이 선교사역이다. 중남미지역은 라틴아메리카 24개국과 카리바안 해안국가 22개국을 합한 46개 나라가 있으며 1509종족으로 이루어진 약 5억2천만명이 살고 있으며, 사용하는 언어가 1183개나 되는 지역이다. 이 가운데는 한번도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미접촉 종족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서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이 그 어느 지역보다 많은 또한 발굴하고 꿈과 비전을 나누며 양육 훈련하여 선교사로 파송할 MK, PK들이 있고 세계각처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 현인인 리더를을 그리스도의 제자삼아 무너져 내려가고 있는 유럽과 이스람권을 비롯한 세계각처에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너무 적합한 지역이다. 그러므로 중남미지역은 지금도 여전히 선교사를 필요로하는 선교지이다.
 2) 중남미 지역선교의 현안
 한국교회와 선교단체는 더 이상 선교지가 아니라는 중남미지역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아도 거리가 멀고 경비가 많이 들고 현실적으로 사역현장을 드려다 보기가 쉽지 않아 여러 가지 구실로 중남미지역 선교사 파송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KWMA를 중심한 각 교단선교부, 각 선교단체 및 선교지도자들이 의식을 가지고  중남미지역이 선교지임을 분명히 말해주어냐 할 뿐 아니라 선교전랙과 정책이 바로 실시되도록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4차혁명에 주역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 선교이다.
 3) 차세대 리더의 발굴과 양육 및 파송이 필요한 지역이다
 더 이상 선교사들이 파송되지 않아 시니어 선교사들의 바톤을 이어갈 사람이 없어(아마존 박동실 선교사, 폴타레자 이원길 선교사, 브라질 이홍우 선교사, 파라과이 정금태 선교사, 알젠틴 정현식 선교사 등) 고민하고 있다. 그러니 아직 한국선교사가 한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나라가 많고, 1509종족 중 아직 복음을 접촉해 보지 못한 족속들에게 손을 펼칠 수 없는 실정이다. 그 대안으로 부모따라 중남미 정착하여 이 지역에서 교육을 받아 언어와 문화를 익힌 MK, PK들을 비롯한 2, 3세 젊은이들에게 선교적 도전을 주어 선교의 꿈과 비전을 가지고 중남미지역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한국교회와 미국교포교회가 중남미지역의 차세대 리더발굴과 훈련을 위한 과감한  선교투자 전략을 세울 것을 제안한다.
 4) 비즈니스선교와 디아스포라의 융합한 자비량 선교전략
 경비가 많이 들고 거리가 멀어 현장을 제대로 들여다 볼수 없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으로 비즈니스와 디아스포라를 융합하여 자비량 선교할 수 있는 대책을 연구 개발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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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2 Jul 2018 20:31: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주저 앉을 날만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9 1Q5K1406 nm.jpg
 
몇 백년 동안 밀림 속에서
숨겨졌다가 드러난 사원

나무는 거대하게 자라서
폐허된 사원을 깔고 앉았고
사원은 폭삭 주저 앉을 날만
숨 죽이며 기다리고 있고

그 때가 다가오는 건 아는데
주저 앉을 그 날은 모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베드로전서 4:7)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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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5 Jul 2018 05:41: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11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6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창조 신학과 자연과학
 기독교 창조 신학은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며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인 것에 대한 고백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이야기들은 과학적 묘사이기보다는 세계와 우리 모두를 창조하시고 화해케 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시적이며 칭송의 선언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매우 광범위한 문화사적인 배경 속에 “맨 처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어떤 것이 들어 있다. 이 주요 특징들은 매우 초기에 이 세상에 살았던 인종들, 민족들, 여러 종족들에 공통적이었다”고 베스터만은 언급했다. 고대 근동지역에는 흙으로 사람을 짓는 것, 홍수, 첫 타락, 형제 살인, 탑 건설 등과 같은 원역사(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주제와 같은 이야기들이 고대 근동 문화의 원시 문화에 전승에도 등장한다. 구약에서 창조 본문은 이 세상은 창조주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세상을 보존하고 가꾸는 일이 인간에게 위탁되었다는 것이다.
 신약성서, 특히 예수의 선포와 바울 서신들은 구약성서의 창조의 신앙을 고백한다. 창조의 즐거움과 부활에서 이루어질 창조의 갱신을 바라는 희망이 기초에 근거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은 모든 창조물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로서 모든 창조세계의 행복을 위하여 행동한다.
 성서의 이러한 말씀들과 현대 자연과학적인 지식들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마틴 루터는 신앙 고백 제1조를 설명하면서 “나는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에게 몸과 영혼, 눈과 귀, 그리고 모든 지체들, 이성과 모든 의미를 주시고, 또 지금까지 보존해 주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동일한 사건을 자연과학적인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말한다.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말할 수도 없다. 진화론은 인간이 다른 생물에 대한 독특성의 지위를 부정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의미성을 상실되었고, 허무주의는 생길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인 이론은 자연 현상들에 관해 이성과 체험으로 얻어진 제한되고 잠정적인 진술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궁극적인 기원과 의미를 자연과학적인 이론은 알지 못한다. 기독교 창조론은 과학적인 지식의 효용성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론은 모든 자연적인 과정을 “하나님의 창조적인 손안에 근거된 것”으로 이해한다.
 1) 우리는 과학과 신학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과학적으로는 자료, 경험적 증거, 인과 관계, 확률이론 등에 사용한다. 신학은 이야기, 상징, 비유, 암시, 은유, 시적인 표현들로 말해지는 언어가 사용된다. 우리는 과학의 언어와 신앙의 언어를 어느 하나의 언어체계로 만들기보다는 각각의 독특성을 인정해야 한다.
 2) 그러나 우리는 과학과 신학의 두 개의 언어가 전적으로 다르거나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이 두 언어체계는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 물론 우리가 성서가 과학을 설명하는 무오한 교과서라고 하면, 성서에 많은 부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된다. 과학자 갈릴레오의 경우 과학과 신학 사이에 있었던 적대감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왔다. 최근의 ‘창조 과학’운동 등이 과학과 신앙 사이에 얼마나 적대감을 갖고 왔음을 보여준다. 21세기 들어와서는 과학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함께 간다. 신앙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와 협력하여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더욱 풍요하게 한다. 한 과학자에 따르면, 오늘날의 신학이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과학적 이해는 신앙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학은 자신의 연구 안에 있는 신비의 차원에 대해 개방성을 가져야 하며, 신앙과 신학은 현대 생물학적 연구와 과학적 우주론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하나님은 정적이고 닫혀진 우주가 아니라 역동적이며 열려진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 하나님은 참으로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 하나님은 지속성, 질서, 일관성뿐만 아니라 변화, 새로움, 불확정성이 있는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은 “인간의 실존의 지속적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의 기쁨의 노래에 참여하는 데 있다. 이러한 찬양의 노래는 인간 이전에도 불려졌고, 인간의 영역 바깥에서도 불려지고 있으며, 아마도 인간이 이 지구로부터 사라진 후에도 불려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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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5 Jul 2018 05:38:00 +0900
(성경강해-요한복음해설)42.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4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본문 : 요한복음 16:17~33]
 예수님께서 자신이 승천하여 아버지께 가야 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로 인하여 제자들은 서로 문의하였습니다.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곡하고 애통하며 근심하지만, 세상은 그로 인하여 기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자 했던 세력들과 그에 대해 열광했던 자들을 말합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대제사장들)과 유대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자부하였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세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갖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그동안 가졌던 의문점이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간구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직접 아버지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을 믿었음으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간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주님께서는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믿음을 고백하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 때문에 환난을 당하더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믿음을 깨뜨리고 믿음에서 좌절하고 실망하게 하는 세상과 주님의 나라가 서지 못하도록 하고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그 세상에 대해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벌써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세상을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고 평안 가운데서 담대하게 승리하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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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5 Jul 2018 05:35:00 +0900
(브라질 사회 읽기:한인의 미래)암거래 시장과 제조업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3 정기중.jpg
정기중 선교사(한국외대 국제지역학 박사수료)
 
브라질, 암거래의 천국?
 지난 4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연이은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 소식이 연일 화제입니다. 브라질 사회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이터 통신의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띕니다. 무슨 이유였는지 확실치 않지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1996년 브라질 위조 여권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남미는 위조 여권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곳이었나 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브라질은 전세계에서 가장 큰 암거래(Muamba)시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500년 동안 유럽의 열강들의 지속적인 지배와 아프리카 노예 거래로 검은 시장이 형성되어 왔고 지리적으로는 남미의 아홉 개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국가의 통제와 규제가 미치지 않는 곳이 많습니다. 사회문화적으로 혼종성(混種性)의 문화적 인종적 특징은 끊임없는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하며 제도권 밖의 시장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암거래와 제조업
 암거래 시장은 제조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브라질 제조업은 국제적인 전쟁터입니다. 2억 인구의 구매력이 남미시장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고 자체의 기술력과 노동집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앞 다투어 진출하려고 합니다. 이 넓은 시장에 제도와 규제의 허점을 파고 들어 제조업 분야에 불법 거래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저명한 주간지인 VEJA의 6월 마지막 주 기사에 따르면 브라질 암거래 시장은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4대 암거래 품목은 담배, 안경, 옷, 케이블 TV 인데, 특히 담배는 2017년 한 해만 97억 헤알의 불법거래가 포착되었습니다. 이 액수는 약10만개의 집, 2만개의 보건소 혹은 5천 개의 Creche를 설치할 수 있는 비용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불법거래가 대부분 범죄조직과 관련되어 있어서 자금세탁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밀수입과 탈세는 브라질 경제와 사회 발전에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는데, 특히 야기된 세금부담은 결국 민간 영역으로 전해집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암거래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 조세제도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세 물건의 수량 또는 금액이 많아짐에 따라 세율이 낮아지는 현행 역진세(Taxação regressiva)가 구매력이 낮은 소비자들을 힘들게 하고 있기 때문에 형평성을 고려한 누진세(Taxação progressiva)를 확대하여 제조업 기반구축과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변해야 산다!
 브라질에서 제조업은 필연적으로 암거래 시장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이고 규모가 작은 사업체 일수록 피해가 더 심합니다. 따라서 의류제품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에게는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첫 번째, 브라질의 시장의 변화와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배워야 합니다. 알아야 합니다. 더 이상 주먹구구식으로 가게와 사업체를 운영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기업환경, 조세제도, 상거래 문화가 복잡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산과 능력을 점검하는 것 만으로도 시행착오를 줄 일 수 있습니다. 가까운 SENAC, SENAI 대학에서 제공되는 프로그램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두 번째, 제조업의 한계를 인식해야 합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인들의 경제기반을 지탱해 온 의류제품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과거 호황시절 제품업은 속도와 정보 싸움이었지요. 손기술이 좋고 눈치가 빠르며 근면 성실한 한인들은 더 빨리 신제품을 만들어서 대량으로 팔면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운송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지난 주에 런던 거리에서 불티나게 팔린 디자인을 이번 주에 볼리비아 중국사람들의 새벽시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값싼 인건비, 덤핑공세 그리고 암거래 시장을 당해낼 재간이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할 수 만 있다면 시장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하나의 물건이라도 지식이 기반 된 부가가치가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변해야 합니다. 변해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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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5 Jul 2018 05:34:00 +0900
(KWMA2018년 세계선교대회)중남미선교 정보 및 미래선교전략적 방향-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2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선교사(중남미선교전략연구소장)
 
3) 중남미에 사는 인종
 선교적 관점에서의 중남미 지역이라 함은 중미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24개국과 카리비안 해안국가 22개국을 합한 46개국을 말한다. Operation World의 2005년 통계에 의하면 중남미 전역의 인구는 519,131,119명으로 나타나 있다.
 인종은 크게 다섯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 Euro-American(이민온 유럽인)은 가장 많은 45.5%를 차지하고 있다. * Mixed race는 39.1%를 차지하는데 중남미 전역의 9개 나라의 경우가 해당된다. * Mestizo는 남미지역과 Lanino중미지역에 해당되는데 유럽(European)인과 Amerlndian과의 혼혈에 해당된다. 또한 Mulatto는 유럽인(European)과 African원주민과의 혼혈에 해당된다. * Amerindian은 10.2%로서 중남미 전역에 사는 원주민 인디언을 말한다. 이들은 정복자들의 침략으로 영토를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되며 면역력이 약해 그들로 인하여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 Afro American은 9.1%가 된다. 아프리카에서 중남미 전역으로 노예로 팔려 온 아프리카 후손들이다. 카리브 해안 국가의 대부분의 인종이 이에 해당되며 브라질에 다수가 포함된다. * Asian은 1.1%로서 동남 아시아인들과 인도네시아인들은 19세기 그들의 영주국인 영국과 네델란드 속국인 중남미지역에 주로 정착했으며 20세기에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들은 주로 자발적인 이민자들로 중남미 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들 아시안이 다수를 이룬곳이 Surinam. Trinidad 등을 들 수 있다.
 4) 종족과 언어
 종족과 언어의 분포를 보면 중남미 46개국 전 지역에 1509개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약 5억 2천만명이 살고 있으며 사용하는 언어가 1183개이고 이들 중에서 신.구약 성경 전체가 번역이 된 언어는 25개 언어이며 신약만 번역이 된 언어는 254개 언어가 되며 성경 단권(일부분)이 번역된 언어는 200개 언어가 되며 번역중에 있는 언어는 249개에 이르고 있다.
 5) 종교 분포
 중남미 지역의 종교 분포를 보면 기독교(Christianity)의 인구는 91.7%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 개신교(Protestant 혹은 Evangelical)는 10.6%를 차지한다. 전체 카톨릭 신자는 전체인구 중의 약 80-85%를 차지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 nominal 카톨릭 신자가 50-60%이상을 차지한다. 이 부분은 중남미 선교의 중요성을 논함에 좋은 근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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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5 Jul 2018 05:32: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1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99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삼위일체적 창조 사역
 기독교의 신앙에서 창조는 하나님이 홀로 계시고자 하지 않고, 자기와 차원이 다른 낯선 이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나아가서는 그들과 인격적 사귐과 교제 가운데 사랑을 나누고자 하신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식이 아니시다.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하나님과 자연사이에 계신 관계의 하나님이시다. 성서 전체는 하나님과 피조물, 특히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의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사역 속에서 극적으로 일어난 증언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와 인간은 그 구원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했는가를 증언하는 것이 성서이다하나님이 자기와 다른 피조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자기를 스스로 제한하거나 포기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역을 제한하심으로써 피조물의 자유로운 영역 즉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 자주적인 행동을 허락하신다. 인간의 침범할 수 없는 자유로운 결단으로 인한 죄를 지을 것을 아시면서도 하나님 스스로 자기 제한과 자기 포기, 자기 수난의 길을 통해서 인간을 사랑하심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창조의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기 제한과 수난이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나타난 자기의 비움과 겸비와 같이 창조 때에도 자기를 제한하시며 비우신다. 그것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창조에 대한 감격과 찬양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삼위일체적 역사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1) 창조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 :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창조의 행위를 시작하신 분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서 창조자이시다. 사도신경의 첫 고백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세계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닌 또는 이미 있는 다른 어떤 것에서부터도 아닌 창조이다. 창조 이전에 무엇이든지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11:3) 한 대목은 역시 무로부터 창조를 지시한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 창조의 근원이시며, 시작이심을 증언한다.
 2) 창조의 지혜이신 아들 하나님 : 아버지 하나님이 창조의 근원이시며 시작이라면, 아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의 지혜이시다. 구약의 지혜서에서, 특히 잠언에서 8장 22-31절, 특히 30절에서 인격화된 지혜의 찬양에서 “그의 곁에서 장인이 되어”(the craftsman at his side )로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에 지혜로운 장인으로서 즐거움과 기쁨으로 참여함을 암시한다. 초대교회는 이를 그리스도의 지혜로 받아들인다. 요한복음 1장 1-3절, 10절에서도 말씀(로고스)이 지혜, 이성을 말한다. 특히 골로새서 1장 16, 17절에서도 아들로서 창조 사역에 함께함을 증언한다. 지혜와 장인으로서 창조에 함께하신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과 희생으로서 응답하시며 영광을 그에게만 돌린다.
 3) 창조의 능력이신 성령 하나님 : 아버지 하나님이 창조의 근원이시며, 아들 하나님이 창조의 지혜와 원리시라면, 성령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이시며 새롭게 창조하시는 생명의 능력이시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성령께서 새가 알을 품듯이 품으므로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 사람을 지으실 때에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 함은 생기인 “루아흐”(ru’ach)는 창조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성령을 말한다. 창조에서 성령의 사역은 다시 살리는 생명의 능력으로 창조를 단장하시며, 질서 있게 하신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성부와 성자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일선에 나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에 대해 말하시기를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이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4). 성령은 창조에 질서를 부여하시며, 생명의 수여자시며,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을 하신다.
 창조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 중 어느 한 위격의 사역으로 고정시켜 다른 위격의 사역을 축소화해서는 안 된다. 물론 창조에서 성부 아버지 하나님의 사역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시지만, 성부 하나님을 창조자로, 아들과 성령을 단순한 행위 대리자로 보는 것은 창조 사역의 조화성 다양성을 무시하게 된다. 창조의 사역이 하나님의 세 위격에 관계된 사역임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들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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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8 Jun 2018 05:54:00 +0900
(사도행전 10분 묵상)27. 성령을 받으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97 김성현목사.jpg
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8:14-25]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지도록 하십니다(행 8:14). 복음은 예루살렘에 제한되지 않고 교회나 교단, 한 민족에게 제한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놀랍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자 이런 감정들과 모든 경계들이 일시에 다 무너집니다. 성령이 임하면 환경이 변하는 것보다 먼저 마음이 변합니다. 밉던 사람이 불쌍해지고,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생각과 한 영혼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자 초대 교회는 즉각적으로 움직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냅니다. 자기들의 형편과 안위를 생각지 않고 복음에 반응하는 예루살렘교회와 사도들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전통적인 교회는 무엇 하나 결정하는데 절차가 많고 과정이 복잡하지만 살아있는 교회는 절차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순종하지 못할 형편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5절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즉시 순종해 사마리아로 떠났는데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도록 기도합니다. 왜 이 기도를 했을까요? 16절을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 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본문은 “구원 얻은 것과 성령을 받는 것”에 차이가 있음을 말합니다. ‘구원’은 나를 위해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은 나를 위해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받는 ‘사역적인 것’입니다. 구원은 ‘소속의 변화’입니다. 마귀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은 구원 받은 자가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 주신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는 성령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동행했고 십자가가 있는 곳까지 따라갔지만 예수님을 부인하는 겁쟁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성령 받고 난 후 복음의 증인이 되어 초대 교회 지도자가 될 뿐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었고, 순교의 자리까지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성도는 먼저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아야 하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던 대표적인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바로 시몬입니다. 마술사 시몬은 세례를 받은 후에 빌립 집사를 따라 다니며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습니다.(13절) 하지만 그는 사마리아 성도에게 성령이 부어지자 탐심을 드러냅니다. 그는 그 성령의 권능을 돈으로 사려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시몬을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라고 질책합니다. 요즘 교회들을 보면 시몬 같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축복과 은혜를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직분과 영향력을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섬김과 헌신을 돈으로 대신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세상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함은 세상의 힘이나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8을 보시면 성령의 능력이 나옵니다. 그 능력은 바로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인간의 한계와 경계를 넘는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초대 교회에 성령이 임하자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해집니다(행 1-7장). 그리고 유대와 사마리아로 복음이 퍼져나갑니다(행 8-12장).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이 선포되어집니다(행 13-28장).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들이 <사도행전 29장>을 써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더욱 성령을 구하심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 땅 끝인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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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8 Jun 2018 05:52:00 +0900
(KWMA2018년 세계선교대회)중남미선교 정보 및 미래선교전략적 방향-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96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선교사(중남미선교전략연구소장)
 
신자유주의의 제도화에 성공했던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도 남미 민주화의 도미노 현상으로 1990년 남미에서 가장 늦게 민선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2) 중남미의 나라의 모든 지역은 선교영역
 중남미 전체지역은 세 지역으로 구분한다. 라틴 아메리카 구역국가, 중미국가, 서인도 제도국가로 나눈다.
 * 라틴 아메리카(Latin America)는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19개 나라로 구성됨을 원칙으로 한다. 오늘날에는 Belize(스페인어, 영어사용), Surinam(네델란드어 사용), Guyana(영어사용), French Guiana(불어사용), Falkland Islands(영어사용)를 포함하여 24개 국으로 구성된다.
 * 중미(Central America) 국가는 전통적으로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구아,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5개국을 말하였으나 오늘날은 파나마와 벨리체를 포함하여 7개국을 의미한다.
 * 서인도 제도(Caribben해 국가) 서인도 지역은 중미지역과 남미지역에서 제외되어서 카리브해 국가 군으로 일반적으로 분류되어서12개의 독립국과 10개의 도시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세 지역 국가들이 선교 전략적인 관점에서 “중남미 지역”으로 호칭이 됨은 복음전파가 누락되지 않게 함과 그들 나라에 살고 있는 전 세계에서 이민을 온 이민자들(DIASPORA)과 그들의 자녀들, 유학생들, 상사 및 외교관 직원들 기타 방문객들을 통한 세계선교를 전략적으로 하기 위함이다. 특별히 중남미 전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이민자 후손들과 노예로 실려온 후손들 모두가 깊은 상처와 함께 자신의 언어와 문화와 종교를 간직해 오고 있기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선교사역을 할 선교영역임을 알아야 한다.
 Johston Mandryk의 공저인 Operaltion World(2005년 6판)에는 Latin America와 서인도제도(Caribbean해안) 국가를 합하여 46개국(25개 섬나라 포함)으로 표기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20,537,000sq Km(남한의 207배)으로서 이는 전 세계육지 면적의 15.1%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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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8 Jun 2018 05:50: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81 1Q5K0937 nm.jpg
 
얼마나 큰 지 수평선만 보이는
톤레삽호수에 사는 사람들은
잠 자는 곳이나 일하는 곳이나
물에서 떨어져 살 수가 없어서
조그만 배로 일터를 다닙니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갈 때
심한 바람에 큰 물결이 일거나
칠흑같은 한 밤 어둠 속에서도
어디가 어딘지 눈에 안 보여도
쉴 보금자리를 잘 찾아갑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

- 톤레삽호수, 캄보디아 -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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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1 Jun 2018 02:28: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9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79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선한 창조자이신 창조주 하나님
 성서의 최초의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한다. 성서는 창조를 통해 좋은 소식을 선포하신다. 세계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장엄하고 은혜로운 행위들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세계를 기쁨으로 지으신다. 이러한 선언에 비추어 볼 때,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리는 것을 위임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창조에 대하여 존중과 사랑과 돌봄을 펼치라는 요구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땅에 대한 현명한 청지기의 사명을 다하는 부름이며, 피조물 전체 조화와 생명을 위하여 지도력을 행사하라는 부름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어떠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자연을 돌보고 보호하도록 위임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세계의 창조, 예수 그리스도 안에 화해 사역, 성령의 생명의 능력으로 새롭게 됨과 완성의 역사는 모두 하나이신 하나님의 행위이다. 현재의 삶의 조건에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소외시키며 괴롭히는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연환경을 무참하고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동시에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인간은 암, 지진, 태풍, 기근, 이상기후 등으로 비극적인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인간들이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종말론적으로 자유케 될 날을 기다리며 신음하듯이, 자연 세계도 역시 아이를 해산할 여인과 같이 신음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모든 피조물들은 죄와 구속의 전 과정에 신비하게 함께 얽혀 있으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 가운데 함께 포함되어 있다. 성서에는 미래 구속에 대한 여러 비전들이 있는데 그 비전들은 새 하늘과 새 땅, 사자와 어린 양이 평화롭게 지내며, 어린이가 독사와 함께 노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자연에 대한 정복의 명령을 빙자하여 우리 마음에 원하는 대로 자연을 착취하는 일을 이제는 금해야 한다. 조지 헨드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몇 가지 유비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는 출산의 유비라는 것이다. 성서에는 이러한 유비에 대한 암시가 많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로 기술된다. 고대 근동의 종교에서 말하는 성적인 출산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랑과 부모의 돌봄을 지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는 건축 또는 조성의 유비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건축자로 묘사한다. 또는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묘사하거나 사람을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할 때 조성자로 묘사한다. 건축과 조성자의 유비들은 하나님의 의도성과 목적성을 잘 표현하나, 하나님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한 것의 독특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만들어진 것에 대한 비인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셋째는 하나님의 창조는 유출의 유비이다. 이것은 샘물에서 물이 나오거나 태양에서 빛이 나온다는 의미에서 온 것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충만함의 유출이며, 풍성함과 풍요함에 있다.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해 신학자들에게 적극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
 넷째는 하나님의 창조는 정신과 몸의 관계의 유비이다. 신학자들 가운데 세계를 하나님의 몸으로 기술한다. 그들은 세상의 창조가 하나님과 세계와 정신과 몸 사이의 관계로 보며,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친밀성과 상호성을 표현한다. 이 유비의 문제는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은혜롭고 자유하며 동등하지 않는 관계를 말하지 못한다.
 다섯째는 하나님의 창조는 예술적 활동의 유비이다. 우리는 창조를 하나님의 예술적 작품이라고 자연을 보면서 말한다. 세계의 창조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있는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이라고 본다. 하나님 창조에 대한 예술적 표현의 모델은 예술가와 예술적 작품 사이의 창의적 자유와 친밀성의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2) 성서적인 창조의 증언은 만물의 시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중간과 종말에도 관계된 것이다. 천지창조는 만물의 시초에 서 있으나 신천신지는 마지막에 있는 것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시초와 종말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닌 계약의 하나님이다. 창조와 계약의 역사는 불가분리적이다. 신약에는 창조와 화해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창조는 은혜의 계약이라는 하나님의 전체의 대사역에 속하여 있다.
 3) 창조 신앙과 그리스도의 신앙은 불가분리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창조주에 대한 신앙고백은 동일한 고백이기도 하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제 1조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하시고, 그 분은 성자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아버지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 창조론은 세계를 메시야 예수의 빛 아래 그리고 그를 통하여 시작되고 규정된 메시야적 시대의 관점에 따라 파악한다. 메시야적 창조론은 창조의 미래에 비추어 관찰한다. 창조의 미래는 영광의 나라로 본다.
 4) 창조는 안식일에 완성된다. 안식일의 창조론은 오직 안식일에만 지각되는 창조의 모습이다. 창조는 엿새 동안의 사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쉬고 축제를 벌이고 창조를 하시는 것이 안식일의 창조 완성이다.
 5) 전통적 신학이 말씀을 통한 창조를 강조하였으나, 성령 안에서의 창조도 연구되어야 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창조의 활동을 완성한다. 창조 안에 있는 신적인 영의 임재는 성령의 우주적인 거하심 나아가야 한다.
 6) 창조는 우주적 차원과 함께 인간학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루터의 소교리문답의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함께 나를 창조하시고, 나에게 몸과 영혼과 눈과 귀와 모든 지체와 이성과 모든 감관을 주시고 또한 보존하시며 게다가 옷과 신발과 음식과 집과 마당과 아내와 자식과 농토와 가축과 모든 재화를 주셨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앙화를 막아주시고 보호해주심을 내가 믿습니다” 여기서 창조 신앙을 인격화하고 현재화하였고, 현재와 실존에 관련된 고백을 하도록 만들었다. 즉 창조 신앙은 일상생활의 모든 차원과 특징에 관련되어 있다.
 7) 하나님을 창조자로 부르고 세계의 모든 것을 ‘피조물’로 부르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철저한 타자성, 초월성, 주권을 뜻한다. 기독교 창조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신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됨을 뜻한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서 비롯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신비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
8) 하나님의 자기 비움이라는 은유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비우고’ 겸손하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주로 사용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의 행위도 이미 하나님의 자기 비움, 자기 겸손, 자기 제한이다. 에밀 브룬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다다르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은 세계의 창조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영원 가운데 창조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존재에게 생명을 주며 타자와 삶을 나누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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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1 Jun 2018 02:25:00 +0900
(성경강해-요한복음해설)41. 잘못된 열심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76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본문 : 요한복음 16:1~16]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한 증거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주님의 승천 이후에 곧바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그 일들은 ‘출교’와 ‘죽이고 핍박하는 일’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인해서 이단으로 치부되어 회당으로부터 출교를 당하고, 유대 공동체로부터 쫓김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악한 일을 행하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들이 하는 이유를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알지 못함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나를 알지 못하였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지식적으로 앎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경험해보고서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앎이라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관심과 열심은 있었지만, 결코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도 없었고, 믿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주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면서 거짓과 악한 일을 행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과 율법을 따르는 행동이라고 자신들을 정당화했지만, 그들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거짓에 속아서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핍박의 시간이 되면 성령님의 역할이 나타납니다. 그 역할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도 핍박과 조롱 가운데 있다면,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잘 견디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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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1 Jun 2018 02:22:00 +0900
(브라질 사회 읽기:한인의 미래)축구와 브라질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75 정기중.jpg
정기중 선교사(한국외대 국제지역학 박사수료)
 
식은 월드컵 열기, 정말?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한국의 16강도 브라질의 우승도 기대 해 봅니다. 하지만 거리를 나가봐도, 식당에서도, TV 를 켜도 분위기가 영 아닙니다. 천지가 요동칠 만큼 시끄러워야 할 기간인데요. 경제 불황과 먹고 사는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지요.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듯 이번 월드컵에 대한 브라질인의 무관심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난 토요일 6월 16일 호나우두의 헤트트릭이 헤드라인을 장식한 Folha de São Paulo에 흥미로운 논쟁기사 제목입니다. “O desinteresse recorde do brasileiro pela Copa do Mundo pode ser um sinal positive?” “월드컵에 대한 브라질인들의 이례적인 무관심은 긍정적인 신호인가? USP 인류학 박사 Ronald Trindade는 이 현상은 더 이상 축구에 현실 정치와 민생의 중요성을 축구에 빠져 간과 할 수 없다는 인식의 개선을 도와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반대편 주장도 있습니다. São Carlos 연방대학 Luiz Henrique de Toledo 교수는 지금 축구팬들의 침묵에는 스포츠를 윤리적, 미학적 그리고 사회철학적으로 바라보는 스포츠 실용주의(Pragmatismo Esportivo)가 드러나 있다고 지적합니다. 총체적 나라 위기 속에 개개인과 사회의 비전이 대표팀에 반영되어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축구에 울고 웃고 목숨까지 거는 브라질의 축구 애증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자부심과 정체성
 브라질에서 축구는 명과 암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대물림되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 범죄 위협의 환경에서 축구는 일상의 탈출구이자 과거의 잘 살았던 영광의 시절을 회상하는 통로입니다. 브라질 축구 잘하지요. 월드컵 역사상 본선에 모두 진출한 국가이고, 우승도 다섯 번이나 했습니다 삼바축구라는 명성답게 개개인의 역량에 따른 세밀한 패스워크와 결정력뿐 아니라 선이 굵은 축구와 전술도 전세계 최고수준입니다. 브라질 사람들은 이런 축구 대표팀(Seleção Brasileira)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Rio Grande do Sul 에서 만난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초대 받아서 갔더니 그날 설교가 이 지역의 대표 라이벌인 Internacional와 Grêmio 경기 이야기더랍니다. 전반전  부터 후반전까지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회개, 그리고 구원까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연결시켜 설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더 놀란 것은 거기 앉아있는 성도들이 대부분 공감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축구에 투영하고 환상과 우월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브라질 사람들에게 축구는 자부심이자 정체성입니다.
 시민의식 성장의 저해
 하지만 축구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축구경기 있는 날, 특히 국가대표 경기 때는 모든 일과가 중단되는 것이 비일비재입니다. 오후에 경기가 있으면 아침부터는 쉬는 분위기입니다. 학교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가게와 공장도 문을 닫습니다.  경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일에 대한 집중력, 연속성, 그리고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이기면 좋아서 하루를 맘껏 즐기고, 지면 안타까운 마음에 술 마시며 하루를 낭비합니다. 또 광적인 축구팬들의 난동과 위법행위는 매일 미디어의 범죄 지면에 등장합니다. 축구 경기 전, 경기 후 필요 없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축구는 아이들과 미래세대에게 성숙한 시민의식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미디어가 조장하는 축구 선수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우상화, 그리고 비행이나 범죄, 축구만 잘하면 된다는 잘못된 인식과 여론의 호도는 비판적으로 사회 문제를 바라보고 윤리와 시민의식을 배양해야 할 젊은 세대의 눈과 귀를 막고 있습니다. 축구가 참 좋기도 하지만 문제입니다. 지금 브라질 친구들에게 말해줍시다. 무엇이 중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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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1 Jun 2018 02:20:00 +0900
(KWMA2018년 세계선교대회)중남미선교 정보 및 미래선교전략적 방향-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74 강성철 - 복사본.jpg
강성철 선교사(중남미선교전략연구소장)
 
한편으로는 고대 문명인 원주민 문화를 파괴 하였고 원주민의 착취와 함께 피를 섞어 혼혈족이 되게 했고 유럽의 질병을 전염시켜 면역력이 약한 수백만 명의 원주민들이 죽었다.
 후 식민지시대의 Caudillo 시기(1824-1930년)
 후 식민지(post-Colonial)시대라 명하는 이 시기는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Criollo들이 (백인이지만 스페인이나 유럽이 아닌 신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 후예들 즉 신대륙에서 태어난 유럽2세및3세) 섭정 또는 독재하면서 다스렸던 시기 Criollo들 까우디요(Caudillo,영어로는 Strong men)들의 독재로 다스리는 시기이다. 멕시코의 San Ana 알젠틴의 Juam Manuel de Rosa 파라과이 Francia Carlos Antonio Lopez 베네주엘라 Jose Antonio Paez 등 스페인어권 라틴아메리카 모든 나라가 20세기 중반까지 독재자들의 통치를 받는 시기이다.
 군부 통치시대(1930년이후 1980년대까지)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군사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 시기를 군부 통치시대라 명하는데 1950년대 냉전시대 쿠바공산혁명(1950년)로 무장한 군부가 군사정권을 수립하고 권위주의 채제를 갖추어 안보와 경제성장 구조개혁을 하므로 중남미 전 지역이 개발되고 풍요속에 평화와 안정을 목표로 중앙집권적인 군부통치시대를 말한다.
 민선을 통한 현대시대(1980-현재)
 중남미의 군사정부는 대체로 억압적, 배제적 구조 때문에 정당화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브라질의 기적”이 끝나면서 연이은 오일쇼크와 세계경제의 침체, 외채위기는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민주화 군인들이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소위 National Security Theory로 무장된 군인들이 병영으로 돌아가는 민선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때 가이젤(E.Geisel)과 피게레이두(J. Figueiredo)는 감압정책(decompressao)과 개방화(abertura)를 추진하였고 이로써 완만하지만 민주화로 이행하게 되어 브라질은 1985년 야당 후보 땅끄레도 네비스(T.Neves)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군부는 경제 위기로 증폭되는 민주화 요구를 말비나스 전쟁으로 완화시키려 했으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군부의 위신이 실추되었고 1983년 알폰신의 승리로 민주화가 이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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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1 Jun 2018 02:19: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64 1Q5K0979 nm.jpg
 
세계의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본다는 설레임에다
창 밖의 천둥 번개가 뜬 눈으로 밤을 새게 해서
새벽 미명에 떠나는 일정을 걱정하게 만들었는데
아직도 캄캄한 길에 비는 멈추고 구름조각만 희미하고
간 밤에 패인 황토길 웅덩이 물이 신발을 적셨습니다

설레이던 세계 불가사의 건축물이 저 멀리 보이는데
동 트는 하늘에 구름조각은 햇살에 불꽃처럼 반짝이고
그 장엄한 광경에 눈길을 빼앗겨 셔터를 누르다보니
사진으로만 보던 그대로 불가사의한 건물은 거기 있었지만
하늘휘장 아래 그 사원이 얼마나 작고 초라하게 보였는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시편 19:1-4)

- 앙코르 왓 사원, 캄보디아 -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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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4 Jun 2018 03:43: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8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61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현대적 무신론과 기독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그는 왜 침묵하는가? 그는 불의와 사악함, 폭력과 전쟁의 세상에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고만 있는가? 그는 어디로 숨으셨는가? 이러한 질문은 전형적인 무신론자들의 질문들이다.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의 회의와 도전에 객관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뿐 아니라, 그들의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신관이 의문시되는 곳은 근세 이후 세속화의 결과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신앙적 대응이 있어야 한다.
 1) 저항적 무신론-포이에르 바하는 하나님을 인간의 투사로 보았다. 종교의 시작과 중심 그리고 마지막은 결국 인간 자신이란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자기 숭배라는 것이다. 종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본질에 대한 형태이다.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 인간적 자기 보존욕, 인간적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하나님 관념은 인간적 상상에 불과하다. 즉 신들은 인간이 소원하는 바를 투사한 것이어서 그것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칼 막스는 기독교 종교는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을 위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 세계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도피한다. 그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하소연하여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닌 환상적인 위로만을 준다. 공산주의가 완성되면 기독교는 자연히 없어지리라 생각했다. 니체는 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한 그 자리에 다시 인간을 등장시켰다. 결국은 그는 ‘이 교회들이 하나님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말했다. 니체의 허무주의적 무신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무신론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 중심의 욕구와 능력 그리고 행복을 항상 주장한다. 신은 인간의 행복을 위하여, 인간의 능력을 위하여,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신에 대한 신앙을 없애버리거나 죽여 버려야 하는 것이다. 철저히 인간중심의 무신론이다. 물론 기독교도 인간의 고귀성, 신의 형상성, 능력과 창의성을 인정함을 물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출발점은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성서는 선언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마침표이시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시작과 중심이시며 마지막이시다. 현실 세계는 악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로 고난을 당하셨고, 부활하셨다. 기독교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방관자나 방조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역사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새로운 주님의 세계를 희망하며 산다. 하나님 중심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자 역사에 참여자로서,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예수를 따라가고자 한다.
 2) 기독교의 종교비판과 무신론-기독교는 모든 종교의 종말을 선언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종교는 하나님께 대한 반란과 불순종으로 이해했다. “종교의 종언으로서 기독교의 계시”에서 불신앙으로서의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임받은 교회를 참종교로 이해했다. 에밀 브루너는 “종교는 인간이 시도하고 인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자의 심판 아래 있고 유한성의 한계 안에 있다. 종교는 경험적 현상으로서 이념과 현실 사이의 모순에 있어서 병들어 있다. 종교는 진리에 대한 가장 높고 가장 섬세하고 가장 위험스러운 배반이다”라고 했다. 고가르텐은 “종교는 모든 문화의 실체가 아니라 모든 문화의 위기”라고 했다. 그는 “바울 사도가 율법의 행위라고 부른 것을 도덕적으로 볼 것이 아닌 종교적인 태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 과학적 무신론-일부 과학자들은 과학의 객관성을 위해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한다. 이를 과학적 무신론이라 한다. 과학 연구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가 개입되지 말아야 하며 이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과학적 연구가 이 세계에는 물리적 법칙이나 질서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한다. 과학적 연구에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배제되어야 하며 세계는 그 자체로서 설명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은 성서는 과학적 지식의 교과서가 아니다. 성서의 옛 증언들은 자연 과학적 지식을 우리에게 전하려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하나님과 역사에서 일어난 구원의 역사를 증언하려고 전하는 데 있다. 기독교는 자연과학의 연구방법에 있어서 그 객관성, 독자성을 인정한다. 그 자신의 법칙과 규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하며, 여기에 신앙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몇 가지를 질문해야 한다. 자연과학 자체가 인간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드는가? 문명 이기가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으며 인간의 세계를 구출할 수 있는가? 과학적 결과물이 인간에게 참된 의미와 목적을 줄 수 있는가? 참으로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살며,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있는가? 과학적 발달로 오는 많은 재해와 사고, 참사 등으로 인간은 오히려 고통당하지 않는가? 핵문제, 원자로 문제, 생화학문제 등은 인간을 위기 속에 살게 하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한 책임을 과학자들은 답변해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는 결국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연관된 문제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하시려고,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참된 인간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다리는 세계는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다. 다시는 전쟁이 없고, 고통이 없고, 이별이 없고, 죽음이 없고, 질병이 없는 세계, 즉 하나님이 다스리며 통치하시는  영원한 세계를 희망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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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4 Jun 2018 03:39:00 +0900
(사도행전 10분 묵상)26. 사단의 미혹과 성령의 역사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58 김성현목사.jpg
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8:9-13]  
 예루살렘 교회에 미친 박해와 핍박은 일시적으로 교회에 고난을 가져다주었으나 궁극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큰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첫째 복음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해로 흩어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제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열방을 향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박해는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구별되는 계기가 됩니다. 유대교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핍박함으로 교회는 유대교와 선을 긋고, 율법을 넘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됩니다. 셋째 성도들은 박해를 통해 고난과 죽음을 직접 경험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성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면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9절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빌립 집사가 복음을 전하기 전 사마리아는 시몬이라는 마술사의 손아래서 현혹당하고 있었습니다. 시몬에 대해 초대 교회가 이처럼 자세히 알고 있었던 까닭은 그가 거짓으로 회심한 후(13절) 동양의 종교 사상과 서양의 철학을 교묘하게 합친 ‘영지주의’ 라는 이단 사상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은 죄가 없고 순결하나 육신은 근본적으로 악하다. 육신은 먹고 마시고 방탕하고 음란하여 마음껏 쾌락을 추구해도 영혼에는 아무 상관없다”라고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을 주장합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죄에 빠져 방탕하여 타락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지주의 사상으로부터 기독교의 복음과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쓴 성경이 바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서들이며, 요한계시록을 보면 ‘영지주의자’들을 ‘니골라당’(계 2:6)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 니골라가 초대교회 7집사 중의 한 명인 것을 볼 때 영지주의가 당시교회에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직분자라할지라도 복음을 버리고, 신앙과 생활이 분리 되어 타락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게 되고, 사단의 영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10절을 보면 시몬에게 현혹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타납니다. 본문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시몬을 따랐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사단의 시험과 미혹에 빠지게 됩니다. 성도라고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으로 무장함으로 성령 충만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 성령의 역사인지, 사단의 역사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고, 성도들이 주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역사는 욕망에 이끌리게 하고 사람을 추종하게 합니다. 둘째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사단의 역사는 거짓 속임수와 인간의 능력만을 나타냅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는 교회를 하나 되게 합니다. 하지만 사단의 역사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합니다.
넷째 성령은 생명의 열매를 맺고, 사단의 영은 죽음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태복음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2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그 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단의 영의 붙잡혀 죄 가운데 살았습니다. 하지만 빌립 집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죄를 회개하고 세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사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13절을 보면 마술사 시몬도 복음의 능력에 놀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모든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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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4 Jun 2018 03:36:00 +0900
(KWMA2018년 세계선교대회)중남미선교 정보 및 미래선교전략적 방향-1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57 강성철 - 복사본.jpg
강성철 선교사(중남미선교전략연구소장))
 
들어가는 말
 KWMA 2018년 세계선교대회및 제7차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II) “함께, 그날끼지!”란 구호를 걸고 큰 마당을 마련하였다. 중남미지역 선교전략연구소 책임자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이번 대회를 참석한다. 중남미는 더 이상 선교지가 아니라는 일부 선교학자들의 말과 함께 한국교회 선교열정이 식어가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겹치니, 지역적으로 멀고 경비가 많이 드는 중남미 지역은 선교지원 교회도 줄고 선교사 지원자도 없어 아직까지 접촉하지 못한 미전도 족속은 엄두도 못 내고, 현재 사역을 하고 있는 시니어 선교사들의 사역을 이어갈 선교사가 없어 난감한 상태에 처해 있다. 이번 KWMA세계선교대회가 중남미 선교지와 한국교회 및 미국교회를 잇는 진정한 기회가 되길 바란다. KWMA가 중남미 선교지와 한국교회의 다리 역할을 하려면 중남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할 뿐 아니라 한인 선교사의 역할에 대한 전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 중남미 선교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중남미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 언어적 및 문화와 종교적인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본다. 필자는 중남미 선교의 과거와 현재를 간략이 알아보며 중남미선교 미래의 전략적인 선교의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함께, 그날까지”가려면 중남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필요
 1) 중남미 역사 구분
 중남미 역사는 크게 5기로 나눌 수 있다. 고대문명시대, 식민 시대, 후 식민지 시대, 군부통치시대, 민선으로 바뀐 현대시대로 나눌 수 있다.
 * 고대문명 시대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전에 중남미에는 고대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크게 나누면 아즈텍(THE AZTECS)제국:14세기 중앙 멕시코 고원지대에 세워짐. 마야(THE MAYA)제국:4-8세기 유타칸 반도(남부 멕시코와 과테말라). 잉카(THE INCA)제국:15세기 안데스 지역에 세워짐.그밖에 아마죤 유역에 인디오 원주민을 비롯한 오육백의 종족과 문화가 형성되어 있다.
 * 식민시대(1492-1821년)
 콜롬부스의 신대륙발견은 스페인, 포르투갈을 비롯한 유럽의 강대국들이 몰려와 신대륙을 침략하여 무력으로 식민화시켜 갔다. 큰 대륙을 점령한 유럽국가들은 서구 유럽의 기술과 문명화를 시키며 교육을 통해 유럽의 언어를 익히게 하면서 복음화 운동을 펼쳐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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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4 Jun 2018 03:34: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빛과 어둠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45 1Q5K6071 nm.jpg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창세기 1:3)

- Mt. Shasta, CA -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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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7 Jun 2018 03:02: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7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41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하나님의 선택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뜻이 있는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은 우선적으로 개인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을 의미한다. 이것은 야웨 하나님과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선민이다. 야웨의 선택은 선포의 중심이다. 신약에도 이스라엘의 선택을 전제하고 있다. 구약의 선택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선민으로서 성민을 말한다. 종국에는 종말론적으로 이스라엘의 말기에 예언자적 선포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만 선택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결국에 남은 자의 사상과 종말론적 메시야 사상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신약에는 선택자가 단순히 피안에 서서 인간에게 권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는 자로 임재한다. 이는 창세 전에 일어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현실이 됐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우리를 만난다. 이러한 인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교회 공동체로 연결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계약맺은 백성으로서 선민이요, 성민인 것 같이, 교회도 택하신 족속이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증언한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면서도, 동시에 죄 가운데 행하는 것은 같으므로, 이 들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셨다. 바울은 구원사적 맥락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서술했다. 바울은 개인을 선택하셨다는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 공동체의 선택을 증언했다. 가롯 유다을 보면 선택받은 제자들 중에 있지마는 주님을 버렸다. 주님이 저버림이 아니요, 유다 자신이 주님을 버림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중 예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중예정론, 곧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관한 교리만큼 오해되고 왜곡되며 논쟁과 불안을 야기시키는 교리도 없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이중예정을 말하기를 “어떤 이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었고, 다른 이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예정되었다”고 고백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예정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폭군이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자유의 적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교리는 좋은 소식이 아닌 절망적인 소식처럼 들린다. 성서에서 선택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이스라엘을 계약의 동반자로 택하셨고, 자유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 및 이방인을 새로운 계약자로 세우셨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선택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선택이라는 성서적 주제는 하나님을 향한 칭송과 영광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맥락에서 선택론은 오직 하나의 중심적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창조(성부), 화해(성자), 구속(성령)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로부터 출발한다. 선택론은 영원 전부터 공동체 안에서(삼위일체의 공동체) 사시는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타자를 그 공동체 안으로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을 말한다.
 1) 선택의 주체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약의 동반자로 택정하시는 하나님의 선택도 자유 가운데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랑과 상응한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타자와 함께 교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삶을 나누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위한 하나님이 되기로 자기를 개방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강렬한 사랑이다. 이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기에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달려있고,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에 대하여 미리 한계를 설정해서는 안 된다.
 3) 선택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고립된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다. 선택은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는 공동체를 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다. 구약에서의 선택의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며, 신약에서는 선택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및 그와 연합된 모든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선택론은 신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과 교회 공동체의 소명론에서 다루어져야 그 의미가 명백해진다.
 4)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함께 간다. 성서는 선택에 대한 은혜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면 그에 따른 책임과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로운 심판자로 드러내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끝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종말에 은혜의 공동체로부터 제외된다면 그것은 창세 전부터 버림받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는 선택된 분인 동시에 버림받은 분이며, 모든 신앙인은 자신의 선택과 버림받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참이라는 것이다. 선택의 신비는 창세 전부터 타자와 함께 하나님의 삶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영화로운 은혜를 찬양하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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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7 Jun 2018 02:56:00 +0900
(브라질 사회 읽기:한인의 미래)트럭 파업 사태와 에너지 공공재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39 정기중.jpg
정기중 선교사(한국외대 국제지역학 박사수료)
 
1. 최근 트럭 파업(Greve dos caminheiros) 사태가 심각합니다. 약 100만대가 운행을 중단했고  고속도로 520곳이 트럭으로 점거됐습니다. 사람이던 물류이던 경제의 동맥이 흐르지 않습니다. 마트에는 물건이 동나고 곳곳에 사재기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학교가 휴교하고, 항공편은 마비가 되고, 앞으로의 물가 상승은 더 걱정입니다. 5월 25일 상파울로와 깜삐나스시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여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하지만 노조와 정치 세력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한국 영사관은 교민들에게 여행 자제, 충분한 자동차 유류와 가정 생필품 확보, 뉴스를 통한 사태의 추이를 잘 살피라고 부탁했습니다.
 2. 트럭 파업 사태의 표면적인 이유는 디젤 가격의 상승 때문입니다. 그 동안 브라질 정부는 에너지기업인 페트로브라스(Petrobras)에게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디젤 가격의 상승을 억제해왔습니다. 하지만 테메르 정부가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페트로브라스에 대한 경영 간섭을 최소화하고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습니다. 더욱이 최근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헤알화 가치 하락, 물가 상승의 여파는 원자재와 생활용품의 장거리 운송을 담당하는 트럭에게 가장 먼저 닥쳤습니다. 파업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정부는 5월 28일에 디젤 가격을 60일 동안 10% 낮추도록 유가보조금을 지급하고 최저 운송요금의 보장도 약속했지만 대부분의 투자자들과 주식시장은 그 이후의 사태를 더 걱정하고 있습니다. 운송업계의 문제는 브라질 경제 전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로 브라질 성장율 0.5%가 후퇴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3. 근본적인 문제는 페트로브라스의 구조 때문입니다. 석유과 가스의 채취 생산, 정제, 운송, 마케팅, 배분, 국제관계, 바이오 연료와 관련된 전세계 58위의 글로벌 기업이며 브라질 에너지 주 공급원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64%, 나머지는 민간이 소유한 구조(Empresa de capital aberto)입니다. 자연스레 ‘시장의 논리’가 개입할 수 밖에 없지요. 브라질 정치경제의 역사와 구조를 보면 자원의 개발과 보존에서 이 ‘시장의 논리’는 소수가 가진 막강한 자본에 휘둘렸고 비효율성과 부정부패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의 앤드류 피쉬맨 교수가 『브라질의 석유산업 (Petroleum in Brazil)』(2010)에서 브라질 석유자원의 개발과 보존이 1)정부 조정능력의 한계 2)지나치게 커다란 목표 3)인프라의 부족 4)기술적 능력의 부족 5)부정부패로 저해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4. 브라질의 모든 문제는 ‘너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입니다. 아무리 자원이 많고 곳간에 식량이 가득해도 창고가 새도록 내버려두고 도둑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요. 앞으로 몇 세대가 쓸 수 있는 석유가 있는 나라에서 최근과 같은 사태를 겪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이 문제의 접근은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자원이 ‘공공재’(公共財, Bem público)인가 아니면 ‘민간재’(民間財, Bem particular)인가의 인식 차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공공재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소비혜택을 누릴 수 있는 비경합성, 비배재성의 재화나 서비스를 말합니다. 민간재는 시장기구를 통해 공급되는, 경합성과 배재성의 특징을 지닙니다. 에너지는 선택의 대상이 아닌 삶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소비자로서 선택의 폭도 좁고 유사한 상품에 의해 가격이 조정되기 힘든 공공재의 성격이 강합니다. 수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보듯 풍부한 에너지자원은 거대자본의 개입과 시장의 논리로 국가의 축복이 되기 보다 재앙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은 역동적인 경제성장과 성숙한 시민 사회 운동의 경험 있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강한 민주적 정부와 규제 구조를 통하여 ‘에너지의 공공성’의 길로 발을 내디뎌야 합니다. 경쟁하지 않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성숙한 인식은 안정적 사회 유지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보장하는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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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7 Jun 2018 02:49:00 +0900
(성경강해-요한복음해설)40.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37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본문 : 요한복음 15:18~27]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신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의 열매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랑과 대조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과 대조되는 것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18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1장에 ‘어둠’과 연결됩니다. 즉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어 참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일차적인 의미는, 주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19절에 우리의 정체성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절).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택함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먼저 미워한 세상은 제자들 또한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에 미움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을 따르고 세상을 사랑하면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처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제자들이 당할 고난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또한 세상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다”(22절)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4절에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주님의 일을 인정하지 않고 반대하는 이들은 ‘아버지와 주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택함을 입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결코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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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7 Jun 2018 02:49:00 +0900
(2018년 GMS세계선교대회)GMS브라질신학교 사역에서 본 변혁과 갱신-10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36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목사(브라질GMS신학교 학장)
 
그러나 참으로 신기한것은 선교사나 목사들이 별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을뿐 아니라 무감각하다. 내 환경과 내 밥통만 건드리지 않으면 별 문제가 안된다는 식이다. 이러한 개인주의 영향으로 오늘의 교회는 끼리끼리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GMS선교부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부에 이러한 현상이 느껴지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자연히 한국교회와 미국의 교포교회를 비롯한 이민교회들에게 선교사는 번거로운 손님이 되어가고 선교운동은 그 열기가 식어지고 있으며 한국교회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한국은 촛불집회의 힘으로 현직대통령이 감옥으로 가고 새 정부가 들어선 가운데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초 긴장상태에 있다. 한국 교회는 고통속에 최선을 다하며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온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가와 어른들의 무능력과 무책임 때문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사회 전반에 나타난 총체적인 어둠의 현상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한국 및 브라질을 비롯한 세계의 대형교회의 종교재벌의 실체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교회를 향한 시선이 차갑기만 하다. 브라질도 마찬가지이다. 브라질도 같은 맥락의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 개신교를 대표하는 대형교회들의 비리와 부정으로 말미암아 교회를 향한 사회의 시각이 따갑기만 하다. 오늘의 교회와 신학교는 이 문제를 안고 고민해야 하겠기에 발제안으로 내 놓았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에 파송받아 사역을 하는 선교사는 지역신학교 및 선교사역의 발전을 위해서는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이다. 천주교 종주국으로 시작된 브라질은 유럽이 그대로 옮겨왔고 그 후 세계 각 나라와 족속들이 들어와 세운 디아스포라 교회이다. 기층문화인 리베리아 반도문화, 아프리카 흑인문화, 이 땅의 원주민인 인디오 문화 위에 이민문화가 덧칠되어 다양한 문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교회가 알아야 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만이 문제의 해답이며 오직 우리의 살 길은 오순절 이후 2천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효과가 있는 회개와 성령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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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7 Jun 2018 02:48: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불기둥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25 03 nm.jpg
 
소금끼 미끈거리는
솔트 레이크 호수
붉은 해가 미끄러져
불기둥을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출애굽기 13:21)

- Salt Lake, Utah -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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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4 May 2018 20:17: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22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가능성
 1) 하나님의 이름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실은 어불성설이다. 칼 바르트는 일찍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제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인간이어서 그 자체상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하고, 바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곤혹이다.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자 했을 때, “너는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신비는 더욱 커진다. 이 신비가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특성이지만, 계시로 우리에게 이름을 알려 주신 하나님의 신비가 가장 큰 신비라 할 수 있다. 자연신이나 일반 종교의 신은 우리 자신의 세계와 경험에서 유비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은  비록 인간들의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인간의 창안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서에 나타난 자기 계시에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하는 유일한 이유이다. 즉 그 이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1) “엘”과 “엘로힘”은 하나님의 강하시고 권능 있는 분으로서 경외와 예배의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엘욘”은 숭고한 자, 곧 존귀와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고성을 지시한다. “아도나이”라고 하는 이름은 보통 주라고 번역한다. 이 명칭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의 소유자이시며, 통치자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 이름이 나중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사용했다.
 (2) 이 거룩한 하나님이, 피조물과 교제를 위해 자신을 낮추시는 다른 명칭들이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샤다이”, “엘 샤다이”라는 이름이다. 기본적으로 이 이름은 그의 백성의 축복과 안위의 근원이 되신다는 이름이다.
 (3)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대한 이름은 역시 “야웨”라는 이름이다. 이 명칭은 가장 신성하고 탁월한 이름으로 출애굽기 3장 13절을 근거로 하여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는 것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계약의 역사 속에서 구원의 행동을 행하실 것을 나타내시는 말씀이다.
 (4) “데오스” 이 명칭은 신약에서 사용한 하나님이란 이름이다.  “데오스”는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너희들의 하나님과 같이 소유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녀들의 하나님이시며 개인의 하나님으로 간주됐다.
 (5) “주” 이 명칭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사용된 이름이다. 그것은 아도나이와 야웨를 대신한 이름이다. 만물 특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소유자요 지배자로서 하나님, 왕의 권세와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에서 이 명칭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6) “아버지”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이다. 주님은 아버지를 “아바”(아빠)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친밀감과 의뢰를 철저하게 표현했다. 구약에서는 이미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때에는 창조주, 창시자로 말해주고 있다. 그 명칭이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부자 관계요, 영적 자녀인 우리 신자들에 대한 생명 관계임을 말하고 있다.
 에밀 브루너는 하나님의 이름이 성서적 증언 전체의 의미를 포함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친히 그분의 알려 주시는 곳에서만 알려지신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에게만 고유한 것이어서 하나님과 다른 것을 구별해 준다. 인간의 어떤 인식 방법으로 추론될 수 없고 오직 말씀으로만 주어질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차적 상대인 절대적인 당신이시다. 당신은 나와 같으면서도 나와는 다른 자아이므로 상대적 신비이시다. 그러나 신적인 당신은 나와 함께 공동 자아일 수 없는 무제약적 당신이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줌으로써 인격적 관계와 사귐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름을 알려주심으로써 계약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자기를 알림으로써 우리를 위한 존재로 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격의 현재 속에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속에 현존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비로소 완전하게 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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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4 May 2018 20:11:00 +0900
(사도행전 10분 묵상)25. 박해가 준 유익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21 김성현목사.jpg
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8:1-8]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말미암아 교회는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첫째 위기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입니다. 둘째 위기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서 성도들이 흩어지는 일입니다. 셋째 위기는 사울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건입니다. 개역개정판에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교회를 잔멸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잔멸의 원어적 의미는 “파괴하다”입니다. 이 말은 멧돼지가 포도원에 들어와 쑥대밭을 만든 것을 의미합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넘깁니다. 그런 위협을 피하여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집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들만이 남아 있습니다. 분명 교회적으로는 큰 위기입니다.
 1절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박해 전에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배 때문에,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먼 곳까지 도망쳐 오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의 가치입니다. 복음의 가치입니다. 1절을 통해 성도들을 흩으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합니다. 핍박을 피하여 도망쳐 나왔는데, 지금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박해가 교회의 지경을 복음의 지경을 넓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박해로 인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그리고 사마리아로 힘 있게 퍼져나갑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박해도 사용하십니다.
 5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5절을 보면 빌립 집사가 어디로 갑니까? 사마리아 성입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혼혈 정책으로 부정한 땅과 부정한 사람들이 되었기에 유대인들이 부정함을 입지 않기 위해 피해가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지금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가로막는 죄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은 지역적, 혈통적, 신앙적, 역사적 편견의 장벽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를 이룹니다. 7절을 보시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모든 묶임과 병에서 놓임을 얻고 치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8절을 보시면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사마리아 성에 큰 기쁨이 충만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핍박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이 더욱 확장되고 이루어져 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고 평양에 신학교가 세워지고, 평양에 수많은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평양에서 목회하시는 것을 꿈으로 여길 정도로 평양은 목회하기가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곳은 아직 복음에 대해서 관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때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신앙의 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복음의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과 사도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면서 위기가 닥치자 성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아픔을 겪지만, 그로 말미암아 복음이 확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때때로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실패를 맛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리기는 고난과 믿음의 시련을 통해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깨달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역하는 복음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4 May 2018 20:10:00 +0900
(2018년 GMS세계선교대회)GMS브라질신학교 사역에서 본 변혁과 갱신-9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20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목사(브라질GMS신학교 학장)
 
대부분의 교회의 관심이 세상속에 있는 잃어버린 영혼이 아니라 부가가치가 큰 물질에 관심이 더해갔다. 성령충만한 가운데 믿는 자의 수가 더해가는데 큰 기쁨이 있던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교인수=많은 헌금”이라는 공식이 적용될뿐 아니라 헌금을 많이 내는 분이 탈세를 했든, 사회악을 조성하는 일 앞에 서있던 상관없기에 고액헌금을 내신분 중심의 교회운영이 자랑스레 전개되고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브라질 교포교회 현실일 뿐 아니라 브라질 현지인교회들 안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이제 우리 교단총회 GMS 선교회는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사역하는 선교지 사역들을 점검하고 바른신학 안에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회복하는 운동을 펼쳐야 할 때라고 본다. 세계 모든 교회와 선교사역지는 부패된 사회와 교회에 소금과 빛으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만들수 있도록 함께 회개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주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더 나아가 세계 사회 구석 구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속화와 쾌락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앞세우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뜨겁지도 차지도 않게 하려는 사탄과 악한 마귀를 향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온 세상에 나아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분부한 모든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야 한다고 본다.
 각 나라와 종족, 다양한 문화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 교단 총회에 소속된 선교사는 나 자신부터 반성하고 올바른 신학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한인 선교사들의 신학은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임을 믿고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인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것이 혁신이라고 생각한다.
 논의: 1. 우리는 지역의 상황과 문화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나?
 2. 지방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는가?
 나가는 말
 오늘날 개신교회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 주께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 이후 물밑의 실체가 드러나 대형교회의 비리와 성굥한 목사들의 오만과 사치와 부패가 들어나므로 교회는 힘을 잃고 사회속에서 일컬키를 “세월호 선장=교회 목사”라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가장 불신하는 메이커로 목사로 지칭되면서 선교사도 도매값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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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24 May 2018 20:08: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대대로 주를 두려워 하리로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03 DSC06490 b.jpg
 
그들이 해가 있을 동안에도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도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시편 72:5)

- 서산목장 석양 -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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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7 May 2018 02:50: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00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가?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의 신앙의 성격과 삶의 태도에 크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구조와 체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개신교의 정통주의는 하나님의 성품을 두 개의 분리된 조합으로 나누어서 다루는 경향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이라 불리는 불변성, 영원성, 무소부재성, 유일성, 전지성, 전능성 등이다. 이것은 인간의 유한한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상대적 속성을 불리는 거룩, 사랑, 자비, 정의, 인내 등이다. 이는 하나님의 탁월성에 비추어서 인간의 뛰어난 속성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추론하는 방법이다. 이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 인간이나 이 세계와 대조됨으로써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성품을 창출하였다. 이같은 속성개념은 타 종교에도 많다. 문제는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 자신의 존재나 행위로부터 설명되지 않고, 단지 피조물과 비교하여 유추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이 가장 이상적이고 고상한 것을 하나님의 성품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경향에 반대하여, 에밀 부르너는 하나님의 성품은 “숨어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거룩함과 “계시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성품의 근본적 특징이라고 진술한다. 반면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유를 하나님의 본질적 특성이라 본다.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만남에서 온전히 알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두 가지의 속성인 인성과 신성의 결합과 같이 하나로 조화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단일성과 편재성, 지속성과 전능, 영원과 영광은 인성적이라면, 은혜와 거룩, 자비와의, 인내와 지혜는 신적이라고 말한다. 전자는 인간과 세계의 한계성에서 도출한 것이라면 후자는 성서에서 이끌어낸 신학적인 성품들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이해하는 것이 추상적이지 않으며 역사적이며 실제적이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죽기까지 낮추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이 나타난다. 주님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발견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다. 성서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분일 뿐 아니라 사랑 자체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인간이 사랑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닌 이유 없는 거저 주시는 은혜요 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아닌 자를 위하여 자기를 낮추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자기를 자기와 다른 자와 동일시키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당하시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기와 원수 된 자를 위하여 자기를 포기하시는 고난의 길을 택하시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
 2) 하나님의 자유와 공의의  성품
 하나님의 절대 자유와 공의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다 사랑하시는 자유와 공의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전제나 조건 없는 사랑으로서 자유함과 공의이시다. 하나님의 자유와 공의는  자기와 다른 자의 구원과 생명을 위하여 자기를 비하시키고 낮추는 자유이며,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는, 철저한 자유와 공의,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3) 하나님의 속성론의 한계와 필요성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 인간의 생각에 미치는 범위를 넘지 못한다.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속성론의 한계가 있다. 그는 우리의 언어와 생각으로서 포착되어지는 분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 밖에 계신 분, 우리의 미래에 계신 분으로 실재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시다. 속성론에 대한 이론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같은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속성론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어떤 분이신가를 세계에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마는 재래종교의 영향으로 신앙이 곡해될 수 있다. 종교 혼합주의적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는 기독교의 참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성품과 구원의 행동을 바르게 증언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은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한 기초가 된다. 그래야 교회가 주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으며 또 닮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유 그리고 그에 속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알아야 한다. 우리 신앙의 최대 과제는 구원받은 자로서 얼마나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가를 늘 물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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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7 May 2018 02:44:00 +0900
(성경강해-요한복음해설)39. 열매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99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본문 : 요한복음 15:1~17]
 예수님은 자신을 참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 자신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께 붙어 있어서 양분을 공급받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제거해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붙어 있어 생명의 공급을 받고 열매를 맺을 때만 구원받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가지를 제거해버리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생활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과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명을 공급받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또한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그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안에 거해서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그 열매를 맺는 사람이 ‘내 제자가 되리라’(7절)에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라는 말은 단순히 12제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 곧 구원받는 사람이라는 말과 동일시됩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열매인데 그 열매를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당신의 계명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 계명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에 말씀합니다. 그리고 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16~17절에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계명 곧 열매는 ‘서로 사랑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함’이 없으면 열매가 없고 주님의 친구가 아니며,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는 사람은 주님이 공급하시는 말씀이 남아 있고, 그 말씀을 따라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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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7 May 2018 02:43:00 +0900
(브라질 사회 읽기:한인의 미래)가우쇼(Ga&uacute;cho)와 남부지역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98 정기중.jpg
  정기중 선교사(한국외대 국제지역학 박사수료)
 
4년 전 이 맘 때 쯤인 것 같습니다. 월드컵 준결승전 브라질X독일. 필자는 아마존 마나우스에서 상파울로 가는 텅 빈 Azul 비행기 안에 있었습니다.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아 경기시간이 되었습니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브라질의 승리를 간절히 바라며 앞에 계신 모니터를 봐주세요” 스무 여명의 승객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 기내에서 생중계로 축구를 보다니요. 같은 시간 남부의 대표도시 포르투 알레그리(Porto Alegre). 평소에 자국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던 브라질 축구 팬들이 집에 있던 독일 국기를 들고 식당, 거리, 광장, 공원으로 모입니다. 남부지역에는 많은 독일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남부는 독일 이외에도 이탈리아, 폴란드, 우크라니아와 같은 유럽인들이 정착한 곳입니다. 브라질에 살지만 유럽의 피가 흐르는 이들에게 누구를 응원해야 하나 참 갈등이었을 겁니다. 빠라나(Paraná), 산따 까타리나(Santa Catarina)와 히오 그란지 두 술(Rio Grande do Sul)의 세 개의 주로 이루어진 남부 (Região Sul do Brasil)는 “브라질의 다른 얼굴”이라 불릴 만 합니다. 수많은 유럽식의 건축물, 음식문화, 말투, 생활방식은 브라질의 다른 지역과 구분됩니다. 남부는 총 면적의 7% 밖에 안되지만 브라질 인구의 26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관광, 경제,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인간개발지수, 교육, 의료, 주거수준이 높고, 사회 범죄율이 낮은 지역입니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교갈등과 전쟁을 겪은 곳이기도 합니다. 음식문화도 다양하고 풍부합니다. 브라질 최고 품질의 소고기 바베큐(Churrasco Gaúcho), 이탈리아식 살라미(Salami Italiano), 식민지 스타일 치즈(Queijo Colonial), 그리고 마테차인 쉬마허웅(Chimarrão)은 이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입니다.
 브라질 남동부가 커피가 상징이라면 남부는 말을 타고 추운 기후에 산과 강을 건너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개척하는 가우쇼(Gaúcho)가 있습니다. 이 지역 태생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용어는 18-19세기 아르헨티나와 히오 그란지 두 술의 많은 지역에 퍼졌습니다. 지식, 예술, 도구, 음식, 전통, 음악에도 잘 묻어나 있으며 용감하고 관대한 정신 문화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말과 가축을 넓은 초원인 팜파스로 가져왔고 독립심, 이동성, 적극성, 자부심으로 브라질의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가우쇼 문화를 만들었지요. 지금은 많이 수그러들긴 했지만 남부가 브라질로부터 독립하려는 요구와 시도는 이곳 유럽인들과 그 후손들의 인종-정체성 우월의식에 근거합니다. 상파울로 연구소(FAPESP)의 루비조토 연구원은 “히오 그란지 두 술의 가우쇼 문화와 분파주의”『Cultura Gaúcha e Separatismo no Rio Grande do Sul』 (2009) 에서 남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 브라질 사회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여 독립적으로 발전했고 이는 사회 통합의 부정적인 면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한인들에게 브라질 남부지역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관련성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온 많은 유학생들이 있고 기업들도 진출하고 있습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 때문이겠지요.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한국과 비슷한 사계절 기후 뿐 아니라 의식수준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외국인에게 관대한 태도, 더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와 열정, 정보와 기술을 대하는 태도와 속도, 부가가치 있는 재화를 창출하려는 분위기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부지역은 관료주의와 브라질 식 일 처리 방식(Jeithinho Brasileiro)에 익숙해진 한인들에게 보다 낳은 미래를 위해 고려해 볼 만한 환경입니다. 개척자들의 희생과 용기로 수많은 환경적 어려움을 뚫고 정착한 개척자 가우쇼들이 한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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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7 May 2018 02:41:00 +0900
(2018년 GMS세계선교대회)GMS브라질신학교 사역에서 본 변혁과 갱신-8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97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목사(브라질GMS신학교 학장)
 
또 Igreja de DEUS Sociedade Missionaria MUNDIAL은 브라질 27개 주와 세계 175개국에 교회를 설립한 브라질에서 최강능력을 나타내는 전도자 교단이다. 단순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대형집회에서 나타나는 그의 대중성, 하류층 언어, 치병, 축사, 번영의 기적 등을 강조한다. IGREJA Pentecostal DEUS E AMOR는 칠레선교사 미란다가 세운교회로 쌍파울에 중심에 교회가 있다. 신유의 역사로 인해 전국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온다. 라디오 방송으로 선교를 하면서 한 번에 4천명 이상 세례를 주기도 한다. 그 밖에도 Congregacao Crista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Comunidade da Graca 은혜의 공동체 교회들이 도시빈민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열심을 내고 있으나 대부분이 우니베르살(하나님의 왕국 교회) 처럼 상당히 변질이 되어 있고 돈문제로 시끄럽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교회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에서 사역하는 신학교를 비롯한 목회자와 선교사는 관심을 갖고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디아스포라 한인 신학교의 변화와 갱신
 대부분의 브라질 디아스포라 지역 신학교는 브라질(남미포함)의 신학적인 동향에는 관심을 갖지 못하고 지역에 세운 분교로서 본교의 지시를 받아 전통적인 한국의 신학교 커리큐럼을 따라 운영할 뿐 아니라 브라질을 방문한 목회자들의 특강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양질의 교육을 할 수 있는 모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장로교의 전통과 보수만을 고집하며 학교를 운영하였기에 교회는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가 개신교를 대표하는 브라질에서 사역을 해야 하는 사역자를 배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곳에서 한국인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격려하며 한국과 미국에서 재교육을 받고 돌아와 사역할 수 있도록 권고하였다. 1세 중심의 교회는 한국의 순교적 신앙위에 세워진 교회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린 분들이 브라질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의 주축을 이루었기에 복음주의 신앙을 유지하며 선교하는 교회되기 위해 애쓰며 예배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고 기독교문화를 형성하며 현지사회 영역을 펼쳐 갔다. 교포들의 생활이 점점 나아지면서 경배와 찬양, 각종의 제자양육 프로그램, 각종 이벤트성 평신도 프로그램들이 활개를 치며 예태해 목사를 따르던 입신운동과 뜨레스지아, 레마 등 불건전한 신앙운동이 들어와 교회중심의 신앙로선을 붕괴하고 편리주의 신앙, 우리끼리 행복하게 주 안에서 놀고 먹고 즐기자는 개인주의 및 쾌락중심의 신앙운동이 펼쳐졌다. 기복주의 신앙과 물질 축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가운데 교회는 점차 영적 생명력이 약화되어 가면서 목적과 가치관이 변화가 이루어져 세상만도 못한 교회가 되어 가고 있다.]]>
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7 May 2018 02:40: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82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다함없는 신비로 시작하며, 그 신비와 함께 계속되고 그 신비로 마무리된다. 허나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모호하게 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체적 행위에 근거하여 진술한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떠한 모습일까?’,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맺는가?’ 등과 같은 질문에 대해 답변코져 한다.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 대한 지식으로 연관되어 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기독교 신앙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신앙인의 고백은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는 주권자이시며, 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속죄하시며, 하나님과 화목케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 지금도 새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특정한 계시와 구속의 역사에 근거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시작이며, 삶의 중보자이시며, 삶의 능력이시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이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자면, 삼위일체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으로서 그리스도안에서 희생과 순종으로 나타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지금도 이 세계를 변혁하시는 분이다.
 2. 삼위일체와 성서적 증언
 성서는 하나님의 행위에 세 중심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삼위일체의 역사적 행동은 하나님의 사랑을 근원적으로 ‘성부’라고 불려지는 이 분으로부터 와서 ‘성자’의 희생적 은혜 안에서 성육신하심으로 인간으로 행동하시며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속죄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성화케 하시는 역동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실재이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이며, 우리을 위한 하나님이며,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하나님은 ‘성부’로서 창조자이시며, ‘성자’로서 구속자이시며, ‘성령’으로서 생명이시다. 하나님은 절대 권력자도 아니며, 무한한 자기 중심주의도 아니며, 거대한 고독자도 아니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힘은 강제적인 힘이 아니라 창조적이며(성부), 희생적이고(성자), 생명의 능력을 주는(성령) 사랑의 인격자이시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 표현, 상징, 유비와 역사로 가득차 있다.
 3. 삼위일체와 이단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확정된 교리는 하나님은 “본성은 하나이며 세인격으로 구분된다”고 결의했다. 하나님의 하나됨과 삼중적 자기 구분을 진술하는 이 신조는 종속론이나, 양태론, 그리고 삼신론을 반대한다는 진술이기도 하다.
 #종속론-영원하신 성부는 한 분의 위대한 하나님이며 성자와 성령은 뛰어난 피조물이거나 성부보다는 열등하다. 이 이론은 성부 하나님을 몰질, 고난, 변화, 죽음 등으로부터 성부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한 이론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와 성령이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단지 뛰어난 피조물이거나 열등한 신에 불과하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가 될 수 있으며, 성령이 지금도 생명의 능력과 변화를 이끌 수 있는가? 이 이론은 예수가 참 하나님이 못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특히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가 세례받고 부활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것이다. 성서적인 복음의 내용과 상충된다.
 #양태론-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은 하나님의 가면 쓴 것에 불과하다. 성부인 하나님이 성자의 양태로 나타나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성부 수난설이 된다. 사벨리우스는 하나님이 구속사에서 세가지 양태로 나타났다고 했다. 예수께서 하신 사역 전체가 고유한 참된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서가 아닌 겉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대적으로 하자면, 예수가 단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단지 외적인 가면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의 참된 정체성을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삼신론-’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이 세분은 개별적이며, 분리된 신들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이론은 구약과 신약이 가르치는 주님의 명령, 곧 하나이며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신앙의 신뢰와 충성, 예배의 대상이 세 분의 다른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가?
 4. 삼위일체의 현대적 의미
 첫째는 이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삶임을 강화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비인격적 실체가 아니라 인격적 실체이시며 피조물과 살아있는 관계안으로 들어 오신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하시며 서로 사랑하신다. 영원한 존재 안에 이미 생명이 있으며, 인격적관계가 있고, 사랑의 주고 받음이 있다. 삼위일체는 본질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영원한 인격적 교제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인격은 고립되고 독립된 자아가 아니라 서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다. 둘째는 이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이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심을 진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삶은 사회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계약 속에서 사시며 피조물과 교제하신다. 성서의 하나님은 공동체를 세우시며 유지하시는 분이다. 삼위일체의 세 인격은 서로 간에 깊은 관계성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가지신다. 셋째는 이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의 삶이 본질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임을 진지하게 증언하는 것이다. 성서적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은 피조물네 사랑때문에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과 함께 피조물 안에서 고난을 감내하신다. 하나님은 세계의 관계 속에서 시간성, 학대, 고난, 죽음의 깊은 곳까지 경험하신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과 소외와 죽음의 길을 자원하신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구약, 신약성서의 증언과 일치하며,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선포한 고난당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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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0 May 2018 20:47:00 +0900
(사도행전 10분 묵상)24.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81 김성현목사.jpg
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7:39-60]
 스데반은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교회에 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38절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광야에 있는 교회’ 여기에서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는 문자적으로 ‘밖으로 불러 모으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내신 이유는 그들이 애굽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광야에 있는 교회’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을 세상에서 구별하여 교회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기쁨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38절에서 스데반은 모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39절부터 4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회로 세우기 위해 광야로 불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마음을 애굽으로 향했고, 송아지를 만들어 자기가 만든 우상을 기뻐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와서도 바벨론의 신과 암몬의 신을 계속 섬겼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바벨론 포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배의 자리로 부르셨지만 그들 스스로 우상숭배의 자리로 내려갔고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예배의 자리에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49-50절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인간이 지은 어떤 건물도 하나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됩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곳이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건물과 전통만을 강조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너희(종교지도자)가 성전을 우상화한 장본인이라고 고발하면서, 너희들이 살아있는 교회인 예수그리스도를 죽이고 율법과 형식만 남은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엉터리 신자가 거의 없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가짜 신자가 거의 없는 곳은 지금도 핍박이 있는 공산권이나 이슬람권입니다. 그 곳은 예수 믿는 것 자체가 희생이고, 예수 믿는 것 자체가 생명을 거는 일이기에 가짜가 설 자리가 전혀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으며 오는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였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에게 시험이나 고난이 없는 것을 가슴 아파했습니다. 스데반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봅니다. 54-55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이 찔린 그들은 스데반을 보고 이를 갑니다. 반면에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님을 바라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58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과 사울의 만남은 순교의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관계로 만납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의미 없는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사울을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마침내 그를 전도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대한 이방인 전도자가 된 것은 스데반의 순교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방을 향한 복음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바리기는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을 낳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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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0 May 2018 20:45:00 +0900
(2018년 GMS세계선교대회)GMS브라질신학교 사역에서 본 변혁과 갱신-7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80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목사(브라질GMS신학교 학장)
 
우주적인 하나님의 왕국교회(Igreja Universal do Reino de Deus)
 1977년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시작되었고 창시자는 Edir Macedo(에디르 마세도)이다. 이 교회는 브라질의 하류층과 도시 빈민층 그리고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라틴아메리카 계열의 이민공동체에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로서 텔레비전 방송국을 비롯한 라디오 방송국, 신문사, 은행, 신용회사, 레코드 회사 등을 운영하고 있는 종교재벌이다. 교인 수는 6백만명 정도이며 약 85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교회성장의 원인은 치유은사를 통해 교인들이 겪고 있는 영육간의 고통을 제거하는데 많은 관심을 가져오는데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질병과 근심의 원인인 악한 영을 쫒아내는 축귀(Exorcism)의식을 강조한다. 이는 브라질인 전체에 미치고 있는 아프로-브라질 종교의 영향아래(천주교, 개신교 기타 모든 종교인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 있다) 때문이라 한다.
 주: 아프로-브라질 종교(Afro-Brazil Religion) 장화경박사(ph.D)는 수 세기에 걸쳐서 브라질로 이동한 아프리카 종교가 포르투갈의 카톨릭, 브라질의 원주민 종교, 프랑스의 카르덱영매술(Kardecism) 그리고 유럽의 신비술(Occult) 등과 조우하면서 변화, 통합, 융합을 거쳐서 생성된 혼합종교(Syncretism)다. 그 대표적인 아프로 3개 종파중 첫번째는 깐돔브레(Candomble)-아프리카 종교+카톨릭 1930년 성립 특징은 많은 오리샤들이다. 둘째는 마꿈바(Macumba)-아프리카 종교+카톨릭+인디오+오컬트 19세기 말 특징은 주술적 세번째는 움반다(Umbanda)-아프리카 종교+ 카톨릭+카르택시즘+인디오+오컬트+마꿈바 1908년 특징 조직적 교리와 치유이다.
 또 한가지 지적은 거의 매일 드려지는 각종 예배에서 지나치게 헌금을 강조한다. 정부, 언론 등을 통하여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종교 단체로서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언론과 미디어의 힘을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탄한 재정구조를 가지고 있고 언론 플레이가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우니베살 교회의 급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그 해답은 좀 더 본질적인 것에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가난하고 소외된 도시의 하층민들을 잘 보듬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니베살교회는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총체적인 배려를 통해 희망의 근거지를 “저 세상”이 아닌 “바로 지금 이곳에” 둘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16세기부터 정치 종교적 기득권을 누려왔던 브라질의 카톨릭교회와 독재를 일삼았던 브라질 정부가 브라질 하층민과 도시빈민을 방치해 왔기 때문에 우니베살교회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기 때문에 교회는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밖에 IGREJA Internacional da Graca de DEUS는 소아리스목사가 이끄는 대형교회로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부흥사이다. 영적원리를 강론하며 사탄을 제압하는 권세를 가지고 과감하게 명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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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0 May 2018 20:44: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참 빛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67 280 nm.jpg
 
인간이 달나라를 갔다 오는
발달한 세상이 되었어도

인간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빛은
겨우 전등 불빛 정도일 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9)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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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3 May 2018 22:48: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64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는가?
 1) 자연계시를 통한 신인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기독교 전통에서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우리의 양심이나 이성 또는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통해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아는 길이다. 이를 가리켜 자연적 신인식이라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부터 시작된 이러한 신인식은 고대 기독교 교부와 중세 스콜라를 거쳐 근세의 철학적 신론에까지 이르며, 현대의 철학적 신학에까지 그 전통을 이어간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그 분에게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에서 나온다. 두번째의 길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구약 성서의 하나님,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인간을 찾아와 자기를 드러 내신 하나님이시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길이다. 이런 하나님을 믿음을 통해서 아는 길이다. 자연적 신인식은 결국 신을 증명하는 길로 나아간다.
 (1) 우주론적 신증명-신 증명에 대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주로부터 출발하기에 우주론적 신증명이라 명명한다. 이 증명을 가장 체계화 한 분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다섯가지의 길을 제시한다. 하나-“운동으로부터” 자신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서 최초로 다른 곳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 이 존재가 신이다. 둘-“원인으로부터” 우리는 더 이상 원인을 갖지 않는  최초의 원인 내지 제1 원인을 신이라한다. 셋-“가능성과 필연성으로부터” 가능성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성의 존재는 반드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존재, 곧 필연적 존재부터 오며 이 필연성의 존재가 곧 신이다. 넷-“사물에서 발견되는 존재단계들로부터” 이 세계의 모든 만물들은 무의 요소도 있지마는 유의 요소도 있다. 유의 요소가 있기에 파멸되지 않는다. 가장 높은 단계는 낮은 단계의 원인이 되며 이리하여 가장 높은 존재를 전제한다. 이 존재가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며 이 원인이 곧 신이다. 다섯-“사물의 통치로부터” 이 세계 속에 있는 사물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질서있게 배열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닌 어떤 최고의 뜻과 목적에 의해 있게 된것이다. 이 뜻과 목적을 갖은 분이 신이시다. 이것은 위의 것과 다른 것으로서 우주론적 증명이 아닌 목적론적 증명이라 칭한다.
 (2) 존재론적 신증명-중세기의 주교였던 안셀름은 존재론적증명으로 하나님을 전제하고 이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우리가 최고의 존재자의 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 최고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귀결짓는다. 하나님은 그 보다 더 큰 것을 생각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를 우리가 말할 때에 그것은 우리 머리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있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3) 도덕론적 신증명-이 이론의 대표자는 칸트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얻고져 한다. 참된 행복은 단지 욕구 충족에만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도덕법과 일치할 때에 가능하다. 그렇치 않으면 양심의 갈등과 가책 때문에 사람이 행복해 질 수가 없다. 인간은 자연적 욕구와 동시에 도덕적 욕구도 있다. 그러므로 갈등이 계속된다. 최고의 선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행복과 도덕이 일치하는 존재를 전제 할 수 밖에 없다. 이 존재가 곧 하나님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자연적 신인식으로서 하나님의 존재증명을 말했다. 허나 찬으로 하나님은 증명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신앙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단지 인식이 되고 증명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이 이 세계 속한 것들과 동질이상이 아닐 것이다. 그가 인간의 이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이성이 그를 다스리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세상의 사물들에게 적용되는 인과율의 법칙이 하나님이게 적용되므로 이 세상의 한 부분이 되고 만다. 더 이상 초월자나  창조자가 아니다. 동시에 자연적 신인식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다소 설득력이 있으며, 합리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주론적 신인식은 현실적으로 세계의 근거를 보여준다. 목적론적 증명은 이 세계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데 근거를 둔다. 이 생각은 신앙의 명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자연의 인식으로부터 증명하는 것은 오히려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을  확증해 주는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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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3 May 2018 22:44:00 +0900
(성경강해-요한복음해설)38.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63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본문 : 요한복음 14:15~31]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주신 계명 곧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4절에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지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따름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내 생각과 삶의 방식을 우선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때로는 주님의 말씀이기에 지키기 어렵더라도 나를 꺾고 순종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제자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야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당신 또한 ‘보혜사’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보혜사라는 단어의 뜻은 ‘옆에서 부른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위로자’ 혹은 ‘변호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어떤 고난을 경험하고 있을 때 보혜사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위로하시고 이겨낼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보내실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님의 사역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히 26절에 말씀을 하십니다. “보혜사 곧 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의 사역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역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에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구약의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들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사명자로서 거듭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전하는 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단순히 어떤 능력이나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께서 그러한 능력도 주시지만, 성령님의 가장 큰 사역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가?에 대한 평가 혹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가?에 대한 평가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생각나서 지키게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성령님의 사역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킴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오셔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지키게 하심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도, 주님의 사랑하는 것도 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도 않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지도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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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3 May 2018 22:43:00 +0900
(브라질 사회 읽기:한인의 미래)커피와 남동부 지역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62 정기중.jpg
  정기중 선교사(한국외대 국제지역학 박사수료)
 
브라질 사람들 커피 참 좋아합니다. 식사 후, 일상에서 무료할 때 커피 한잔은 여유와 낙천적인 브라질 문화입니다. 동그랗게 생긴 작은 치즈 빵인 뻐웅 지 께이주(Pão de Queijo)와 함께 마시면 환상적이지요. 한인들이 한국이나 미국을 방문할 때 꼭 챙기는 것 중 하나가 이과수 커피입니다. 이곳에서 흔한 인스턴트 제품이지만 비행기를 타면 인기가 좋은가 봅니다. 부드럽고 구수한 향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풍미입니다. 전세계 유명한 커피가 많지요. 3대 커피라 불리는 자메이카의 블루 마운틴, 하와이의 코나, 예멘의 모카 마타리가에서부터 커피인지 보약인지 모를 정도로 비싼 코끼리 똥커피라 불리는 블랙 아이보리, 고양이 똥 커피로 잘 알려진 코피 루왁도 있습니다. 치열한 국제 커피 시장에서 브라질 커피는 양과 다양성을 자랑합니다. 생산의 최적의 기후와 유럽, 아프리카, 중동과 아시아 문화의 혼종성(混種性)은 양과 맛을 평균이상으로 끌어 올린 듯 합니다.
 최근 마트에 가면 커피값이 상승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지난 3년간 남동부지역의 가뭄으로 로부스타(Robusta) 원두의 수확량이 60% 급감했기 때문입니다. 브라질 정부는 커피 산업 3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생두 6만톤을 한시적으로 수입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커피의 나라’인 브라질에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 만큼 공급에 민감한 이유이겠지요. 한국 최초 커피 전문 잡지『월간 커피』발행인 홍성대의 “세계의 커피산업 생산 및 소비 동향”(2017)에 따르면 브라질은 전세계 25~40%를 차지하는 최대의 아라비카(Arabica) 커피 생산지입니다. 1727년 프랑스령 기아나로부터 들어온 커피는 티피카와 버본 품종이 교배 된 아라비카가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합니다. 저지대에서 기계 영농으로 대량 재배되고 있고 모양과 향미가 일반적인 ‘마일드종’과 달라 ‘브라질종’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남동부인 미나스(51%), 산토스(21%), 그리고 상파울로(10%)가 커피 산업의 주요 산지입니다.
 남동부(Região Sudeste)는 에스피리투 산투(Espírito Santo), 미나스 제라이스(Minas Gerais), 히오 지 자네이루(Rio de Janeiro) 그리고 상파울로(São Paulo) 주가 있습니다. 브라질 국내총생산의 60%를차지하며, 특히 상파울로 히오, 미나스는 브라질 26개 주 중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입니다. 총인구, 도시인구, 인구밀도, 운송수단, 산업시설, 대학, 공항, 항구, 고속도로, 학교, 주거시설은 최고 수준입니다. 브라질 전체 영토의 10%밖에 되지 않지만 가장 많은 8000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1690년대 남서부 금광 발견과 19세기 히오와 상파울로 커피 산업은 유럽과 미국의 자본을 남동부로 끌어 들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커피와 우유’를 뜻하는 ‘카페 꽁 레이치’ 정치라는 유명한 말도 공화국시절(1889-1930) 브라질 정치가 커피 산업의 상파울로와 쇠고기산업의 미나스 제라이스에 주도 되었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히오 출신을 일컫는 까리오까(Carioca)의 감성적, 유머러스한 이미지, 상파울로 출신인 파울리스타(Paulista)의 현실적, 사업가적인 특징은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끈 브라질의 역동성의 일면을 드러냅니다.
 유럽에서 시작해서 북미주를 거치면서 전세계 기호식품시장을 이끈 커피는 지금 동남아와 동유럽에서 주목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큰 생산지 중 하나인 브라질 남동부는 기회의 땅입니다. 브라질 한인들은 상파울로에서 이민 역사를 시작했고 의류 제품업으로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직업군(職業群)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이민사회의 뿌리가 얕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 세대에게 다양한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제도적 뒷받침으로 길을 열어주고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동부의 커피 산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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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3 May 2018 22:41:00 +0900
(2018년 GMS세계선교대회)GMS브라질신학교 사역에서 본 변혁과 갱신-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61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목사(브라질GMS신학교 학장)

 그들은 당장 브라질로 갈 방도를 찾지 못하고 기도 하던 중 뉴욕의 한 장소에서 어떤 사람을 찾으라는 또 다른 예언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예언의 은사) 그들은 밤 기차로 뉴욕에 갈 수 있을 정도의 푼돈만 가지고 뉴욕을 향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으며, 그 사람은 그들에게 “파라”주 수도인 “벨렝”까지 갈 수 있는 수송기의 3등칸 표를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은 피곤한 상태로 브라질의 파라 주에 도착한 것이 1910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공원 벤취에 축 늘어져 앞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 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먼저 한 감리교 선교사에게 인도하셨으며, 그 선교사는 그들을 한 친절한 침례교 목사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 목사는 그들에게 교회 뒷 편에 있는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포르투갈어로 설교할 수 있을만큼 실력을 갖출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했으며 마침내 그들은 그곳을 떠나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브라질 최대의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의 시작이며 싹이었던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교회성장” 피터 와그너 저에서) 현재는 그 싹이 자라 브라질 개신교를 대표하고 있으며 다혈질적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개신교 중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재 브라질을 오순절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교회는 브라질 Igreja Assembria Deus(하나님의 성회), Igreja Universal do Reino de Deus (우주적인 하나님의 왕국교회), IGREJA Internacional da Graca de DEUS(국제 하나님 은혜교회), Igreja de DEUS Sociedade Missionaria MUNDIAL(세계선교교회), IGREJA Pentecostal DEUS E AMOR(하나님 사랑교회), Congregacao Crista(그리스도인들의 모임), Comunidade da Graca(은혜의 공동체) 등이다. 성장하는 대형교회 중 얼마전 솔로몬 성전을 세운 Igreja Universal do Reino de Deus (우주적인 하나님의 왕국교회)성장요인을 분석하고자 한다. 대부분의 대형교회가 비슷한 모양으로 사회속에 비추어져 가고 있기에 오순절계 대형교회들을 좀더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면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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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03 May 2018 22:40: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아침 해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45 E9CU3221 nm.jpg
 
광활한 모하비 사막에서 보는
아침 햇빛은 어느 곳보다
붉고 강렬합니다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하박국 3:4)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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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Wed, 25 Apr 2018 23:21:00 +0900
(기독교란 무엇인가?)기독교의 본질-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42 양성환목사1.jpg
미주성결교회 양성환 선교사(오레곤선교교회 파송)
 
1. 기독교에서 계시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계시란 문자적으로 이 전에 감추어 진것이 ‘드러나는 것’ 또는 ‘베일을 벗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가지는 대부분의 앎의 경험에는 일종의 뜻하지 않는 갑자기 나타나는 선물같은 깨달음, 초월 경험, 묵시적 현상등이 있다. 참된 지식을 체험하기 위해 대상을 향하여 능동적인 태도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더 갖어야 할 태도는 무엇인 가를 받고, 듣고, 들어야 할 개방된 마음이 요구된다. 그렇다면, 그 대상을 향하여 우리는 겸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연구 대상으로서, 우리가 무엇인가 발견하도록 하는 탐구의 대상이기보다는 그 분이 먼저 말씀하시도록 허락해야한다. 여기에 계시적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창조안에서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안에서 계시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님의 본질을 다 드러내셨다. 이 계시적인 만남을 통해서 어떤 지식,어떤 사실뿐만 아를 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1)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아들안에서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본질이며 총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삶, 구원의 행동, 말씀 그리고 십작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궁극적으로 나타내셨다.그러기에 계시는 인간의 알고져 하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노력하기 전에, 동시에 인간이 있기도 전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섭리하시고 찾아오신 것이 계시의 근원이며 계시의 내용이다.그럼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발원적 표현이며 은혜의 강력한 표현이다. 신약성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과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극적으로 인격적으로 일어났다고 증언한다.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시는 그 받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응답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가장 합당한 응답이 바로 신앙이다. 그러므로 계시와 신앙은 기독교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 할 수있다. 계시없이는 신앙이 없으며, 신앙이 없이는 계시적 사건이 의미가 없다. 계시는 신앙을 일깨우며, 신앙은 계시를 통해서만 참된 신앙이 된다. 신앙의 내용은 계시의 내용과 일치 할 수 밖에 없다.
 2)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가로되’ 의 표현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동적인 행동으로서 나타난다. 주의 말씀은 구체적 사건이나 심판 그리고 구원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역동성을 지닌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의 행동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가장 극적으로 역사속에서 나타났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진술했다. 하나는 선포된 말씀으로, 둘째는 기록된 말씀으로, 세째로 성서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것은 쉽게 설명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기록된 성서를 통해서,목회자의 매 주일 선포되는 설교를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외형의 형식적인 것이 아닌 내용적인 특성을 가진다. 하나 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도 성령의 역사함으로 가능하다. 칼빈은 이것을 성령의 내적 증거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성서에서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다. 말씀속에서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신앙의 근거가 된다.
 3)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기록된 성서가 없을 때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을 알 수가 있었다. 이러한 계시를 소위 일반계시(원계시)란 말을 쓴다. 체험적인 한계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계시는 일반적으로 ‘자연세계’ ‘역사세계’ ‘ 양심세계’ ‘ 개인세계’가 있다고 한다.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 능력, 지혜’ 등을 통해서 하나님을 감지하는 것이다. 역사세계는 하나님의 행동하시는 흔적과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지하는 것이다. 양심의 세계는 양심의 소리를 인간 밖에서 오는 신의 소리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세계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서 오는 깊은 위협과 곤경을 통해 신을 향한 질문과 만남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창조세계위에 세워 질 수 없으며 신앙도 일반계시로 부터 세워질 수 없다. 일반계시통해서는 인간은 보편적으로 부패되어 있고 사악하고 파괴적이므로 창조세계를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기가 어렵다. 일반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계시보다 부분적이며, 모호하고 흐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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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Wed, 25 Apr 2018 23:17:00 +0900
(사도행전 10분 묵상)23. 아름다운 사람 모세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41 김성현목사.jpg
김성현 목사(헤브론교회 담임)
 
[사도행전 7:17-38]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모세와 그 율법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존중하는 자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 없을 때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일을 밝히면서,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온 땅에 하나님이 계심을 강조합니다.
 모세는 성전과 율법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고 계셨음을 말합니다. 또한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우상 숭배했던 죄악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성전과 율법에만 매여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17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 구절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시간표대로 신실하게 일 하심을 보여 줍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명을 감당했듯이 ‘약속하신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왜 모세는 믿으면서, 예수는 믿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여기서 ‘아름답다’(토브)라는 말의 의미는 모세가 외모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이루시기 위해 영이 아름다운 한 아기를 준비하십니다. 어떤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구원의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모세라는 한 아기가 그 시대를 위해 준비 되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아기를 준비하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럼에도 종교지도자들은 갈릴리 출신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가문도, 학력도, 인맥도, 흠모할 것도 없는 촌부에 불과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이 문제에 대해 22절에서 다시 모세의 예를 듭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어떤 능력이 필요할까요? 모세는 당시 최고의 애굽의 학문을 배워 말과 행동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세상의 정점에 있을 때 사용하지 않으셨고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애굽 궁정에서 인간을 통치하는 법을 배웠다면, 광야에서 모세는 연약한 양들을 돌보고,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광야의 시간 없이, 영적인 준비 없이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시면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인간의 능력이 최정점에 있을 때 모세가 한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모세 이야기를 통해 애굽에서 익힌 지식과 실력으로는 생명을 낳을 수도,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도 없음을 선포합니다. 모세는 왕자의 자리를 떠나, 광야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을 직면한 후에야 비로소 바로를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홍해를 가르는 표적을 행했으며,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 모세의 아름다움은 바로의 궁전이 아니라 광야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세의 아름다움은 세상의 화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아름다움은 광야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나옵니다. 이민의 광야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아름다움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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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Wed, 25 Apr 2018 23:16:00 +0900
(2018년 GMS세계선교대회)GMS브라질신학교 사역에서 본 변혁과 갱신-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40 강성철 - 복사본 (2).jpg
강성철 목사(브라질GMS신학교 학장)
 
더욱이 감사한 것은 실력있는 현지인 교수들이 자원하여 강의안을 들고 온다는 사실이다. 본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자원하여 봉사하며 학교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지역적인 문화와 상황속에는 해방신학이 민중들과 맞을 것 같은데 진정 교회의 변화 갱신은 하나님의 성회와 번영신학과 신은사주의 운동이 가져왔다. 그러면 브라질과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변혁과 갱신을 가져온 하나님성회 및 오순절계 대형교회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논의 : 1) 왜 브라질 및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해방신학을 채택하지 않고 번영신학과 신은사운동을 채택하였을까?
 브라질교단을 대표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회를 비롯한 대형교회 성장요인 분석
 1) 하나님의 성회(Igreja Assembria Deus)
 900만 이상의 신자를 가지고 있는 “브라질 하나님의 성회”가 창설된 것은 1910년이다. 유럽의 스웨덴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군나 빙그렌”과 “다니엘 베르고”는 해외 선교사로서 꿈을 키워왔다. 1909년 미국 인디아나 주에 있는 사우스 밴드시의 한 기도교제 모임에서 두 사람은 파라(Para)로 가라는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예언의 은사) 파라(Para)? 그들은 그런 이름의 장소를 결코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립 도서관을 찾아가서 여러가지를 알아 본 뒤에야 “파라”라고 부르는 장소가 남아메리카에 있는 브라질의 한 주 이름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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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Wed, 25 Apr 2018 23:15:00 +0900
(그릿시냇가 사진이야기)그리움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24 1Q5K5692 nm.jpg
 
노을을 뒤 따라 어둠의 장막이
하늘을 뒤덮을 것을 알기 때문에

지는 노을이 하늘에 아름다울수록
더욱 짙게 피어 오르는 그리움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글ㆍ사진 박태화 장로(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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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9 Apr 2018 21:29:00 +0900
(성경강해-요한복음해설)37.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21 심석현목사(샬롬교회).jpg
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본문 : 요한복음 14:1~14]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목숨을 잃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니, 매우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 당신이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초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 이유를 ‘아버지 집에 제자들이 거할 거처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국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구원받는 자리에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도마가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육적인 의미로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는 것과 구원의 자리를 예비하신다는 것을 장소적인 의미로만 이해함으로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해가 부족한 도마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세상에 보이는 어떤 길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믿는 것뿐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이제 빌립이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와 하나됨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한 확신을 하나 주십니다. 그것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게 행하리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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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9 Apr 2018 21:24:00 +0900
(브라질 사회 읽기:한인의 미래)중서부 지역, 새로운 경제 무대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20 정기중.jpg
  정기중 선교사(한국외대 국제지역학 박사수료)
 
한국에 집회 참석차 온 브라질 목사님들의 하소연입니다. 처음에는 한국음식을 호기심으로 잘 먹습니다. 김치며 국이며 매운 반찬을 연신 맛있다고 하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웁니다. 하지만 일주일만 지나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Eu quero churrasco!” 지구 반대편까지 고기 냄새가 전해지는가 봅니다. 상파울로에 사는 한인들에게 브라질 살면서 좋은 게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많은 분들이 질 좋은 소고기가 있어서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마트에 가서 필레미뇽(Filé Mignon), 삐깡야(Picanha), 꼰트라필레(Contrafilé)를 킬로에 10불 정도에 구입할 수 있습니다. 소고기에 아무 양념 없이 소금만 살살 뿌려서 숯불에 구워 한 입 먹는 그 순간 만큼은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아, 정말 브라질 잘 왔다”고 할 정도이지요. 지금은 경제불황으로 많이 줄었지만 10년 전 만해도 주말에 파벨라, 고급 주택가, 아파트 등, 온 거리에 슈하스코 냄새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브라질은 먹거리를 해결하고자 정책적으로 소고기 산업에 관심을 가졌고, 양과 질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 중심에 중서부 지역이 있습니다.
 중서부(Região Centro-Oeste)는 고이아스(Goiás), 마또 그로소(Mato Grosso), 마또 그로소 두 술(Mato Grosso do Sul), 수도인 브라질리아(Brasília)가 있는 연방 자치구(Federal District)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까지 고이아스와 마또 그로소 단 두 개의 주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1955년 주셀리노 쿠비체크(Juscelino Kubitschek) 대통령은 공약으로 고이아스-미나스 제라이스 경계의 브라질리아로 수도를 이전했고 1980년대 마또 그로소 도 술이 분리해 이 지역의 경제적, 인구적 성장과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는 브라질 현대사에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바다를 통해 ‘밖으로’ 부터 유럽과 미국의 문물을 받기만 했다면, 수도 이전은 남아메리카 대륙 ‘안으로’ 진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서부 지역은 먹거리 특히 소고기 산업으로 주목 받고 있습니다. 브라질의 경우 번식에서부터 살찌워 상품을 만들기 까지 사육 과정에서 1)영양 2)비료 3)노동 4)가격 불안정과 같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산업은 브라질 경제를 안정시키는 요인이자 경쟁력이 있습니다. 호주 위클리 타임즈(The Weekly Time)의 자미-리 올드필드는『The Brazilian beef industry’s slow climb could be a nightmare for Australia』(2016) 에서 브라질은 비효율과 비용 상승에도 여전히 세계 최대의 소고기 수출국이며 2014년 사상 최고치인 580만 달러를 기록하여 전년 대비 8%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24년까지 세계 시장의 25%의 점유율로 호주를 비롯한 미국, 인도와 경쟁할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중서부 지역은 브라질 미래의 먹거리의 보고일 뿐 아니라 브라질 한인의 경제 활동의 확대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브라질의 농업과 무역 동향』(2007)에 따르면 농산물 수출 증가로 곡물 생산의 중심이 중서부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그 예로 중서부 대두 경작 면적이 남부/남동부 지역보다 넓어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현재 한국과 브라질 농산물 교역은 제한적입니다. 물리적인 거리와 많은 무역 장벽 때문이지요. 하지만 농산물 수출 규모의 증가, 농업 기술의 상향 평준화, 민간의 농업시스템 개선 의지와 노력은 브라질 농산물 교역의 확대 가능성을 말해주고 한국인들의 밥상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 예상됩니다. 미래의 양국의 농산물 교역에 한인사회가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지 상황을 잘 알고 한국과의 다리를 놓는 농업전문가 및 연구원 통상전문가가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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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오피니언>연재> Thu, 19 Apr 2018 21:24:00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