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 오피니언 > 칼럼 http://nammicj.net/n_news/section.html?code=netfu_89053_16079&s_code=20110403032714_1058 "남미복음신문" 복음선교 인류구원 신앙보수 > rss 보기 ko (금주의 제언)근면하라, 열심히 일하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58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사람이 정직과 근면이 없이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 그러기에 프랭클린은 “정직과 근면을 당신의 영원한 반려자로 만들라”고 하였다. 존슨은 “근면과 성실이 있으면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고 하였다. 비스 마르크는 “청년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단 세 마디 뿐, 일하라, 좀 더 일하라, 끝까지 일하라이다”라고 했다. 이태리 속담에 “근면은 행운의 어머니다”라고 했다. 갑신정변의 행동 대원이었던 이규완은 “조선인 2천만 명 중 10만 명이 일하고 나머지 1천9백90만이 놀고 있으니 가난할 수 밖에 없다”라는 말로 조선인들의 형편없이 낮은 근면성을 평가했다.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한 목적은 현실 생활은 등한히 하고 예수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던 당시의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을 일깨우기 위한데 있었다.
 열심 있는 신앙은 결코 현실에서 동떨어진 종교적인 황홀경이나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림의 때와 기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행1:7)이라는 말씀은 신앙인일수록 미래보다 더욱 현실생활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이 미래라는 말이 있다. 미래를 위하여 오늘을 근면 성실하고 알차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말로써만이 아니라 자신이 힘써 밤낮 일함으로써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 천막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뿐 아니라 음식을 앞에 두고도 떳떳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목적이 단순히 먹기 위한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일하는 기쁨과 더불어 일한 후에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성취감과 감미로운 쾌감은 일을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일에 대한 의무 때문만이 아니라 일한 후의 성취감과 감미로운 쾌감의 기쁨도 아셨기에 일을 즐기셨던 것이다. 휴식과 행복은 누구나 갈망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일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열매이다.
 근면의 대가는 최상의 기쁨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지금 나는 일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겠다. 저와 여러분이 근면과 열심히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 바란다. 항상 부지런히 성실하게 기쁘게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행복임을 깨닫게 되기 바란다.
 특히 음악을 하는 사람은 근면과 열심과 끈기가 있어야 한다. 피나는 연습이 없이는 자기가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명한 폴란드 피아노 연주자인 루빈스 타인은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그 사실을 느끼게 되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친구들이 눈치챈다. 만약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느끼게 된다”고 하였다. 각 교회의 찬양대원들은 근면과 열심있는 사람, 끈기와 인내의 사람이 되어서 찬양 연습을 더욱 부지런히 하기 바란다. 찬양이 마음속 깊이 영혼에 녹아져 내리도록 연습을 하기 바란다. 가사와 곡이 완전히 소화되고 머리에 입력이 될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 할 수 있기 바란다. 모든 단원의 목소리가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화음이 되어 들릴 때 까지 연습을 중단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9 Jul 2018 21:19:00 +0900
(송정섭의 어원칼럼)e, ex 계열 어원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54 송정섭집사2.jpg
송정섭 집사(한포사전 저자)
 
“ex”  계열의 어원은  “외부, 바깥, 특별, 예외, 임시, 잉여, 이전” 등의 의미로 다양하면서도 기본적으론 “외부, 밖”이란 개념입니다. 이 계열의 접두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원이 드물지만 서로 같아서 그 만큼 더 많은 단어들에 스며 들어있습니다.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예로써 “exportar”(수출하다)란 단어에서 “ex”는 밖으로 “porta”는 문, 나라의 문은 항구 즉 “나라의 문 밖으로”라는 의미가 되어 “수출하다”이고, 반대로 “안으로”라는 접두어 “im”을 붙이면 “importar”이고 “문 안으로”란 뜻이 되어 “수입하다”가 되죠.
 다른 경우로 “expresso”는 카페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왜 일까요? “ex”는 바깥이고 “presso”는 “누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럼 “뭔가를 눌러서 밖으로 짜내다”라는 의미가 되도록 합성한 것이기 때문에, 원두를 즉석에서 압축해서 커피로 만들어 준 기계나 상품(커피) 이름으로 적격인 셈이죠. 모든 상품명의 수명은 그 기능과 효과의 이미지 전달이 어원적으로 잘 될수록 브랜드 가치에 영향이 크다고 알려져 있지요. 또한 “ex”와 “presso”라는 어원은 활용가치가 더해져서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 예들이 많습니다. 만약 “시간”을 누르면 “급하다“란 뜻이 되어 “ônibus expresso”하면 “급행버스”가 되고, 활자(글자)를 누르면(press), 인쇄, 문자, 뉴스, 언론의 뜻이 되어 “프레스 센터”라 하면 언론인(기자들) 센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죠. 반대로 안으로(im) 눌러서(press) 뭔가의 일을 해 준 기계를 “impressora” 인쇄기(프린터기)라고 하지요. 좀 더 나아가 마음속의 생각을 눌러서 바깥으로 내보내면 표현(expreesão)이라 할 수 있지요. 예를들어 “expressão idiomática”라고 하면 관용적인 표현이란 뜻이지요. 우리말이 다 된 “엑스포”란 단어도 바깥에(ex) 내놓다(pôr)란 어원으로 “전시회”란 용어가 된것이죠. 또한 은행에서 수시로 확인 해보는 “입출금 내역서”의 “extrato”도 “밖으로 뽑아내다”란 의미의 낱말인거죠. 따라서 외우기보다는 어원을 살펴 이해하는 습관으로 바꿔지길 바랍니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9 Jul 2018 21:15:00 +0900
(칼럼)복된 언어생활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50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잘 지켰으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언어생활이다. 잠 13;2에 보면 “사람은 입의 열매로 복록을 누린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입을 지키는 자는 생명을 보전하고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는 멸망이 온다.”고 말씀한다.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생사화복이 좌우되지만 언어생활을 통해서도 역시 우리의 생사화복이 좌우됨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복된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그 말로 인하여 복을 누리게 된다. 세상에서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열매를 자신이 거두는 것이다. 말을 잘 하면 그 말로 인하여 좋은 열매를 거두지만, 말을 잘 못하면 그 말로 인하여 열매를 나쁜 것으로 거두게 된다.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므로 말을 잘 해야 한다. 항상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한다. 선한, 칭찬, 감사, 진실, 격려, 위로, 긍정적인, 믿음의 말, 복된 말을 해야 한다. 절대로 불신앙,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말만 하고 살아도 부족한데 왜 나쁜 말까지 하면서 살 필요가 있는가? 복된 말을 하면서 복된 열매를 거두며 살자. 그리고 말을 더디 해야 한다. 약 1:19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도 더디 하라.”고 말씀한다. 말하는 것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이다. 해야 될 말인지 아닌지 잘 판단해서 하라는 말이다. 설화라는 말이 있다. 혀를 잘 못 놀려 당하게 되는 화를 의미 한다. 정치인들을 보면 말을 함부로 하다가 그 말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심한 경우 그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정치 생명이 끝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도 있다. 그만큼 말을 삼가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심사숙고해야 한다. 말은 한번 입 밖으로 나오면 취소하기가 어렵다. 마치 모래밭에 쏟아진 물과 같다. 그러므로 항상 신중하게 말을 해야 한다.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말을 하면 안 된다. 가정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 구성원들 간에 막말을 하고 무시하는 말을 하면 안 된다. 항상 은혜스런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가정의 행복이 깨어지지  않는다. 말로 인한 불화가 대부분이다. 이웃과 관계가 왜 나빠지는가? 말 때문이다. 말로 인하여 다툼,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도 더디 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복된 언어생활이 되도록 하자. 다윗은 시 141:3에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나의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따라서 말을 잘하면 복을 누리지만 말을 잘 못하면 그 말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다. 잠 6:2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한다. 자신이 한 말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말이 올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잘 해야 한다. 마 12:36-37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한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그 사람의 신앙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인격, 됨됨이, 그 사람의 교육수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인격, 신앙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잘 해야 한다. 성도인 우리의 말은 더더욱 본이 되어야 한다. 복된 언어생활이 되기를 소원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9 Jul 2018 21:07: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삼색기’가 이겼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49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금년 월드컵은 프랑스가 차지했다. 새벽잠을 설치게 하더니 결국은 프랑스가 이겼다. 호날두나 메시, 수아레스나 네이마르같은 수퍼스타들이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서 볼거리도 약화되고 남미축구마저 굴복하는 바람에 유럽축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보라고 무관심 쪽으로 흘렀지만 이번 월드컵의 최후승자는 프랑스였다. 2015년 동시연쇄테러사건으로 130여명이나 사망한 ‘파리테러’의 악몽에서 벗어나라며 세계인들이 건네주는 위로의 트로피라고나 할까?
 ‘파리의 광화문’이라 할 수 있는 개선문에서 콩코드 광장에 이르는 상젤리제 거리에서는 선수들이 귀국한 날 대대적인 퍼레이드가 벌어졌고 더불어 물결처럼 파리를 뒤덮은 것이 바로 삼색기였다. 삼색기? 프랑스 국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프랑스어로는 라 트리콜로르(La Tricolore). 프랑스 국기의 삼색은 파랑, 하양, 빨간색인데 파랑은 자유, 하양은 평등, 빨강은 박애를 상징한다고 한다. 사실은 부르봉 왕조의 상징인 백합의 흰색, 프랑스 혁명당시 시민군의 상징인 파란색과 붉은색이 합쳐진 것이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가이드가 꼭 끌고 가는 그림 세편 중에 ‘루브르의 안방마님’ 모나리자와 유럽에서 제일 큰 그림이라는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과 함께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이란 그림이 있다. 웃통을 벗어 앞가슴이 들어난 여신이 삼색기를 들고 혁명군을 이끌고 가는 모습이다. 그림의 배경은 프랑스 혁명. 혁명하면 영국을 떠올리지만 프랑스도 만만치 않다. 스페인과 프랑스 일대를 두루 통치하던 부르봉 왕조에 맞서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는 수많은 혁명가운데 가장 대표급 혁명이 바로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위에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프랑스 대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사실은 그보다 몇 년 후에 일어난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으로 시작되어 무려 10여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래서 7월 14일은 바스틸 데이(Bastille Day)라고 부르는 프랑스의 혁명기념일이다. 미국 독립기념일과 10일 차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하면 보통 1789년에 일어난 혁명을 두고 말한다. 이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하여 절대왕정으로 상징되던 루이 16세와 부인 마리 앙뜨와네트가 콩코드 광장에서 목이 잘려 참수형을 당했다. 드디어 절대군주가 호령하던 지긋지긋한 왕정이 깨지고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을 혁명이란 총천연색 학습자료를 통해 인류를 깨우쳐 준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세계의 여러 나라가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민주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으로 상징되는 그 삼색기를 너도 나도 수입(?)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파랑, 하양, 빨강색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삼색이 뜻하고 있는 가치, 즉 자유, 평등, 박애 때문이었다. 근대적인 국민주권 국가를 열면서 프랑스 혁명의 그 3대 정신이 간절히 필요했고 그 옷을 입고 있는 삼색기도 함께 모방한 것이다. 월드컵에서 두 나라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올 때 그 나라의 국기가 먼저 등장하는 걸 보았다. 그런데 다 비슷비슷해서 헷갈리기 십상이다. 그 헷갈리게 하는 주범은 바로 프랑스의 삼색기, 그리고 삼색기의 배경엔 프랑스대혁명이란 위대한 역사의 숨결이 숨어 있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가 우선 대표적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아일랜드는 저항의 상징으로 녹색, 흰색, 오렌지색을 이용한 세로 삼색기를 국기로 채택했다. 이탈리아는 초록·하양·빨강으로 된 삼색기가 국기가 되었다. 심지어 이번 월드컵 주최국인 러시아 국기도 가로형 삼색기다. 색깔도 프랑스와 똑같이 하양, 파랑, 빨강이다. 이웃나라 독일도 마찬가지다. 까망, 빨강, 노랑의 가로형 삼색기를 갖고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도 프랑스의 삼색기를 본 따 색깔만 바꿨다. 기니, 말리,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카메룬, 차드와 같은 나라들이 모두 세로형 삼색기다. 그러니까 유럽과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게 널려 있는 삼색기의 종주국은 프랑스요, 그것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의 종주국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혁명으로 인하여 프랑스란 나라는 인류역사에서 큰 어른 대접을 받아도 된다. 삼색기를 통해 그렇게 전파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아메리카에서 편하게 대접받고 있는가?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들의 자유가 자꾸 제약을 받고,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경제적 불평등은 이 나라의 만성 골칫거리가 되고 있고 박애? 밀입국자들의 철부지 아이들과 부모를 강제로 격리시겨 가둬두는 나라가 박애를 말할 자격이 있는 나라인가? 월드컵 승리로 파리를 뒤덮은 삼색기를 바라보며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아메리카의 자유, 평등, 박애가 자꾸 구박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심사가 편치 않다.]]>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9 Jul 2018 21:06:00 +0900
(금주의 제언)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40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어떤 경우에도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고 원망과 불평을 극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피피니란 사람은 “세 가지만 있으면 누구도 원망, 불평할 자격이 없다. 즉 한 끼의 양식이 있으면 감사하라. 오늘 건강하면 감사하라. 소망이 있으면 더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다. 시편 103편은 다윗이 나이 많은 황혼기에 자기의 지나온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노래한 시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시103:1) 다윗은 자기 자신을 놓고 구체적인 감사를 드리고 있다.
 첫째, 죄 사유함 받은 것을 감사했다. 사실 죄 문제로 고민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죄의 문제로 깊은 고민이 있고 이것 때문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해결을 얻고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이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는 것이다. 사죄함을 받지 못한 사람의 재물은 축복이 아니다. 죄로 인하여 고민하는 사람의 출세는 영광이 아니라 굴욕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했던 것이다. 사죄 받은 그 감격이 곧 감사요 그로 인해 진실한 감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건강에 대해서 감사했다. 인간에게 최고의 복은 건강이다. 평범한 것을 감사하라. 무사한 것, 건강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몸이 건강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몸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래서 고전 6:19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몸의 건강을 잘 보전하고 유지하고 지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셋째,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 대해 감사했다. 행복한 인생이란 결국 받은 사랑을 깊이 깨닫고 이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자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랑을 남달리 받고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
 넷째, 소원을 만족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그 소망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감사하기 바란다.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배은망덕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서 이렇다 하게 큰일은 못해도, 큰 성공은 못했어도 제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은 되지 말기 바란다.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기쁨과 감사,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용기로 살아가기 바란다.
 개는 배신하는 법이 없다. 개는 어떤 경우에도 주인을 무는 법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주인을 문다. 은혜를 모른단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은 개만도 못한 것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은 은혜를 모른다. 고마운 줄을 모른다. 조금만 섭섭하면 등 돌리고 배반하기 일쑤이다. 이게 어찌 사람이 하는 짓이라고 하겠는가? 인간은 은혜를 모른다. 고마움을 모르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배신은 잠깐이지만 후회는 영원하다. 불평은 잠깐이지만 불행은 영원하다. 섭섭함은 잠깐이요, 그러나 감사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리고 앞에 있는 희망과 하나님이 언약하신 약속을 바라보며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 계속 전진하기 바란다.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 소망 중에 하늘을 쳐다보며 주신 은혜를 헤아려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2 Jul 2018 20:38:00 +0900
(1心 칼럼)족저근막염에 발 보호는 어떻게 해야 하나?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39 족저근.jpg
 
발바닥(족저)의 근막에 생기는 통증을 족저근막염이라고 합니다. 족저근막염이 생기는 원인은 다양한데 대부분은 심한 운동이나 불편한 신발 착용 또는 비만도 여기에 한 몫 하긴 합니다. 자세한 원인과 치료방법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하시기 바라고 저는 이런 족저근막염이 생겼을 때 어떻게 발을 보호해야 하는가를 잠간 말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뒤꿈가 더 아프고, 어떤 사람은 약간 앞쪽이..(제일 많음) 또는 가운데, 앞쪽으로도 아픕니다. 대부분의 의사들과 다친 사람들은 발 바닥의 통증이 있는 자리를 보호하려는 생각에 푹신한 깔창을 사용하거나 아픈 발꿈치 쪽으로 실리콘을 부착하기도 합니다. 푹신한 깔창과 실리콘 착용은 분명 도움이 되긴 하지만, 생각보다 그리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생각해 보시면 아픈 부위를 높게 만들어 제일 먼저 땅바닥에 닿게 하는 일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제일 효과적일까요? 위에서 말한 내용을 이해 하셨다면 어떤 방법이 효과적인지 답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아픈 자리의 접촉을 보다 적게 해 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족저1.jpg
 

 여성의 발을 가져와서 그려보겠습니다. 발꿈치나 바로 앞 쪽이 아프실 때, 윗 그림처럼 [안아픈 곳]을 보호합니다. 그러면 지면에 발 바닥을 딛게 될 때 아픈곳이 나중에 닿게되면서 통증이 최소한 50%이상 감소합니다. 보호대의 재질은 그냥 집에서 안쓰시는 팔꿈치 보호대 같은 것을 잘라서 두겹으로 해서 쓰시면 되고 그런 재질이 아니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집에서 안쓰시는 것 대충 잘라 사용하시면 됩니다.
 족저근막염은 한방치료로도 잘 낫습니다. 적으면 4, 5번의 치료... 많게는 10번 정도까지 치료합니다. 부위에 따라 빨리 낫기도 하며 어떤 곳은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저는 배드민턴을 칠 때 많이 점프를 하는 편이라 발꿈치를 많이 다쳤습니다. 그래서 신발에 예방차원에서 실리콘을 운동화에 넣기도 하고 깔창도 넣어보기도 하고, 발바닥을 많이 보호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시합 후, 다른 때 보다 많이 아프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 발이 제일 편해질까 곰곰히 생각하던 중... 안 아픈 곳을 보호해 주니 지면을 디디기가 수월해졌습니다. 그리고 최근 치료를 하고 있는 여러명의 족저근막염 환자들에게도 같은 방법을 권하였더니 발 디딛기가 그 자리에서 틀려졌습니다. 제가 생각한 방식이 생각해 보면 뻔한 이치인데...  왜 그렇게 안했을까를 생각해 보니... 역시 내가 아파봐야 방법도 생각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전 오늘도 아프면 더 아프게 만들어 치료하려 노력중이랍니다. ㅎㅎ 늙어서 운동하면서 온 몸이 다 다치면서 아프네요 ㅠ_ㅠ

1心(한의사)
[출처:www.koreabrazil.net]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2 Jul 2018 20:37:00 +0900
(송정섭의 어원칼럼)Ante와 Anti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38 송정섭집사2.jpg
송정섭 집사(한포사전 저자)
 
“Ante”는 라틴어 어원으로 “이전, 미리, 먼저, 앞선, 오래된” 등의 뜻으로 사용되며, 유사한 어원으로는 “Pre”라는 접두어도 같은 의미이므로 함께 다룬다면 중복을 피할 수 있겠습니다. 흔한 예로 ante(미리)와 pago(지불)가 만나면 antepago(혹은 prepago)가 되어 “미리 지불” 즉 “선불”이 되고, 반대로 “뒤, 나중”을 의미하는 pós와 만나면 당연히 póspago(후불)가 되죠. 또한 ante와 data(날짜), datado(날짜가 기록된)가 만나면, antedatado 혹은 predatado가 되어 “날짜 미리 기록”의 의미가 되어, 수표에 사용하면 cheque predatado(선수표) 등으로 보통 쓰이는가 하면, 초기 기본 단어 중에도 어제(ontem) 보다 이전인 그제는 anteontem이었고, 그끄제는 ante anteontem이었습니다. 나아가서는 “그리스도 탄생 이전”이란 의미의 기원전 B.C는 A.C 즉 Antes do Cristo이고, 오전시간 A.M도 antes do meio-dia(정오 이전)이며, 오후 P.M 역시 antes do meio-dia(정오 이후)로서 포어, 스페인어(로망스어) 계열의 약자이지 근본 영어 약자가 아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말이 되다시피한 안테나(antena)라는 말도 제일 앞에 나가 있는 것(곤충의 더듬이)이란 의미에서 ante라는 어원으로 된 말이며, 또 취미 중에 옛날 고가구인 엔틱가구 수집들을 하는데, 옛날을 의미하는 영어 엔틱(antic)은 포어 antigo에 비견되어 간단한 용례로 carro antigo와 carro velho 중, 전자는 옛차(고풍스런 잘 관리된) 느낌인 반면에 후자는 낡은 차 즉, 느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이 antigo의 어원에 부연하여 사람 호칭에도 “늙은이(idoso)”란 원래 어원은 “늘어난 자(경험과 지혜가 많음)”였는데, 최근에 “낡은이(velho)”로 폄하됐다고 하죠. 이 어원을 뒷받침하는 남아공의 알려진 속담이 있는데 “늙은이가 죽으면 동네 도서관 하나가 사라졌다”고 슬퍼한다고 전해집니다.
 “Anti”는 그리스어(헬라어) 어원으로 “대항, 배척, 혐오, 반항” 등의 의미로 라틴어원의 contra(저항, 반대)와 연계 정리해 두시면 유용합니다. 어떤 유명인이 싫을 땐 안티팬(anti fãn)이라 합니다. 폭력(violência)에 대항한 anti-violência는 비폭력, 생명적(biotico)에 대항하는 anti-biotico는 항생제, 부패(corrupção)에 반대하는 anti-corrupção은 반부패운동, 열(febre)에 저항하는 약 antifebre는 해열제, 염증(inflame)에 대항하는 연고 antiflamin(안티플라민) 등등, 이런 어원의 영향으로 오랜 시간동안 변형되고 생략되어 사용된 형태로 a(부정, 반대), ab(반대) 등의 예로는, normal은 정상적, anormal는 비정상적이며, 아마존의 “amazon”은 가슴(mazon)이 없는(a) 여인이란 의미입니다.(참조, 옛 여성들이 사냥을 위해 가슴을 절단했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단어) ab의 예로는 usar은 사용하다인 반면 abusar은 남용, 오용하다 등등이 일상에서 확인되는 접두어들입니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2 Jul 2018 20:35:00 +0900
(칼럼)주님의 손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33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내 자신의 힘만으로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다면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잘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실패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삼상 2:6-7에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한다. 모든 사람의 죽고 사는 문제, 화와 복의 문제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의 인생도 역시 마찬가지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의 인생길을 도와주시는 도우심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세상인가? 온통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현실이다. 야베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환난이 있음을 깨달은 자였다. 그리고 환난을 당하면 그 환난을 인하여 근심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였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 4:10에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복을 받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받은 복을 잘 관리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아무리 복에 복을 더하여 받았어도, 지경을 넓게 해 주셨어도 그 복을 지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받은 복을 잘 유지해야 한다. 받은 복을 지키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으로 지켜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야베스는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야베스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손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복을 지켜주셔야만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그렇게 기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주시라고 기도한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큰 복, 많은 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많은 땅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그 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한 순간에 줄어들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환난을 당하고, 근심하는 지경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받았던 복이 사라지면 환난가운데 처하게 되고 환난 중에 처하면 근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생은 불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는 평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이 얼마나 귀한 은혜안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성도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주님의 손길을 바라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는 다는 사실이다.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죠지 뮬러는 “당신이 정기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주님의 손을 저에게 얹어 주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채워주십시오! 라고 기도한 때는 언제이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주님의 손의 도우심을 구하자. 도우심의 손을 힙 입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를 소원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2 Jul 2018 20:27: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슬럼프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32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지난 주말은 한인골퍼들이 활짝 웃었다. 남자골프 PGA 투어 그린브라이어 클래식 최종라운드에서 케빈 나 선수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생애 두 번째 우승이라고 한다. 위스컨신에서 열린 손베리 클릭 LPGA 클래식에서는 김세영 선수가 무려 31언더파로 여자골프 대기록을 세우며 챔피언에 올랐다. 한인 여성 골퍼들은 지금 세계의 골프장을 주름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년 월드컵에서 한국축구가 16강행은 좌절되었지만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완파한 것이 월드컵 최대 이변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한국인의 운동실력이 지구촌 여러 곳에서 빛을 내고 있다. 나라 크기에 비해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리디아 고 선수는 금년엔 고전하고 있는 것 같다. 미주 한인골퍼들이 얌전하고 공손하다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전인지 선수도 그렇다. 슬럼프인 것 같다.
 더 한 슬럼프도 있다. 대만에 청야니 선수가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LPGA는 ‘청야니 천하’였다. 나가는 대회 마다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한국 선수들은 왜 청야니만 보면 작아지는가?’란 비아냥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청야니의 이름조차 찾을 수 없다. 리더보드에는 물론이고 TV에도 모습이 없다. 대회에 나오긴 나오지만 계속 컷 탈락으로 중간에서 보따리를 싸기 때문이다. 슬럼프 때문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를 보자. 얼마나 잘했으면 ‘황제’가 되었을까? 그런데 그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슬럼프에 빠지더니 지금은 우승후보군에 접근하고는 있으나 아직 챔피언 트로피는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다. 골프 팬들은 그의 영광스러운 귀환을 기다리고 갤러리들이 구름떼처럼 그를 따라 다니지만 아직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 완전히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야구에서도 그렇다. LA 다저스는 에이스 좌완 투수 클레이튼 커쇼를 믿고 살아왔다. 그는 천하가 다 인정하는 지구에서 가장 볼을 잘 던지는 전설적인 투수였다. 그런데 금년에는 그 커쇼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잘못하다간 다른 선수들에게 제1선발 자리를 내 줘야 할 판이 되었다. 슬럼프인 것 같다. 슬럼프(Slump)란 평소 자신이 하는 일에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계속되는 증상을 말한다. 특히 운동선수들에게 자주 찾아드는 병이다.
 운동선수들에게만 슬럼프가 있을까? 아닌 것 같다. 보통사람들도 슬럼프에 빠진다. 나 같은 사람도 모든 걸 때려 치고 싶은 때가 있고 막연한 낙심으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해도 안 될 때 그 답답한 마음에 찾아드는 무기력증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 슬럼프를 극복하고 제2의 전성기를 맞는 사람도 있다. 프로야구 다저스의 맷 켐프라는 외야수다. 그는 다저스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한때 MVP를 넘보는 유명타자였으나 점점 실력이 부진하여 ‘애물단지’ ‘필요없는 선수’로 전락했다. 샌디에고 파드레스에 팔려가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로 방출되었다가 이번 시즌 다저스로 유턴해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방망이에 불이 붙었다. 단숨에 애물단지가 아니라 가장 귀하신 몸이 되었다. 유일하게 시즌 60타점을 앞두고 있는 타격기계로 변신했다. 이번주 13일부터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올스타전에 내셔날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낙점됐다. 슬럼프를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했냐고 물었더니 “죽어라 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인 슬럼프가 있다. 예배를 드려도 시큰둥, 성경을 읽어도, 찬양을 불러도 감동이 없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나 한 거야?” 그런 지경에 까지 이를 때도 있다. 꼭 의심마귀가 찾아든 것도 아닌데 모든 게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게 구라 투성이로 느껴진다. 이런 영적 슬럼프를 극복하고 필요 없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MVP로 맷 켐프처럼 부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죽어라 연습에 몰두한다? 구약에서 영적 슬럼프 하면 떠올리는 사람이 엘리야다.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올라가는 오늘날의 갈멜산에 오르면 거기 바알 선지자들을 박살낸 엘리야 선지자의 동상이 서있다. 손에는 칼, 그리고 그의 발밑에는 죽어가는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는 이방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 850여명을 박살낸 용기 있는 선지자요, 장사였다. 그런데 그 장렬한 빅토리와 함께 찾아온 아합의 왕비 이세벨의 살인협박에 그는 비굴한 도망자가 되어 저 멀리 브엘세바까지 도망치고 만다. 로뎀나무 밑에 얼굴을 쳐 박고 죽기를 원했던 엘리야는 전혀 바알신과 맞섰던 갈멜산의 엘리야가 아니었다. 나약하고 용기 없는 ‘필요 없는 선수’였다. 슬럼프였다. 그런데 천사를 시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의 머리맡에 준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 그리고 ‘일어나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갈멜산의 영웅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의 ‘쪼다’ 엘리야로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하는 영적 슬럼프, 그 고독하고 무기력한 터널을 벗어나는데도 결국은 하나님의 불에 구운 떡과 물 한병의 은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게 아닌가?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2 Jul 2018 20:26:00 +0900
(금주의 제언)기도의 창문을 열어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8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다니엘은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에 포로로 붙들려간 소년이다. 그는 국가도, 부모, 형제도 없었다. 이 불쌍한 소년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바벨론 나라의 총리까지 되었다. 총리가 되어서도 그는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다. 끊임없이, 언제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면서 늘 영적으로 깨어있었다.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바벨론 나라에서 모든 경쟁하는 사람들이 다니엘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사자 굴에 넣어 그를 넘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 믿고 기도했다. 어떤 위협을 받아도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한 결과 다니엘은 마침내 승리했다. 그는 모함을 받고 사자 굴에 던졌지만 굶주린 사자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다니엘을 삼킬 수가 없었다. 기도의 창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환란, 재난도 넘어뜨릴 수가 없다. 우리도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한다. 기도의 창문을 열어야 한다. 아무리 절망, 환란, 가난, 불행, 남이 알지 못하는 깊고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해결할 수 있다. 희망의 문, 성공의 문이 닫혀도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의 창문을 열고 기도하면 활짝 열린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어떤 실패와 깊은 절망의 함정에 빠질지라도 하나님이 건져주신다.
 미국에 벙커버스터라고 하는 신무기가 이라크전과 걸프전에 투입이 되었는데, 이 무기는 30m까지 그냥 지하로 뚫고 들어간다. 콘크리트를 아무리 하고 철폐해도 지하 벙커, 요새, 사령부까지 뚫고 들어가는 미사일 폭탄인데 이 미사일은 떨어져도 그 자리에서는 폭발이 안 되고 지하로 들어가면서 계속 뚫어가며 폭발한다. 찾아가는 유도장치가 되어있어 어디에 사람이 있는지 알고 그 지하를 향하여 이 미사일의 폭탄물이 계속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만든 무기도 이렇게 깊은 지하까지 뚫고 들어가는데, 우리 하나님의 능력의 손, 전능하신 손이 지하가 어디 있고 지상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손을 피할 수 있는 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창문을 여는 사람이 망하는 법은 없다. 우리는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도움을 받아야 할 줄로 믿는다. 여러분의 어려움은 모두 다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기도는 많이 할수록 좋다. 빅톨 위고는 “사랑이 지나친 법이 없듯이, 아무리 해도 기도가 지나친 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길이 잘되고 성공하고 승리하고 존귀하게 되는 길인 줄로 믿기 바란다.
 맥아더 장군은 항상 기도했다. 그의 옆에는 주기도문을 외우는 사병을 두어 늘 기도를 하도록 했다고 한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하루에 24번씩 기도했다”라고 그의 자서전에 썼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 세계적인 두뇌 에디슨, 베토벤 등은 기도를 많이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도하면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인공위성 전문가인 정재훈 박사는 “무슨 재미로 사는가?”라고 누군가가 물으면, “저녁이 되면 내일 아침 4시 반에 일어날 그 재미로, 그 기대로 잠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 박사는 “야~ 내일 아침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가서 기도의 창문을 연다”는 기쁨을 갖고 잠을 잔다는 것이다. 우리도 모두 이런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창문을 열기 바란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5 Jul 2018 05:40:00 +0900
(송정섭의 어원칼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5 송정섭집사2.jpg
송정섭 집사(한포사전 저자)
 
단어 하나를 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점이 하나 생기는 것입니다. 동시대를 살아냈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단어 하나에 어떤 의미를 담아냅니다. 그 단어들은 우리의 선배들이 경험했던 지식이나 느꼈던 감정이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진 결정체이자 유물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단어는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단순히 사전적 의미 만을 외운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포어 단어는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소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가능한 앞으로는 주입 및 암기식 단어 학습을 지양하고, 어원을 통한 이해와 납득, 그리고 공감이라는 과정을 통해 그 단어의 본질, 의미, 즉 속뜻을 느끼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미력하나마 본 칼럼을 통하여 서양어의 모태(격)인 라틴어와 그리스어, 로마어 등 일반적인 어원 백여 개 정도라도 우선 이해하여 정리해 두신다면, “암기”에서 “이해”로의 관점의 전환이 생길 것입니다.(자연히 암기의 필요성이 줄어들거나 없어질 것입니다) 때론, 급할 땐 암기도 활용할 수단이기는 하지만, 어두울 암(暗) 자와 기억할 기(記) 자로 이 어원은 “어두운 기억”으로서 의존할 만한 수단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디 언어 습관에서 “어”(말, 글, 단어 암기)의 공부보다 “언”(본질, 의미)의 공부로 전환되는 계기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일상의 용어들 중에는 단어 앞에 “de”나 “des”, “di”나 “dis” 같은 접두어로 된 단어들이 많습니다. 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주로 “반대”, “부정”, “제거”, “이탈” 등의 의미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커피숍 메뉴에 ① 까페(café)도 있고 데 까페(decafé)도 있는데, 이는 커피 속의 카페인을 제거해 달라는 뜻입니다. ② 독이라는 뜻의 톡스(tox, toxicação)라는 말 앞에 디(di)를 붙여서 디톡스(ditox)라 하면 해독, 즉 독성을 제거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어원으로 유래된 일상 용어들 몇개를 대조해 봅니다. ③ contar(계산하다)-descontar(계산 안한다, 즉 할인하다), ④ ligar(연결하다)-desligar(끊다), ⑤ emprego(취직, 고용)-desemprego(실업, 실직), ⑥ montar(조립하다)-desmontar(분해하다), ⑦ feito(만들어진 것)-defeito(잘못된 것, 하자가 있는 것).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5 Jul 2018 05:36:00 +0900
(칼럼)삶의 목적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1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이제 모내기가 거의 마무리 시점이다. 농부들이 열심히 모내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 귀한 모습이요, 또한 부지런한 것은 귀한 삶의 자세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열심히 살 것을 명령하셨다. 안식일 계명을 명령하실 때도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행하라고 노동 명령을 하셨다. 따라서 인생을 살아갈 때 게으르게 사는 것은 성도로써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잠6:6에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개미들이 부지런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다. 개미들은 작은 곤충이지만 그래서 두령도 없고, 간역자인 감독관도 없고, 주권자인 왕이 없어서 일을 시키는 대상이 없어도 여름 동안에 겨울에 먹을 것을 예비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양식을 모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피우는 게으른 자들에게, 개미한테 가서 배우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처럼 게으르게 살면 빈궁이 강도같이,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게 된다는 말씀이다. 경쟁사회에서 열심히, 부지런하게 살아도 힘든데 게으르게 살면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윌리엄 캠던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러므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살후3:10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고, 살전4:11에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삶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역시 열심을 다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롬12:11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고전15:58에 부활을 소망하는 성도들에게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삶을 살아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 그렇게 수고한 것들이 모두 기억되고, 상급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오죽하면 계2:10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시겠는가? 그 말씀은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열심을 다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렇다면 그렇게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열심히, 부지런히  모내기를 해서 풍년의 축복을 얻어서, 그 축복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누리기 위한 것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역시 그러한 수고는 진정한 의미의 수고와 열심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목적이 단지 이 세상에서 성공 자가 되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한 것에만 국한 된다면 그 삶은 그렇게 의미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다 잠시 누리는 이 세상 것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만 위해서 인생을 살라고 우리를 세상에서 살게 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진정한 삶의 이유,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 인생이 헛되지 않고, 의미 있고, 보람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롬14:8에 성도인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그리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성도인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주님을 위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그 인생의 소유권이 예수님이시다. 주인이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성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삶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소원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5 Jul 2018 05:30:00 +0900
(조각글)마지막까지 남아야 할 말씀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10 이정근.jpg
이정근 목사(미성대 명예총장)
 
성경암송대회 개최한다는 말을 요즈음에는 자주 듣지 못했다. 30년 전만 해도 교회에서는 성경암송대회가 자주 있었다. 개인별 암송대회는 물론 구역별/속회별 암송대회, 기관별 암송대회, 교회별 암송대회, 노회별/지방회별 암송대회....그러다가 전국성경암송대회도 열렸었다. 게다가 기독교 종주국이었던 영국이나 미국도 마찬가지로 암송열기가 매우 뜨거웠다. 성경을 외우는 분량도 무척 많았다. 성경66권 가운데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 혹은 로마서나 요한계시록 전체를 외우는 암송왕과 암송여왕들이 탄생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암송대회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교육학자들의 연구로는 성경암송을 많이 했다고 믿음이 정비례로 성장하지는 않는단다. 그래서 학교교육에서도 단편적 지식 외우기가 빠르게 사라져 가고 있다. 그 대신 체계적 이해를 더 강조한다. 그렇더라도 성경암송을 그만둘 일이 아니다. 집사시절부터 교회에서도 신학대학 채플에서도 설교를 해 왔던 필자도 되도록 성경본문과 함께 다른 요절들을 외워가며 말씀을 풀어왔다. 그런데 점점 더 어려워진다. 기억력이 감퇴 때문이다. 게다가 이민목회에서는 한국말과 영어, 또 되도록 성경원어로도 열쇠구절(key verse)을 외워야 한다. 암송부담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또 있다. 세대가 갈수록 책을 읽지 않는다. 인류문명이 책과 신문 같은 글자매체에서 라디오 같은 전파매체로 옮겨지더니, 다시 텔비(TV) 같은 영상매체로 무섭게 바뀌고 있다. 그래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교육의 기본이라고 강조되고는 있지만 그 목소리가 별로 우렁차지는 않다. 그렇다면 성경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예배시간에 성경책 대신 손전화를 들고 있는 신자들이 한 주일이 멀다 하고 늘어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면 전화기에 수신기 끼고 설교 시간에 그 교회 목사가 아닌 다른 교회 유명 목사의 설교를 듣는 일도 생길 법하게 되었다. 그걸 또 무슨 수로 막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앞으로 책이 지구 위에서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렇게 되면 성경책도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전자성경책이 성경말씀을 오래도록 보관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앞으로는 성경말씀 외우기도 없어지고, 책으로 출판하여 보관하는 일도 없어지고, 전자책은 배터리나 전기가 없어지면 아무짝에 쓸모없게 되고.... 이러다가 온 인류가 성경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신경과민일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8)고 했으니 공연한 걱정이길 바란다. 허지만 만의 하나, 성경책이 전부 없어질 것에 대비해야 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성경의 대표적 말씀이라도 꼭 외워두어야 한다. 그런 대표적 말씀들이 무엇일까. 십계명일까, 사랑대명일까, 아니면 선교대명일까. 그런 것보다도 단연 요한복음 3장 16절일 것 같다. 그 말씀이 성경 전체의 진리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소리로 또 한 번 외쳐며 풀어 읽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자신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죽음으로 멸망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5 Jul 2018 05:29: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스타벅스에게 한 수 배운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09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스타벅스 커피는 내 입맛이 아니다. 내 수준엔 맥도날드의 시니어 커피가 딱 제격이다. 달랑 1달러만 줘도 거스름돈을 돌려받는다. 그게 귀찮으면 지갑에서 크레딧 카드를 꺼내 단말기에 슬쩍 찔러주면 단칼에 해결이다. 좀 찐하다 싶으면 뜨거운 물 한 컵을 주문한다. 그건 공짜다. 그런데 스타벅스에 가면 긴 줄에 숨어서 청승맞게 서 있는 것도 그렇고 관공서도 아닌데 이름까지 물어보고 난리를 친다. 맥도날드에선 주문 번호표를 주지만 스타벅스에선 꼭 이름을 묻는다. 이것도 상술인가? 그러나 내 고상한 이름 석자를 아무데나 흘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다. 더구나 나의 퍼스트네임을 ‘명환’이라고 말해주면 그걸 알아먹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냥 명(Myung)이라고 말하면 컵에 써서 나오는 내 이름은 멍(Mung), 고집불통 창녕 조씨 가문인 것은 당연히 알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알아듣기 쉬우라고 조(Cho)라고 말하면 Joe라고 써준다. Joe에다 GI를 붙이면 미군병사가 되고 조셉의 애칭을 Joe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보통 ‘형씨’로 통하는 말이 Joe라는 말이다. 커피 한잔 사먹으려다 내 이름이 보통 고생을 하는 게 아니다. 커피 한잔 오더하는 그 복잡한 절차가 내 속을 뒤집을 때가 많아서 스타벅스는 노댕큐다. 그래서 난 죽으나 사나 맥도날드 커피다. 근데 스타벅스 기피 이유는 또 있다. 가격 때문이다. 보통 커피 한잔 값이 짜장면 한 그릇과 거의 맞먹는다. 난 돈이 아까워서도 안간다. 그런데 맥도날드를 옆에 두고 왜 스타벅스에 가서 돈을 버리며 멍청한 짓을 하느냐고 흉을 보고 싶을 때가 있지만 난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스타벅스에 대한 그런 촌스러운 편견을 버리게 되었다.
 유럽 어느 곳에 가던지 스타벅스는 있다. 종교개혁 발상지 여행단을 이끌고 매년 체코에 갈 때 난 프라하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 점을 빼놓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유럽에선 어딜 가던지 공중화장실에서 돈을 받는다. 참 인심 야박하다는 말이 나올법하다. 그러나 또 그 쪽에서도 할 말은 있다. 늘 깨끗한 공중화장실은 그 만한 대가를 지불할 때 유지된다는 이론이다. 또 하나는 화장실 청소를 해서라도 직업을 유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차원이라는 말도 한다. 그러나 호주머니엔 달러화 혹은 유로화 고액권을 고깃고깃 깊은 곳에 보관하고 다니는 여행자들이 동전을 바꾸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가격도 잘 모르는 물건을 억지춘향으로 구매해야 하는 일은 참으로 불편한 일중의 하나다. 그런데 스타벅스에 가면 화장실이 공짜다. 과연 미국기업답다. 그래서 그곳은 내 단골이 되었다. 프라하 구 시청 앞 광장, 매 시간마다 정시가 되면 예수님의 12사도가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등장하여 뺑뺑 돌아가는 그 유명한 프라하의 천문 시계탑 맞은편에 스타벅스가 있다. 미국에서 온 우리는 그곳에 공짜 화장실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스타벅스 간판을 보기만 해도 안도감이 생긴다. 고향집을 찾은 기분이다. 그런데 프라하는 우리들의 긴 유럽 여행 마지막 날이기에 대개 한나절 정도의 자유시간을 준다. 그럼 체코 기념품 제1호인 보헤미안 크리스털이나 가넷 석류석이 즐비한 선물가게 골목으로 가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스타벅스에 죽 치고 앉아있기가 일쑤다. 거의 3~4시간을 여행객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어도 아무 눈치를 주지 않는 친절한 스타벅스, 화장실도 공짜에 자릿세를 요구하지 않는 이런 가게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커피를 더 마시라고 강요하는 법도 없다. 정말 신사적인 스타벅스. 그러니까 제품을 팔아서 이문을 남기겠다는 계산을 앞세우지 않고 넉넉한 공간을 제공해 주겠다는 아이디어를 기업이념으로 삼고 시작한 커피장사... 그게 사람들의 마음에 적중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혼자 사는 싱글족이나 독거노인들이 계속 늘어나는 우리 사회속에서 혼자가 전혀 불편하거나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는 공간... 와이파이 빵빵하게 터지고 벽에 사시꼬미도 많아서 셀폰을 충전해서 카톡을 주고받기에 안성맞춤인 곳... 노트북이나 셀 폰 하나만으로도 하루종일 즐거운 공간... 그래서 스타벅스는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나 보다. 스타벅스는 세계 어느 곳에나 있다. 현재 65개국에 2만 3천여 개의 매점을 운영하고 있으니 세계에서 가장 큰 다국적 커피 전문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게 있다. 한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에도 무려 1,180개의 스타벅스 매장이 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게 있다. 현재 인구 900여만 명인 서울의 스타벅스 매장수가 460여개인데 이는 미국 맨하탄을 포함한 인구 800만 명의 뉴욕 시 전체의 매장수 361개보다 100개가 더 많다는 것이다. 뉴욕시보다 더 많은 스타벅스가 서울시에? 믿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울은 스타벅스 천국이다. 결국 스타벅스는 한국에서 돈을 바가지를 쓸어 오는 셈이다. 1971년 시애틀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의 하워드 슐츠가 회장으로 일하면서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동성연애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라 복음주의 권에선 은근히 미움을 사고 있지만 그의 장사철학으로 스타벅스가 대박을 터트린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사람을 꼬이게 하는데 그런 천재적인 철학이라면 이걸 우리들의 교회에다 적용하여 써 먹을 수 있는 건 어디 없을까? 주문한 종이 컵에 이름을 적어주고, 혼자라도 너무 자유로운 공간, 왼 종일을 죽치고 있어도 눈치한번 주지 않는 너그러운 상술,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문화를 판다는 비즈니스 전략 등을 벤치마킹 할 수 있다면 무슨 그려지는 그림이 있을 성 싶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5 Jul 2018 05:28:00 +0900
(1心 칼럼)손목에 생기는 물혹(결절종)은 초기에 쉽게 없앨 수 있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301 손목.jpg
 
보통 남성보다는 여성분에게 손목 관절 주위 부분의 물혹이 많이 생기는데 이 물혹을 다른 말로 결절종이라고 부른다. 손목에 생기는 결절종은 여성분들에게서 많이 보았고, 무릎 쪽에서 생기는 것은 남성분들에게서 더 많이 보았다. 아무래도 여성분이 가사노동을 많이 하면서 손목 관절을 많이 쓰시고, 남성 분들은 운동 때문에...
 여기서 오늘은 손목에 생기는 물혹(결절종)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대부분 초기에 생긴 물혹(결절종)에는 통증이 거의 없다. 그러나 물혹이 시간이 지나면서 물혹을 싸고 있는 막의 두께가 단단해지고 크기도 커져가면서 신경부위를 압박하는 경우가 생겨 간혹 아프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있다.  사람마다 다 틀리긴 하다. 물혹이 생기는 초기에는 막이 상당히 얇고 크기도 작기때문에 지름이 1cm 또는 2cm 미만의 크기는 간단한 압박만으로도 물혹을 터뜨려 흡수되게 하면 된다. 간혹 한 두번 재발하는 경우도 있는데 몇 차례 초기에 없애주면 더 이상 생기지 않는 분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막의 두께가 굵어지고 크기가 커져 압박을 통해 터뜨리려면 약간의 통증이 수반되기에 수술을 요하기도 한다.
 한 명의 여성이 내원하였다. “선생님! 손목에 뭐가 생겼어요?”, “뭐요?” 손목을 보니 물혹이었는데 1,5cm... “언제 생겼어요?” 묻는척하며 물혹을 터뜨렸다. 그리고서는 “집에 가보세요”했더니 “왜요? 치료 못해요?”하신다. “벌써 없으니까 가보세요”했더니 놀라서 “어? 어디갔지... 없어졌네?”하시며 좋아하며 가셨다. 여기서 어떻게 터뜨려야 하는가는 그 사람의 내공에 달리긴 했지만, 물혹이 생긴 바로 아래에 양 엄지 손가락을 모아 살짝 압력을 가하면서 물혹을 위로 밀면 된다. 아래에서 엄지로 누른 상태에서 위로 밀면서 순간적으로 탁! 터뜨려야 한다. 간혹 물혹 껍질이 두꺼울 때는 여러번 해야 터지는 경우도 있는데, 막이 너무 두꺼워서 안될 때는 포기하라. 괜히 환자만 아파한다.
 물혹이 크고 두꺼워서 터뜨리기가 쉽지 않은 경우 한방 치료로도 없앨 수도 있지만, 크기에 따라 여러차례의 치료가 필요하다. 한방의 치료는 물혹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면서 사라지게 되는데, 환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간단하게 한 번의 수술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와 같이 여성의 유방의 종양도 한방치료로 가능하다. 악성 종양이 아니고 또 수술을 무서워 하시는 분이라면 한방 치료로 종양이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 경우도 종양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사라진다.
 손목주위의 물혹이 초기에는 집에서도 간단히 밀어 터뜨릴 수 있다는 것만 아셔도 걱정과 근심이 줄고 시간과 금전까지 절약할 수 있기에 이 글을 쓴다.

1心(한의사)
[출처:www.koreabrazil.net]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8 Jun 2018 05:57:00 +0900
(칼럼)삶의 이력서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95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며칠 전 6.13 지방선거를 실시하여 당선자를 결정했다. 당선된 도백들, 의원들이 지역과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공약들을 잘 이행하므로 살기 좋은 지역, 나라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선거에 임하면서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의 선거 공보 물을 살펴보게 되었다. 공보 물을 살펴보면, 후보자들의 모든 삶의 이력들을 공개하고 있다. 후보의 학력, 재산 형태, 세금 납부 사실,  심지어 전과 기록까지 낱낱이 공개하고 있음을 본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존중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후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떤 후보자는 전과 기록이 깨끗한데 어떤 후보자는 전과 기록이 몇 가지나 기록이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전과 기록이 있는지는 그 내막을 자세히 모르지만 이왕이면 전과 기록이  깨끗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람인지라 실수로 인하여,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후보자로서 덕스러운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그러한 내용을 밝히면서 후회했을 것이다. 그런대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성도인 우리는 더더욱 바른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서도 법을 어긴 사실에 대하여 기록이 남아 있다면 하물며 심판장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의 삶에 대하여는 어떻게 되겠는가? 당연히 우리의 삶에 대하여 기록된 책들에 의해 판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계20:12절에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삶, 행동들이 기록된 것에 의해 심판을 받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국가에서도 모든 범법자들의 범법사실을 기록해 놓듯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하여 책에 기록을 해놓고 그 기록을 근거로 판단을 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겠는가?
당연히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떤 내용들이 그 책에 기록이 되어야  하겠는가? 당연히 좋은 내용만, 선한 내용만 기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후보들처럼 세상 법에서도 범죄라고 심판을 받은 범죄사실이 아니라 우리는 선한 일, 착한 일, 귀한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대한 내용들이 기록이 되어 있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죄목들이 기록되어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므로 바른 삶을 살아야 함이 당연하다. 특별히 하나님 말씀 앞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이 성도인 우리의 삶의 법칙, 규칙이다. 법대로 사는 것이 바른 삶인 것이요. 선한 삶인 것이다.
 심판 날,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법에 어긋나면 범죄사실로 인정을 받아 법의 심판을 받아서 그 사실이 전과 기록으로 남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은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마음까지도 판단의 기준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생각을 통촉하시는 분이시다. 사람의 마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까지도 아시고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까지도 다 기록하시고 그 기록된 대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의 상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말까지도 심판 날에 판단을 받음을 알아야한다. 마12:36-3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한다.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 기록된 대로 판단을 받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삶의 행적이 기록되어야 하겠는가? 상 받기에 합당한 삶의 이력서를 채워가기를 소원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8 Jun 2018 05:49: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역풍 맞는 ‘무관용’ 이민정책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94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지난 2004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인도양 지진해일, 즉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그 엄청난 재난현장을 서슴없이 찾아갔던 클린턴 전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9.1규모의 해저지진이 일어나 그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다. 사망자만 무려 23만 명. 재난 발생 직후 구호품을 싣고 미국의 전직 두 대통령이 그곳을 찾아간 것이다. 난 그때 “미국이란 나라는 이래서 위대하구나!”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한창 경제대국으로 떠오르겠다는 중국은 찔끔 긴급 구호비 몇 푼을 건네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덩치 값도 못한다며 ‘짱꼴라’ 소리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일본이나 다른 서방국가들도 비슷했다. 그런데 미국은 전직 대통령, 그것도 하나는 민주당, 하나는 공화당 소속이지만 정당은 달라도 불행을 만난 이웃나라를 돕는다는 마음에는 금방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재난현장에 달려가서 팔을 걷어 부치고 둘이 함께 복구작업에 힘을 보탰다. 그 두 전직대통령이 보여준 미국의 가치는 인종, 국경, 종교를 초월하여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촌의 불행엔 마음과 행동으로 함께 하겠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상한 미국의 가치는 어디다 팔아먹고 ‘아메리카 퍼스트’만 고집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출몰했던 강도로 변한 아메리카를 보는듯하여 나는 지금 화가 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미국의 무관용 이민정책이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에서 밀입국자들을 체포하는 것은 법이라고 하자. 그런데 그 밀입국자들과 함께 국경을 넘다 체포된 자녀들을 격리수용하는데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지난 4월부터 5월에 이르는 6주간 동안 미국의 국토안보부가 거의 2,000명의 밀입국 아동들을 임시보호소 등에 보낸 것으로 집계되었고 그 가운데 100명 이상이 4세 이하라고 알려졌다. 밀입국한 부모들이 법을 어긴 것은 분명하지만 부모 손을 잡고 국경을 넘은 이 철없는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부모와 생이별을 시켜 임시보호소에 격리시켜야 한단 말인가?
 여북했으면 생존해 있는 퍼스트레이디 전원이 벌떼 같이 일어나서 이 무자비한 무관용 이민정책을 비판하고 나섰다. 최연장자인 지미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잘린 여사는 성명을 내고 “가족을 분리하는 이 정책이 국가의 수치이자 망신”이라고 비판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부인인 로라 여사는 “무관용 정책은 잔인하다”고 했고,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인 미셸 여사도 로라 여사의 글을 리트윗하면서 “때때로 진실은 정당을 초월한다”며 지지를 보냈다.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인 클린턴 전 장관도 “백악관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당이 제정한 법 때문이 아니다”며 “가족 격리는 법에 정해져 있지 않다. 완전히 거짓”이라며 트럼프 행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놀라운 것은 멜라니아 여사까지 남편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는 점이다. 특히 로라 여사의 성명은 신실한 믿음의 여성답다. “미국인은 미국이 윤리적 국가이고, 자연재해나 기근·전쟁 등에 의해 황폐화한 지역에 인도적 구호를 보내는 나라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다. 또 사람은 피부색이 아닌 인격의 내용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데 자부심을 가진다”며 “우리가 진정 그러한 나라라면 이들 억류된 아동을 부모와 재결합시키는 게 의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동들을 사막의 텐트촌에 수용한다는 것은 미국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일의 하나였던 2차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의 포로수용소를 떠 올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판국에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이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정부가 만든 법에 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아동격리정책을 강변하다가 호되게 역풍을 맞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성경구절을 자기 호신용으로 여기저기 끌어다 잘못인용하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사례를 또 남겨준 꼴이 되었다.
 아무리 불법이민을 막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이웃나라에 대한 예의도 챙겨야지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한다고 했을 때 멕시코나 중미국가들의 구겨진 체면과 국가 자존심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이번엔 밀입국자들의 부모와 아이들의 생이별 격리정책이라니... 부모와 생이별 후 울부짖는 온두라스에서 온 두 살배기 어린아이의 음성파일이 SNS를 통해 전국에 전파되면서 미국의 부모들이 울분을 토하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미국이란 나라에서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조상들이 언제 인디언들로부터 합법적인 비자 받고 입국했던가? 조상들 역시 밀입국자인 주제에 오늘날 밀입국자 어린 자녀들의 가슴에 이렇게 큰 대못을 박다가는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몰래 숨어 있는 강도가 아니라 강도 만난 이를 여관으로 끌고 가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미국의 정체성이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8 Jun 2018 05:47:00 +0900
(금주의 제언)친절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자본이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80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은 인정도 많고 예의도 바르고 매우 친절한 종족이다. 항해 중 풍랑을 만나 죽을 수 밖에 없던 바울과 선원들 일행이 멜리데 섬에 무사히 상륙하여 토인들로부터 영접을 받고 특히 바울은 멜리데 섬의 최고지도자인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로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고쳐줌으로써 더욱 친절과 우대를 받았다. 친절한 사람치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미국 LA 근교의 한 식당은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댔다. 음식 맛이 특별하거나 값이 싼 것도 아니었다. 이 음식점의 최대 장점은 ‘친절’이었다. 식당 입구에는 ‘손님은 왕’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또 남자 화장실에는 ‘왕(king)’, 여자 화장실에는 ‘여왕(queen)’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손님들은 고객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식당 측의 친절에 감동해 한다. 친절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자본이다. 식당이 잘되다가도 망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 원인은 대개 종업원들이 불친절하거나 주인이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친절히 맞아 주는 인사가 없는 교회는 결코 부흥할 수가 없다. 교회당 문간에서 안내를 하는 장로, 권사, 집사들이 교회에 예배하러 오는 이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인사하며 영접하는 교회는 반드시 부흥하게 된다.
 한 가정에 어느 날 생일을 맞은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신발 가게에 들어섰다. 한참 뒤 아들은 마음에 드는 구두를 하나 골랐다. “이 구두 얼마요?”, “삼만 오천원입니다” 점원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서 껌을 짝짝 씹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버지는 그 점원을 힐끗 쳐다보더니 아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그 구두 벗어라. 얼른 여기서 나가자”, “왜 그러세요? 아버지, 전 이 구두가 마음에 드는데요”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아들도 할 수 없이 아버지를 뒤따라 나왔다. 이어 다음 골목에 있는 다른 구두 가게에 들어갔는데 다행히도 아들이 원하는 모양과 똑같은 구두가 있었다. “그 신발이 마음에 드시나 보죠? 안목이 꽤 높으시군요” 어느새 다가온 점원은 어린 학생인데도 존대를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격은 삼만 오천원입니다. 신발에 이상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꾸어 드리겠습니다” 점원의 친절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지켜보던 아버지는 흥정도 하지 않고 구두 값 삼만 오천원을 내고 아들에게 구두를 사 주었다.
 우리는 무심코 불친절함으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아야겠다. 친절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지 미소 짓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고 예의바른 것이다. 빨리 성공을 원하거든 친절하라. 빨리 망하는 길은 불친절밖에 없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친절은 돈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자본이다. 언제 어디서나 친절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성도들 되기 바란다. 작은 친절이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 친절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자본이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1 Jun 2018 02:26:00 +0900
(칼럼)함께 하시는 인생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73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다. 고사성어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종류끼리 함께한다는 말이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다.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슷한 사람끼리 살면 그 수준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 삶에 만족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복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것이다. 시대를 보면 능력 있는 사람 옆에서 동고동락하다가 그 사람이 어떤 큰 힘,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의 배려에 의해 어떤 힘을 소유하고 함께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처럼 힘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은 평상시 힘을 가지고 있던 사람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사람의 힘을 통해서 자신도 그러한 힘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힘 있는 자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승리하는 비결인 것이다.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요셉이 바로 그러한 주인공이다. 요셉이 소년시절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지는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덩이에서 지켜주셔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그를 구덩이에서 건져주셨다. 그리고 형들에 의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데 그런 요셉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그 결과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가? 노예 신분은 형통할 수가 없는 신분이다. 짐승처럼 돈에 팔려온 신분이다. 그런데 그런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주인 보디발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주인 보디발은 자신이 돈을 주고 사온 종을 살펴보니까 범상한 종이 아니었다. 그 종의 생활을 살펴보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셉이 하는 모든 일들이 형통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의 집안 모든 살림을 요셉에게 위임한 것이다. 그리고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 죄수의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감옥에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감옥에 있던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어 전옥에게 신임을 받고 감옥에서 제반 사무를 보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다. 그 후에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므로 일약 애굽의 총리로 발탁이 되었다.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도 총리로서의 직무를 잘 감당하므로 인정을 받고 영광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어떤 상황, 처지에 있어도 형통케 되는 복을 받게 된다. 노예로 있어도 형통, 죄수로 지내도 형통, 총리가 되어도 형통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사람의 힘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형통한 삶을 살려고 해도 마음대로 안 된다. 마음대로 된다면 어느 누가 불통한 인생을 살겠는가?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서 함께 하시면 형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어떤 자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므로 함께 하시는 복된 주인공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1 Jun 2018 02:15: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북미공동합의문 제4항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72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는 걸 무슨 ‘세기의 담판’이라느니 떠들어 대던 싱가포르 회담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트럼프가 캐나다에서 열린 G7정상회담은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싱가포르로 달려가게 한 것도 그렇고 무려 8백여 명의 외신 기자들이 싱가포르에 바글댔다고 하니 확실히 핵이 세긴 센 모양이다. CNN의 간판앵커 앤더슨 쿠퍼가 아주 싱가포르에 둥지를 틀고 보도를 하는 등 BBC, NHK 등 세계의 뉴스전문채널들도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허둥대는 모습이 TV를 통해 세계로 전파되었다. 사실 몇 달 전만 해도 김정은을 ‘로켓맨’으로 불러대며 야유를 하고 북한이 고분고분 말을 안들으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고 겁을 주던 트럼프가 덩치 값도 못하고 김정은이에게 아부라도 하듯이 바짝 몸을 낮추고 싱가포르 회담에 기어들어가는 모양새를 보인 것을 보면 확실히 핵이 세다는 것을 그대로 입증해 준다. 천하의 트럼트가 핵이 없는 김정은에게 그리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회담이 끝나자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일방적인 판정승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한걸음 더 나아가 트럼프의 완패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 언급도 없고 더구나 미국이 집요하게 요구할 듯 하던 CVID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 마당에 한미연합훈련은 중단하겠다고 후한 선물만 안겨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미주 한인들 중에서도 트럼프가 대한민국을 팔아먹었다고 흥분하는 이들도 보았다. 트럼프가 러시아 커넥션에다 여성스캔들 등등 국내정치에서 코너로 밀려 날수록 민주당이란 적진을 향해 정치적 성공펀치를 한방 날리고 싶은 심정 때문에 김정은에게 저자세로 다가갔다고 진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별 묘안이 있었을까?
 핵 단추를 자꾸 만지작거리는 어린 독재자를 어르고 달래야지 그럼 정말 항공모함 들이대고 미사일을 퍼부어 전쟁을 치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겉모습을 놓고 보면 트럼프는 하염없이 올라간 키다리 아저씨다. 김정은은 배불뚝이 뚱보다. 한번 위에서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왜 없었을까? 그런데 그 뚱보에겐 핵이 있지 않은가? 연배로 따져보자. 트럼프는 금년 71세, 김정은은 35세다. 아들 뻘이다. 어디 어른에게 대드냐고 한참 혼내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을까? 자존심을 내려놓고 ‘체어맨 김’이라고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그를 정상적인 국가원수로 체면을 세워줘야 하는 트럼프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대가 대포로 친척을 죽이는 잔인한 독재자, 독극물로 형제를 죽이는 무자비한 킬러인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숙이고 들어갔다. 왜 그랬을까? 그래도 전쟁보다는 그게 더 선량한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70년간의 반목을 접고 우선 미국과 북한의 지도자가 악수를 하면서 만남을 가졌다는 것 자체를 역사의 놀라운 진전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정은이 핵을 버릴테니 자신들의 체제를 보장해달라고 주문했지만 그가 지금 체제를 보존하던지 벗어나던지 간에 이번을 계기로 어느 땐가는 악의 축, 테러지원국, 독재자의 탈을 벗고 정정당당한 정치지도자로 변신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보고 싶다.
 그건 그렇고 이번 북미회담 공동 합의문 전문을 읽어가는 중에 나는 느닷없이 합의문 제4항이 마음에 꽂혀오는 걸 느꼈다. 제4번은 “미국과 북한은 신원이 확인된 유해의 즉각적인 송환을 비롯한 전쟁포로와 실종자(POW/MIA) 유해 발굴 및 수습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는 내용이었다. 북한의 핵을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깨질 뻔하던 회담도 다시 성사시켜 어렵사리 싱가포르까지 가서 공동 합의문을 도출해 냈으니 설사 비핵화 합의가 말짱 뻥이 되고 결국은 트럼프와 김정은 공동주연의 리얼리티 쇼로 끝난 것인지는 조금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그 총성 없는 혈투처럼 벌이진 북미 회담도중에 갑자기 전쟁포로와 실종자 유해를 돌려달라고 주장한 이 나라 미국의 자기 식구 챙기기는 얼마나 감동적이란 말인가?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간 전사자나 전쟁포로를 절대로 그냥 버려두지 않겠다는 아메리카를 조국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훈장같은 자긍심을 심어줄 만한 일이다. 자국민이 적국에 억류되었을 경우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침내 구출해 오는 경우를 우리는 여러번 목격했다. 국무장관까지 동원되곤 했다. 죽은 웜비어 때도 그랬고 지난달 김학송 목사 등 한국계 미국인 3명을 북한에서 빼 올 때도 그랬다. 국민 한사람의 가치와 생명을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세기의 담판이란 북미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과감하게 들고 나온 미국의 인도주의는 과분하게 칭찬받아도 좋을 듯하다. 그런데 자국민만 챙기지 말고 북한의 인권문제까지 합의문에 들고 나왔더라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었다는 냉혹한 비판은 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1 Jun 2018 02:14:00 +0900
(금주의 제언)성도는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62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제자 된 성도는 항상 진실하고 정직함이 생활의 기본자세이다. 진실은 우리의 속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정직은 진실한 마음을 외부로 나타나는 행동으로서 말과 행실로 마음과 생각을 표현한 것이며 무슨 일이나 바르고 공평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진실과 정직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고 거짓과 불의와 불공정은 마귀 사탄의 속성을 나타낸다. 성도들의 인격과 신앙의 기초도 진실과 정직이라야 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무한히 진실하시고 정직하시니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성도들도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진실이 있는가를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이 진실한가, 거짓되었는가, 언행이 정직한가, 아니면 불의하고 사악한가를 보신다.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 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누가 묻기를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 얻는 대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그는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아버지가 폴란드의 산림지역을 지나 고향인 실래시아로 가는 도중에 강도들을 만나 모든 물건을 빼앗기고 나서 강도가 “이것이 전부요?” 하니 “예, 전부요.” 하고 나서 강도들이 돌아가는데 옷자락 끝에 딱딱한 것이 만져져서 무엇인가 했더니 숨겨둔 금덩어리였다. 그는 돌아가는 강도들을 다시 불러서 그 금덩어리를 내어주니까 아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빼앗았던 것까지 되돌려 주고 가더란다. 진실과 정직만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사람은 겉과 속이 같아야 되고, 처음과 나중이 같아야 되고, 첫인상과 후인상이 같아야 되고, 남이 보거나 안 보거나 같아야 되고, 가난할 때나 부할 때나 같아야 되고, 집사 때나 장로 때나 변질되지 않고 항상 같은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교인 중에도 처음에는 친절하고 싹싹하게 대접도 잘하는 것 같아도 얼마 안가서 배신한 사람이 많다.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려면 약속을 잘 지켜야 한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며 약속의 책이다. 하나님은 언약을 이행하시는 분이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과의 약속도 잘 지키고 사람과의 약속도 잘 지켜야 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아야 한다. 불가항력적인 일 외에는 어떤 손해가 와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예배 시간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으로 서원하고 약속한 것이 있으면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진실하고 정직하지 못한 신앙은 가짜 신앙이다. 딤전 1:19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다. 양심을 버리고 진실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배가 암초에 부딪혀 깨져 버린 것처럼 그 믿음은 깨져 버렸단 말이다. 사탄 마귀의 역사에는 꼭 거짓이 따라다닌다. 마귀는 거짓의 영이라고 했다. 요 8:44에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다. 진실과 정직이 없는 교인들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이단과 거짓 교사, 그들의 모임에 빠진다. 6.25 전쟁 당시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갈 때 영국의 애틀리 총리는 미국과 중국을 화해시키려고 했다. 그때에 정직하고 우직하고 소박한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한국에 머물 것이고 싸울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을 버리면 한국인들은 모두 살해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편에서 용감히 싸웠습니다. 우리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친구를 버리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의 정직하고 우직하고 소박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4 Jun 2018 03:41:00 +0900
(칼럼)가장 좋은 것을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56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요즘 농부들은 열심히 모내기를 하고 있다. 수고한 만큼 풍년의 축복이 풍성하게 임하기를 소원한다.
 농부들은 올해도 모내기를 하면서 아마도 가장 좋은 볍씨 품종을 준비하여 모를 길러서 모내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일들이 귀찮고 번거로우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종자를 선택해서 모내기를 하는  농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확인해서 나름대로 가장 좋은 품종을 결정하여 준비하고 모를 길러서 모내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좋은 씨앗을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들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을 알기 때문이다. 벼농사만이 아니라 모든 농사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농사에만 적용되는 원리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사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공의 인생을 살려면 역시 성공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좋은 것을 열심히 심어야 한다. 성공의 씨앗을 심지 아니하고는 성공의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성공의 열매를 거둔 사람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성공을 위한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열매를 거둔 것이다. 심지 않고 성공의 열매를 거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6.13 지방 선거를 앞에 두고 있다. 선거에서 그동안 열심히 지역을 위해서 씨앗을 뿌린 후보가 당선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선거에 출마했다고 모두 당선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당선의 씨앗을 심은 후보가 당선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에도 이와 같은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원리는 더 정확하게 적용이 된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을 거두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거두게 되어 있다. 그리고 심은 양에 따라서 심은 만큼 거두게 되어있다. 만약에 이러한 원리에 어긋나면 하나님께서 만홀히 여김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절대로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정확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것을 거두기 위해서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그리고 힘들어도 심을 수 있는 한 많이 심어야 한다. 그래야 많이 거두기 때문이다. 심는 것은 허비, 낭비와 같다. 심는 것은 좋은 씨앗을 버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씨앗은 썩어서 없어진다. 그러므로 씨앗 자체만 보면 낭비와 같다. 그래서 아까울 수 있다. 그러나 아깝다고 그 씨앗을 파종하지 아니하면 거둘 것이 없다. 낭비와 같아도 뿌려야 한다. 아까워하지 말고 심어야 한다. 그래야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원리는 더더욱 그렇다. 좋은 것을 심어야 한다. 좋은 것을 심으려면 그냥 쉽게 심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고와 헌신이 요구된다.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정성이 들어가야 하고 물질이 투자되어야 한다.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적인 파종의 삶도, 수고와 땀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파종할 수 없다. 주님과, 주님의 나라와, 교회와, 복음과,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삶, 충성하는 삶,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것들이 영적인 삶에 좋은 씨앗을 심는 삶인 것이다. 그와 같이 귀한 것, 좋은 것을 심는 자에게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다.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도 백배를 받는다고 약속하신다. 주님을 위해 버린다는 것은, 헌신한다는 것이다. 충성의 씨앗을 심는다는 의미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백배의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겠는가? 바로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자를 축복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축복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의 씨앗을 심고, 주님을 위해 충성, 봉사, 헌신의 씨앗을 심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행의 씨앗을 많이 심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4 Jun 2018 03:33: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디지털 장의사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55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요즘 한국에서 생겨나는 신종 비즈니스 가운데 하나가 ‘디지털 장의사’라고 한다. 뭐요? 디지털 장의사? 장의사는 알겠는데 디지털 장의사란 말은 처음 듣겠네... 미국에서 코 박고 이민생활에 열중하고 사는 우리네에게 좀 생소한 말이라서 대부분은 그런 반응을 보일 듯하다. 그런데 느껴지는 게 있긴 하다. 인터넷상에서 떠돌아다니는 자신에 관련된 부정적인 기록들을 완전 삭제시키는 일을 대행해 준다는 의미의 디지털 장의사... 그럴 듯한 비즈니스란 생각이 든다. 서울에선 결혼하기 전 디지털 장의사부터 찾는다는 말도 있고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철없던 시절 옛 애인과 온라인으로 주고받은 흔적들이나 SNS를 통해 올려놓은 쌍욕들이 평생 그 사람을 붙어 다닌다고 생각해 보자. 잘못하다간 한방에 인생이 날라 가 버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주홍글씨가 될 수 있다. 취업을 준비하던 한 젊은이가 3년 동안 정부를 비판하는 수백 건의 댓글을 포털사이트에 올렸다가 공무원 취직시험을 보러다닐 때 쯤 덜컥 겁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인터넷에 올린 모든 댓글을 지우기 위해 찾아 가는 곳이 바로 디지털 장의사. 디지털 장의사를 여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활 쓰레기를 버리듯 인터넷상의 쓰레기도 쌓아두지 말고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아주 즐거운 상황에서 온라인에 기록을 남기더라도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 불편한 게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댓글 공작 어쩌구 해서 감방에도 끌려가고 지금도 무슨 댓글과 관련된 인터넷 범죄 때문에 특검이 조직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도대체 그런 댓글을 달고 살만한 한가한 시간이 어디 있어요? 당장 튀어나가는 질문이 그것이다. 한국에 백수가 넘쳐난다고 해도 그렇다. 할 일 없이 인터넷이나 끼고 사는 인구가 많다고 쳐도 그렇다. 정권을 무너트리는 도구로 사용되거나 깜도 안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공작차원에서 벌이는 노동치는 댓글이 아니라면 누가 그 댓글에 정신을 팔고 살까나? 그런데 현실은 댓글에 죽고 살고 SNS가 생활의 구세주인 사람들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하는 모양이다. 컴퓨터 모니터와 마주 앉은 시간이 은밀하고 비밀스럽다 할지라도 내 살아가는 모습과 생각을 시시콜콜 그곳에 흔적으로 남길 경우 키보드의 엔터 단추를 눌러버리는 순간 내 모습은 사이버 공간에 국경 없이 발사되고 그때부터 나는 우주에 떠도는 ‘벌거숭이 임금님’이 되는 것이다. 보는 눈이 없다고 너무 쉽고 추하게 타락하는 현대인의 음습한 범죄의 온상 인터넷 공간... 인터넷을 등지고 살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인터넷을 주군으로 모시는 노예처럼 전락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러다 어느 날 디지털 장의사를 찾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다. 이달 한국 충청도에 봉쇄수도원을 개원한다는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원 개원을 앞두고 ‘당당뉴스’에 쓴 글을 읽다보니 그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수도 영성 중에 중요한 영성은 침묵입니다. 침묵도 훈련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3년입니다. 그러나 침묵을 배우려면 50년이 걸립니다. 침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침묵 훈련을 할 수 있습니다. 아무 말이나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면서 겨우 짧은 6마디 말하시고 나머지 시간은 침묵이었습니다. 6마디 다 합하여도 1분 정도입니다. 5시간 59분은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을 덧붙였다. “하나님의 노크 소리는 조용할 때 더 크게 들리는 법입니다” 수십 개의 안테나를 세워놓고 이거저것 참견하며 시끄럽게 살지 말고 조용히 주님 앞에 엎드려 침묵의 영성을 가꿔나가면 어떨까? 말을 절제하는 침묵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디지털 침묵’도 훈련할 때가 되었다. 그러다보면 디지털 장의사 찾아 다니며 돈 쓸 일도 없어진다. 이 세상과 좌충우돌 욕설과 험담과 정죄를 일삼던 추한 모습이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붙어 인터넷상에 떠돌게 될 때 그때 불이 나게 디지털 장의사를 찾아다니는 부끄러운 속물이 바로 내 모습이 아닌지를 되돌아보며 인터넷 앞에서도 때로는 침묵모드를 셋업해 보자.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네가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시고 “몇 가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우리는 너무 분주한 나머지 아주 중요한 한가지를 잊고 사는 마르다는 아닌가?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4 Jun 2018 03:32:00 +0900
(1心 칼럼)신 트림 6개월 동안 바깥 출입 못했던 중년 여성을 치료한 아버지의 한 수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43 트림.jpg
 
보통 트림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닐까 할 정도로 남성들이 잘 하신다. 그런데 오늘 다루고자 하는 환자는 한 20년 전 쯤 내원한 브라질 중년 여성으로 갑자기 어느때 부터 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냥 보통 트림이 아니라 진짜 ‘꺼~어~~~어~억’하는 큰 트림 소리를 2, 3초간 하시는 분이었다. 트림을 하는게 뭔 대수냐? 하시겠지만... 이 여성 중년은 악수를 하려 손을 잡아도 ‘꺼~어~~~어~억’, 팔을 쳐 들어도 ‘꺼~어~~~어~억’, 어깨를 잡아도 ‘꺼~어~~~어~억’.... 이렇게 6개월 이상 심한 트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던 이 중년 여성은 여러 종합병원을 찾아 다녔지만 치료를 못하고 급기야는 밖의 외출을 삼가고,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하고 우울증 증상까지 생기는 중이었다. 보통 트림을 잘 하시는 분들은 위나 장이 약해서 가스 배출이 잘 안되거나 드시는 음식과 관련되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상식적인 선을 벗어나서 말도 안되는 희안한 경우였는데, 환자도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자신의 병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이런 희안한 경우를 소개하고 여기에 대한 글을 올리는 것은 모든 치료가 때로는 간단한 방법으로도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이런 경험담을 통해 생활의 지혜를 터득하시는 분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이다.
 그러면 어떻게 환자가 완치되었는지 치료 과정을 설명해 보겠다. 트림과 관련된 이런 환자의 고통과 설명을 들은 나는 손을 잡을 때나 팔을 움직일 때 또는 어깨나 등을 건드릴 때도 트림을 하는 것으로 보아 경락의 수승화강(水升火降)차원에서 치료를 시도하면서 복부의 치료를 같이 시도했다. 이틀 후, 다시 내원한 브라질 중년 여성은 한 차례 치료로 10~15%의 호전을 보았다고 한다. 때마침 아버지가 오셨길래 아버지에게 중년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이 여성의 상태를 확인해 보시더니 막 웃으시면서 “이건 뭐 꼭 귀신들린 여성같이 보인다”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시고는 뭘 주섬 주섬 가지고 진찰실로 다시 들어가셨다. 그리고 한 20~30분 뒤, 이 여성이 치료받고 나온 뒤 트림이 거의 없어지고 정상적이 되었고  이 중년여성은 너무 행복해 했다.(그 행복해 하는 얼굴은 잊을수가 없다) 이럴수가... 우리 아바이가 뭘 했길래 저렇게 사라졌을까? 여성 환자를 보내고 나서 물었다. “어떻게 치료하셨어요?”, “옛날 오래전 한국에서 딸꾹질을 10년 이상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도 이런 방법으로 하니 빨리 완치되었다”고 하시면서, “휴지를 돌돌 말아 코속을 간지럽혀 재채기를 하게 만들었지. 딸꾹질이나 트림, 이 모두가 결국 횡경막에 어떤 자극이 가는 것이니 만큼 반대로 횡격막을 자극하면 딸꾹질이나 트림도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흠, 역시 경륜이란게 틀리구나... 극히 평범한 직관적인 사고에 대해 아바이님께 한 수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 환자를 치료하다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아마 아버지의 도움이 아닌가도 싶다. 얼마 전에도, 한 한인 남성분께서 병원에 암치료로 입원 중이신데 딸꾹질이 몇 일동안 멈추지 않고 너무 힘들다고 전화주셔서 가르쳐 드렸더니 금방 딸꾹질이 멈추었다고 고맙다고 전화주신 적이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겪고 보는데 모든 일에 앞서 어떤 일에 마주치게 되면 급히 서둘지 말고 먼저 가만히 1, 2분 생각을 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나도 상상치도 못할 나 자신의 발견(?)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 생활에 여유와 능률이 생길것이라 생각하면서 글을 마친다.

1心(한의사)
[출처:www.koreabrazil.net]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7 Jun 2018 02:58:00 +0900
(금주의 제언)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어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42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약 2:21에 보면 야고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하여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가지고는 구원받고 축복받고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없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으로 복의 근원이 되었다. 인간의 불행, 즉 우리 개인의 불행과 온 인류의 불행은 불순종에서 왔다.(롬5:15-19)
 죄가 어디서 왔는가? 죄도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에서 왔다. 우리 인간이 죄인이 되고 멸망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이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불순종의 결과는 엄청난 불행을 초래한다.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는 인간은 저주를 받게 된다. 사망이 어디서 왔는가? 사망도 아담 한 사람이 불순종함으로 이 땅에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버림받은 인간을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 밖에 없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저주받은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하나님께 대하여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인되고 죽게 된 우리 인간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구원 받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심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으로 멸망에서,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 앞에서는 불순종보다 더 큰 불행이 없고 순종보다 더 큰 은혜가 없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 되기 바란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성부 하나님께 순종했다.(빌2:5-11)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순종의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일생은 순종의 생애였다. 주님의 삶은 일관된 순종하는 삶이었다.(눅2:51) 주님은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순종이다. 순종에는 위대한 힘이 있다. 믿기는 쉽지만 순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순종이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히 11:을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인 동시에 순종의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냥 앞으로 나갔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도 순종하며 간 것이다. 또 하나님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실 때도 순종하였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순종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마음 속에 믿음이 있어도 행동에 옮기는 순종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믿음이 있어도 순종해야 복을 받고 성공한다.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다.(눅5:3-6)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고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왕하5:8-14) 순종하면 축복받고 성공하고 병이 치유되고,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순종하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성경 역사에 보면 위대한 지도자는 모두 순종의 사람이었다. 우리의 생애에서 모든 것이 순종 여부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기 바란다. 그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었고, 순종할 수 없는 것을 순종한 사람이다.
 성경 역사상 불순종하고 복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앞 뒤와 같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믿어도 순종치 않은 자는 신자가 아니다. 모쪼록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한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7 Jun 2018 02:57:00 +0900
(칼럼)헛수고의 인생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35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이제 모내기철이 되었다. 올해도 농부들이 열심히 수고하며 모내기를 하는 이유는 풍년의 축복을 기대하기에 수고를 아끼지 않고 모내기에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고 올해도 농사에 풍년의 축복이 되기를 소원한다.
 일반적으로 심고 거두는 법칙은 심은 만큼 비례해서 수확을 거두게 되어 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것이다. 힘들다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둘 수밖에 없다. 영적인 원리도 역시 마찬가지다. 영적인 원리도 역시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영광을 위해서 충성의 씨앗을 심으면 심은 만큼 그에 따른 축복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말라기 1장에 보면 씨앗을 많이 뿌렸는데 거둘 것을 적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당연히 많이 뿌렸으니까 많이 거두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먹을 지라도 배가 부르지 않고,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또한 옷을 입으면 따뜻해야 하는데,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고, 일군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전대에 다가 갖다 넣었는데 그 전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 전대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서, 돈이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한 마디로 헛수고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렇게 된 이유는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10절에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고,” 11절에 “내가 한재를 불러, 너희의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 그렇게 했는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정황이다.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며 많이 뿌려서 많이 거두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불어버리시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지런히 전대에 갖다 넣어도 그 전대에 구멍을 뚫어서 돈이 다 빠져나가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당하는 백성들이 이방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 선민 이스라엘이다. 그렇게 하시고  “너희 소위를 살펴보아라.”라고 촉구하시고 계신다. 기대와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수고하고 열심히 심고 뿌렸는데 기대만큼, 목표만큼 달성이 안 되어 속이 상해서 원망과 불평가운데 입이 한 자나 튀어 나와 있는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촉구하시고 계신다. “그렇게 있지 말고, 너희들 행동을 한 번 뒤돌아보아라.” “너희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한 번 살펴보아라.” “내 집, 성전은 황무하였거늘 너희들은 멋진 집, 화려한 집을 짓고 살면서 아직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안 되었다고 하면서 너희들 먹고사는 일에만 정신없이 살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 “너희들이 그러고도 나를 사랑하는 백성들이냐?” “배은망덕한 백성들아!” “그래서 내가 너희들의 수고를 헛되게 했다.”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알았느냐? 이 어리석은 백성들아.” “그러므로 이제 정신을 차려라.”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기뻐할 것이고, 영광을 얻을 것이니라.”고 촉구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헛수고의 삶을 살게 하셨는가? 그 이유는 선민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우선 순위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인생도 헛수고의 인생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헛수고의 인생이 아니라 심은 대로, 수고한 대로 거두게 하시는 축복된 삶이되기를 소원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7 Jun 2018 02:47: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예루살렘 한식당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34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예루살렘에 오는 7월부터 한식당이 오픈한다고 한다. 한국일보 본국 판에 지난주 소개된 기사를 읽어보니 문을 여는 한식당 사장은 금년 71세의 김봉자 씨. 이스라엘 안과의사와 결혼해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다가 미국서 유대인 남편을 만나 20여년 전 이스라엘에 정착한 미주 교포출신이다. 지금도 미국과 이스라엘 2개국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매일 성지순례객들로 북적대는 예루살렘 올드시티에 오픈하는 한식당 이름은 ‘서울하우스.’ 금년 10월 성지순례단과 함께 예루살렘에 가면 나도 당연히 찾아가야 할 그 식당을 상상만 해도 지금부터 기분이 좋다. 요즘엔 성지순례나 해외여행을 나갈 때 라면이나 김치를 챙기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2인용 전기밥솥에 쌀과 고추장을 챙겨 짐을 싸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여행 중에 유명한 현지식을 찾는 분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한식이 좋다. 예루살렘에 한식당이 여러번 오픈하기는 했지만 수지타산이 안 맞아 그랬는지 지금은 없다. 지금으로서는 서울 하우스가 유일한 셈이다. 지난 2월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는 한국인 현지 가이드가 서울에서 공수해 먹는 반찬거리로 집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우리에게 한 끼를 제공했다. 브엘세바 평원의 국립공원 야외 테이블에 앉아 먹었던 그 점심도시락의 맛은 오래오래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꿀맛이었다. 아마 예루살렘 한식당도 그런 꿀맛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장님의 말에 의하면 한국 전통가옥 형태로 꾸민 서울하우스의 메뉴는 비빔밥과 된장찌개, 순두부, 쌈밥, 김밥 등이라고 한다. 된장과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 등은 모두 경북 성주에서 공수되고 식당 옆에는 쌈밥용 야채를 재배하는 텃밭도 만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개업했던 한식당들이 코셔인증을 받지 못해 현지인들이 외면해 온 것을 보고 지난 10년 동안 코셔인증을 받기 위해 뛰어다니다 드디어 인증을 받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코셔(kosher)? 우리도 많이 들어본 말이다. 할랄(halal)이란 말도 많이 들었다. 코셔란 유대교 율법에 따라, 할랄은 이슬람 율법, 즉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만든 음식이다. 그러니까 코셔는 유대교, 할랄은 무슬림 음식이다. 코셔란 ‘허용된’ ‘적정한’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코셔인증이란 유대교 율법에 적정한 음식으로 판단을 받아 검사필 도장을 받았다는 의미인데 미국에서 판매되는 식품가운데 코셔마크가 붙어 있는 게 13%에 달한다고 하니 대단하다. 그럼 코셔가 금하고 있는 음식, 그러니까 구약의 토라에서 말씀하고 있는 정결한 음식, 부정한 음식은 무엇인가? 우선 육류에서는 되새김질을 하는 4개의 위를 가진 짐승의 고기만 코셔식품이 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소고기다. 대표적으로 못 먹는 건 돼지고기. 불결한 짐승 대표주자인 돼지는 밥통이 하나다. 그러니까 서울하우스에 가더라도 돼지족발, 삼겹살에 상추 쌈 같은 메뉴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또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바닷물고기는 코셔 식품이 될 수 없다. 낙지, 새우, 오징어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조기, 락카드, 레드스내퍼 등은 코셔 식품으로 요리할 수 있다. 물고기의 귀족답게 비늘 뿐 만 아니라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낙지볶음이나 새우 혹은 오징어 튀김? 그건 한국 방문했을 때 골목 리어카 식당에서나 맛보고 예루살렘에 가서 찾을 메뉴가 아니다. 또 치즈버거는 코셔식품이 될 수 없다. 예루살렘에도 맥도날드는 있다. 맥도날드란 말 옆에는 ‘코셔’란 글자도 함께 붙어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겐 치즈버거가 없다는 뜻이다. 왜? 율법에는 유제품과 고기를 함께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패티 위에 치즈를 올린 치즈버거도, 고기 토핑과 모짜렐라 치즈를 얹은 피자도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금지한 규정이 출애굽기에 나와 있는데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출애굽기 23장 19절)는 구절 때문이다. 이는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함께 조리할 수도 없음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술 더 뜨는 규정도 있다. 고기로 식사를 한 뒤에는 치즈케이크나 아이스크림, 우유나 크림으로 만든 각종 디저트를 바로 먹을 수 없다. 배 속에서 섞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사시간에 고기를 먹은 뒤에 다른 유제품을 먹으려면 6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 하다는 게 코셔 식사규정이다.
 이렇게 골 때리는 규정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도 지키고 있단 말인가? 지금도 회당이나 통곡의 벽 근처에서 키파라는 동그란 모자, 검은 양복, 가발 등을 쓰고 다니며 왼 종일 토라나 연구하고 수많은 아이들을 낳아 데리고 다니며 국가에서 주는 세금으로 먹고 사는 정통 및 일반종교인들은 오직 코셔음식만 먹고 엄격 그 이상으로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안식일엔 셀폰 절대 사용금지, 자동차 시동 금지, 심지어 엘리베이터 단추도 누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 호텔에는 이들을 위한 안식일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다. 단추를 누르지 않아도 층마다 저절로 스톱해 준다. 내가 조사한 통계로는 지금도 안식일과 코셔음식을 이처럼 목숨 걸고 지키는 종교인들은 전체인구의 30%정도, 그리고 안식일과 코셔음식을 놓고 “너나 잘 하세요”, 그렇게 율법에 목매지 않는 세속적인 유대인들은 40%을 넘고 있다. 이들은 종교인들을 대놓고 비난하지는 않아도 딱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코셔음식이 율법에 따른 정결음식 임에는 틀림없지만 율법에 얽매이다가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것 까지를 다 놓치는 우를 범해서야 쓰겠는가? 하나님과는 한없이 가까운 예루살렘, 예수님과는 한없이 먼 예루살렘… 아무튼 예루살렘 서울하우스에 가서는 돼지 족발은 찾지도 말고 주는 대로 정결한 코셔음식 맛 한번 기대해 보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7 Jun 2018 02:45:00 +0900
(금주의 제언)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입니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23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미국의 여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이다”라고 하였다.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희망은 반드시 성취된다. 삼중고의 성녀로 불리는 헬렌 켈러 자신의 체험을 통해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인도하는 신앙이다”라고 표현했다. 헬렌 켈러는 앨라배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두 살 때 열병으로 앓다가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라는 삼중의 고통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어떻게 해서라도 헬렌 켈러를 인간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 침식을 같이 하는 가정교사를 구하게 되었다. 그 가정교사가 헬렌 켈러의 인생을 변화시켜 준 설리번 여사였다. 헬렌 켈러는 일곱 살 때부터 설리번 선생에게 교육을 받았고 1900년에 하버드 대학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4년 세계 최초의 대학 교육을 받은 맹농아자로서 영예로운 졸업을 했다. 그 후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던 박람회 에서 설리번 선생의 도움을 받아가며 강연을 했다. 이것을 시초로 켈러는 미국은 물론 해외로도 나가 강연을 했다. 그리고 맹농아자의 교육과 사회 복지 시설을 위한 모금을 통해 맹농아자 복지 사업에 공헌했다. 그녀는 자신처럼 맹농아자인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켈러가 ‘빛의 천사’로 불린 것은 맹농아자를 비롯하여, 모든 신체장애자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참된 희망은 모든 선한 것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얻은 재물이나 자식을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기대하는 것이 희망의 본질이다. 희망의 가장 적절한 예는 어머니에 대한 어린아이의 자세이다. 어린아이는 늘 어머니에게 매우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지만 그 요구의 충족 여하에 따라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변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자기에게 해주고 안 해주는 것은 유익한 것이라고, 어머니는 항상 유익한 것만을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향한 어린 아이의 온전한 신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 내 몸과 마음이 다 사그라져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의 든든한 반석이요 희망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유일하게 좋은 것, 아무 것도 없는 사람도 희망만은 가지고 있다.
 희망은 가난한 자가 살아가는 양식이다. 사람이 성공을 못해도 실패를 거듭해도 가난하고 병들고 고행을 해도 희망만은 놓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인류의 대다수를 먹여 살리는 것은 희망이다”라고 했다. 위대한 희망은 위대한 인물을 만든다. 희망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인간은 희망을 품고 사는 한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희망은 믿음의 아버지라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은 희망이다. 의의 태양되시는 주님은 우리들의 희망이다. 오늘도 희망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가슴 벅차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기를 축원한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4 May 2018 20:12:00 +0900
(칼럼)마음 지키기-8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19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성도인 우리는 항상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 믿음은 우리의 긍정적인 마음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인 마음에서는 절대로 믿음이 생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부정적이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한다. 부정적인 마음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마음을 지켜야 한다.
 왜냐?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승패의 요인이 바로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에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산다. 긍정적인 마음과  믿음은 하나와 같다. 믿음은 긍정적인 생각, 말,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불신앙은 부정적인 생각, 말, 행동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똑같이 해도 마음이 부정적이면 매사에 불신앙으로 생각, 판단, 말, 행동을 한다. 성도이지만 불신자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마음의 구조, 사고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의 구조가 부정적이라면 그 마음을 고쳐야 한다. 마음을 고치고 마음을 지켜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10명의 정탐꾼들의 사고와 마음의 구조가 부정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들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똑같은 시간에 똑 같은 장소를 정탐했는데 10명의 보고는 두 사람과 전혀 달랐는가? 이유는 그들 마음이 부정적인 마음이요, 그들의 사고의 구조가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께서 주시마고 약속하신 아름다운 땅을 악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부정적인 것이 가득 차 있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장대한 사람으로, 강한 사람들로 보였고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은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오직 현실만 보였다. 따라서 믿음이 없으면 이들처럼 현실만 보인다. 그리고 그 현실을 보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모습에서는 긍정적인 것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믿음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원망을 하고 불평을 쏟아냈던 것이다. 결국 그러한 불신앙,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광야에서 유리방황하다가 광야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마음, 사고가 이처럼 성도인 우리를 불신앙으로 살게 하는 요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대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정적인 마음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부정적인 마음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믿음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믿음은 하나의 장식품처럼 달고 다니고 오직 현실만을 바라보고, 문제만을 바라보고 불신앙으로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낙심, 원망, 불평가운데 떨어져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겉으로 보면 믿음의 사람 같은데 실제 마음속에는 믿음이 없고 부정적인 마음, 생각으로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성도인 우리에게 이 부정적인 마음, 생각이 얼마나 해악의 요소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 부정적인 마음, 생각, 불신앙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 눅 18:8에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믿음으로 사는 자가 적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모습을 보자. 진정으로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말로만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실제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살아가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가?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소유하고 살아가기를 소원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4 May 2018 20:07: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구화지문(口禍之門)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18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싸가지 없는 말뽄새(말본새)는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이 원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자기 손으로 동생을 쳐 죽인 1급살인자가 능청스럽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이 말뽄새를 보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화로 가득했을지 안봐도 비디오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란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입을 조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조심 적색경보인 셈이다. 그래도 말조심이 안된다. 그게 인간의 연약함이다. 얼굴은 곱게 생겼는데 말은 밉상으로 하는 사람이 많다. 정나미가 떨어진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구슬같이 명랑하고 말속에 배려가 가득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 마주하면 저절로 행복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것을 느낀다.
 지난주 백악관 한 보좌관이 말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을 놓고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he’s dying, anyway)”라고 말한 사실이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파문이 일고 있다. 말뽄새가 문제였다. 금년 81세의 매케인 상원의원은 공화당 소속이긴 해도 같은 정당의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대쪽 같은 강경발언이나 반대 의견도 서슴치 않는 바람에 초당적으로 존경받는 정치거물이다. 현재 평양을 두 번씩이나 왕래하느라 숨이 가빠진 폼페이오가 국무장관에 발탁 되면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공석이 되자 그 자리에 지명된 지나 해스펠을 놓고 매케인이 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부국장에서 국장으로 진급도 되고 여성 최초 CIA국장이란 영예를 거머쥐게 된 그가 부시 대통령 시절 테러용의자들에 대한 고문을 지휘 감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게 문제였다. 매케인은 베트남 전쟁 때 포로로 붙잡힌 아픈 경험이 있어 고문이라면 결사 반대파다. 그래서 또 백악관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이다. 매케인이 주도하는 공화당의 지나 해스펠 인준 거부 움직임을 논의 하던 백악관 공보담당 보좌관 비공개회의에서 켈리 새들러란 특별보좌관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민주당과 매케인 가족들은 그의 사임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과 편치 않은 관계라고 해서 암으로 투병중인 사람에게 이건 할 말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그 보좌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적절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목사님이 교인 중에 아들은 낳은 가정이 있어 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신생아실에서 아기를 안고 부모와 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좌우지간 이 험난한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하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목사님이 신생아를 품에 안고 기도할 때 적절한 말은 아니다. 그런 말뽄새라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있었던 얘기다. 아들 며느리가 노모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했다. 80이 훨씬 넘은 어머니가 거동이 어려워지자 양로원에 맡기는 문제를 놓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차피 죽을 건데... 양로원에 맡깁시다”라는 며느리의 말을 침실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튿날 어머니는 조용히 숨진 채 발견되었다. 자살이었다. 늙고 거동이 불편해지는 것도 서러운데 평생을 고생하며 눈물로 키워 온 아들 가족이 와서 한다는 말이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빨리 해 치워 버리자는 식으로 말을 했으니 서럽고 원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너무 연로하여 부모님을 양로원으로 모시고 가는 날 흐느끼지 않는 자녀들이 없다. 말도 통하지 않는 양로원에 그냥 던져 놓고 간다고 생각하면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현실이 서러워 그냥 울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말을 하다보면 양로원에 수감(?)되는 부모님의 가슴에 더 큰 대못을 박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늙으면 누구나 다 양로원에 와요. 잘 적응하세요”라던지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부모님을 옆에 놓고 “아유, 이젠 얼른 돌아가셨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또렷하게 알아들었다면 그 부모님의 서러운 마음을 상상해 보았는가?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만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게 바로 우리들의 입술이다.
 가정의 달에 그래서 우리가 더욱 힘쓸 것은 고상한 말, 격려의 말, 감사의 말이다. 5월엔 더욱 야고보서의 말씀에 집중하자. 무절제한 혀에 대하여 수많은 경고장이 집중되어 있는 책이다. 특히 1장 26절에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의 말뽄새를 튠업하는 5월, 말을 지르기 전에 한 박자만 더 침묵하는 연습을 실천해 보자. 우리들의 언어가 세상을 바꾸는 행복 바이러스가 되게 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24 May 2018 20:05:00 +0900
(금주의 제언)예수를 따르는 무리인가 제자인가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201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랐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제자들, 헌신된 사람은 아니었다. 성경은 무리와 제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무리와 제자들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께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랍비, 즉 위대한 스승으로 생각하고 따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 열 두 명만 택하여 제자를 삼으셨다. 그리고 3년 동안 같이 지내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라면 섬김과 봉사, 희생의 삶을 성실하게 살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직접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무리를 향하여 제자를 부르신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단순한 무리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삶을 이끄시도록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사람이 바로 주님의 제자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토기와 순종을 요구하셨다. 눅 14:33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을 경제학에서는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얻는 것의 가치는 그 ‘기회비용’의 크기에 따라서 매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나의 가진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하여 기회 비용을 얼마나 부담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재물이나 가족이나 심지어 목숨까지도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버릴 수 없다면 진정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붙잡아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우리의 믿음생활 가운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와 축복만을 추구한다면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과 도우심은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이다. 지금도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보고 예수님을 따라는 무리가 아닌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겠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되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영생과 하늘의 상급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기회비용’을 많이 사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 되기 바란다. 내가 더욱 소중한 무엇을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을 기회비용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 안에 있는 영생,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얻기 위해 시간, 재물, 쾌락, 호의호식을 포기하고 그 누구보다도 더 큰 기회비용을 지불할 줄 아는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축원한다. 이제부터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삶의 위치를 바꾸기 바란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7 May 2018 02:45:00 +0900
(칼럼)참된 자녀 사랑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96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자녀들을 기업으로, 선물로 주신 은혜를 감사하자. 만약 우리에게 자녀들을 주시지 않으셨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겠는가? 행복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대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일이 힘든 일이지만 그러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이야 말로 기쁨과 행복과 만족과 보람과 감사를 느끼는 귀한 일인 것이다.
 부모인 우리가 자녀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냥 무조건 잘 해주는 것인가? 자녀들 마음대로, 자기들 편한 대로, 원하는 대로, 그냥 살게 하는 것이 사랑인가? 그래서 아무런 부담 없이 편하게 살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식들 편하게, 자기들 마음대로 살게 해도 되지만 성도인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왜냐? 그것이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들 편하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지, 무엇이 사랑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랑은 맹목적인 사랑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왜곡된 사랑인 것이다. 자녀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도, 내버려 두는 경우에 그렇게 살면 자신들은 편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러한 인생은 복된 인생이 아닌 것이다. 왜냐?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을 사는 자녀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 죽음은 영원한 사망, 지옥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는 살아있지만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인 것이다. 마치 꽃병에 꽂혀있는 꽃처럼 잠시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죽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불행한 인생길을 달려가고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부담이 된다고, 편하게 살아야 하니까, 듣기 싫어하니까, 그냥 자기들 마음대로 지옥 불을 향해서 달려가도 내버려 둘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가? 부모인 내가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지옥이 영원한 고통을 받는 곳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자신은 그러한 천국에 들어가려고 예수님을 믿으면서 어찌 사랑하는 자녀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있는가?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부모는 절대로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옥으로 가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지옥불로 향하여 가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있어도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면,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자녀들을 그냥 구경만 하고 내버려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인생을 사는 자녀들은 영원한 지옥인 멸망의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들을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 일 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또한 급한 일이 없다. 절대로 미룰 수 없고, 연기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에 예수 믿도록 해야지, 천천히 예수 믿도록 하면 되겠지, 차차 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미루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생명이 끝나버리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때는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 아닌가? 그러므로 때늦은 후회를 하지 말고, 지금 현재 기회를 주실 때, 지금 자녀들을 믿음 안에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일 만큼 중요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자녀들이 이 땅에서 아무리 큰 성공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생명이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는다면 그러한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녀들을 구원하여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소원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7 May 2018 02:39: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이스라엘 건국 70주년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95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예루살렘은 3대 종교의 성지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잘못 건드렸다간 벌집을 건드리는 셈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최대 쟁점중 하나가 예루살렘이다.
 1967년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수도로 선포했다. 그런데 국제사회는 ‘아니올시다’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UN은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그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가자지구, 요르단 서안지구, 골란고원을 그냥 점령지역이라고 해 놓고 통치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이스라엘 지도를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굶은 점선으로 그려놓은 이스라엘 영토가 있다. 그게 점령지역이다. 전쟁에서 빼앗기는 했으나 통치할 수는 없다고 UN이 못 박아 놓은 지역이다. 그러나 야곰 야곰 유대인들의 집단농장 기부츠가 계속 그 점령지역에 파고 들어가면서 늘 긴장감이 맴돈다. 아주 묘한 곳이다. 그게 오늘의 현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UN이 결의안을 통과시켜 뜯어말리고 있는데도 보란 듯이 이스라엘 건국 70주년을 기념하여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우겨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예루살렘이 장차 자기들의 수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터라 미국이 대사관 이전을 강행할 경우 그 지역에서 또 한 차례 갈등과 반목의 피 흘리는 드라마가 재연될 것이다.
 자, 그럼 그 기나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은 도대체 어디가 출발점일까? 우선은 밸푸어 선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11월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가 유태계 금융재벌 로스차일드 백작에게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단 3문장, 125 단어로 구성된 이 짧은 편지 한장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운명, 즉 중동의 미래를 결정짓는 폭탄선언이 된 것이다, 이를 ‘밸푸어 선언’이라고 말한다. 시온의 땅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자는 운동인 ‘시오니즘’을 통해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의 숫자가 대략 70만 명. 밸푸어 선언은 유대인들에게는 해방선언, 희망의 선언이었지만 아랍인들에게는 저주의 선언, 핍박의 선언이었다. 밸푸어는 정녕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바사 왕 고레스였을까? 그건 아니었다. 첫째는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거주 유대인들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영국의 전쟁공채를 유대자본에게 팔아먹어야 독일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셋째는 포탄제조에 들어가는 아세톤의 대량살상 기술을 알고 있는 유대인 차임 바이츠만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 바이츠만은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밸푸어 선언은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영국의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기막힌 또 하나의 선언이 있었다. 영국은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들을 자기편을 만들었지만 아랍인들에게는 1915년 ‘맥마흔 선언’이란 것을 통해 10여 차례에 걸쳐 ‘아랍 독립’을 약속해 놓은 상태였다. 1차 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아랍인들은 1차 대전 중에 독일과 동맹관계였던 당시의 오스만 투르크, 즉 오늘날의 터키에 대항하여 영국을 위해 죽자 살자 싸워준 것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그 배경을 잘 말해준다. 1900여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주인행세를 하며 살아오던 아랍민족은 맥마흔 선언의 실행은 고사하고 밸푸어 선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밀고 들어오자 배신 때린 영국의 양다리 작전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배신의 상처는 아직도 아랍인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5월 14일로 이스라엘 건국 70주년을 맞았다. 축하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다윗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원은 우리에게만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한 유대인도 기독교의 이방인이다. 지금은 예수 믿는 유대인, ‘메시야닉 쥬’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좋은 현상이다. 이스라엘이 영육간을 통해 회복되는 날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라고 믿는 종말론자들에겐 더욱 좋은 소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회복인지 회개인지는 몰라도 그것을 마치 우리시대 교회의 으뜸가는 사명으로 알고 이스라엘하면 무조건 면죄부를 주어야 하고 무조건 편들어 주어야 당연한 것으로 아는 과분한 ‘선민 프리미엄’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들은 또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것처럼 감람산으로 재림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인들도 감람산은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는 바로 그 감람산을 통해 오실 것이라고 믿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감람산은 참 복도 많다. 나는 LA에 살고 있으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LA에선 예루살렘 직항노선도 없고 도대체 무슨 비행기를 타고 감람산으로 뛰어 갈까? 문자적 성경해석도 문제지만 기독교인들의 이스라엘 짝사랑 신학도 문제가 아닌가? 건국 70주년에 예수님이시라면 높은 분리장벽을 세워 이스라엘이 핍박하고 살아 온 팔레스타인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아마도 그들의 눈물과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을 지도 모른다. 지름길을 마다하시고 이방인들이 살던 사마리아를 찾아가셨던 것처럼.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7 May 2018 02:38:00 +0900
(금주의 제언)부모님께 효도해야 복이 있다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84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성경은 자녀가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 받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녀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의 다마라는 곳에 유태인이 아닌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금화 3,000개의 값이 나가는 다이아몬드 한 개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랍비가 사원을 꾸미는데 쓰려고 금화 3,000개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다이아몬드를 사러 갔다. 그때 그 사람의 부친이 다이아몬드를 넣어 둔 금고의 열쇠를 베게 밑에 넣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난처해진 아들은 고가의 다이아몬드를 팔 수 있는 기회를 만났으나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울 수 없어 다이아몬드를 팔지 못했다. 그만큼 막대한 돈벌이가 되는데도 낮잠을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는 것은 대단한 효도라고 감탄하여 랍비는 널리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알렸다. 그 후 그 아들은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고객들을 상대로 다이아몬드 장사를 해서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받는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30:17) 그러나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범사에 형통하는 복을 내려 주신다고 약속하였다.(신5:29, 수1:7-8)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에게는 ‘잘되는 복’과 ‘건강 장수하는 복’이 임한다.(엡6:3) 잘 되기만 하고 단명하면 아쉬운 삶이요, 잘됨이 없는 장수는 고달픈 삶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부모님께 효도하면 잘되는 복과 건강 장수의 복 두 가지 복이 함께 주어진다.
 잠 23:25에서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다. 자녀가 아무리 부모를 사랑한다고 해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사랑에는 비교할 수가 없다. 성경에는 ‘순종’이라는 말이 1백 50번 이상 나온다. 예수님께서도 항상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는 본보기가 되셨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은 잠언서를 기록할 때 부모공경에 관해서 많은 가르침을 기록해 놓았다.(잠6:20-2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인 것처럼 부모를 공경하고 그 교훈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가정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다가온다.(엡6:1-3) 이삭은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부친 아브라함에게 순종함으로써 어디를 가든지 형통하게 되는 복을 받았다. 야곱도 부친 이삭의 말에 순종하여 부모님 마음에 드는 아내를 얻기 위해 먼 밧단아람으로 가서 거기에서 아내를 얻고 거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룻은 이방여인이었지만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는데도 끝까지 시어머니를 잘 공경한 결과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복을 받았다.(룻1:16-17)
 효자는 나쁜 짓 하거나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사람은 어른을 존경하고 인생의 선배에게 공손하고 머리를 숙일 줄 안다. 효도하는 사람은 부모가 베푸는 사랑을 기다리기 보다는 부모님 사랑을 받도록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꼭 우리 가정의 부모만 어른이 아니라 연세 많으신 노인이나 이웃의 부모도 마땅히 섬겨야 할 어른들이다. 우리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땅에 계신 부모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효도하고 영육간에 복을 받아 누리기를 축원한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0 May 2018 20:49:00 +0900
(칼럼)마음 지키기-7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79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이 시대는 도둑을 지키는 것이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집에 없어도, CCTV를 설치해 놓으면, 도둑들이 잘 침입을 못한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도둑을 지켜주는 회사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절대로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마음을 지키는 회사나, 기계와 같은 것은 없다. 마음은 누가 지켜야 하는가? 마음은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한다. 어느 누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근신하여, 깨어서, 마음을 지켜야 한다.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면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 사람도 불행하다.
 며칠 전 우울증을 앓던 30대 가장이 새벽에 잠을 자고 있는 가족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9개월 된 아들과 세 살 된 딸이 숨지고 부인도 중태요 본인은 자해를 하고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뉴스를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그와 같은 행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므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천안에서는 아버지가 밥 안차려 준다고 잠자던 딸을  둔기로 때려 살해한 아버지가 징역 15년 형을 선고 받은 사건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이처럼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
 이제 어떻게 마음을 지켜야 하는가?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자기 자신 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 바로 이기심이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간직해야 한다. 이 세상이 각박한 세상이 되는 것은 사람들이 이기심을 갖고 살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 때문에 인심이 메마른 세상이 되고 있다. 이 시대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지 그저 자기 자신만 잘 살고 좋으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계속해서 언급하는 일이지만 Me Too 사건, 갑질 사건 등이 일어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의 상처나 불이익은 상관하지 아니하고 그저 자기 자신 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소유한 자는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도인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기심이 없는가? 안타깝게도 성도인 우리들도, 이기적인 모습이 많은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이기심이 없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강도만난 자를 보고도 그 자리를 피하여 가버린 제사장, 레위 인이 바로 이 시대 이기심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성도인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오직 내 교회, 내 가족, 나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지 그저 자기만 편하고 잘 되고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이 바로 이기심인 것이다.
 마 25:31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때에, 심판의 기준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선을 행한 자와 선을 행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것으로 양과 염소로, 의인과 악인으로,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선을 행했느냐? 그렇지 아니 했느냐?로 판단하심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이기심을 가지고 살면 선을 행할 수 없고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악인으로, 영벌에 처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기심이 바로 지옥으로 끌고 가는 요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심을 버려야 선을 행할 수 있다. 천국은 이기심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이타심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다. 우리 모두 이기심을 버리고 마음을 지키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0 May 2018 20:43: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노벨상은 아무나 받나?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78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된다고 어느 모임에서 지지자들이 “노벨, 노벨”을 소리 높여 외쳤다고 한다. 그러니까 트럼프는 “당연하지...” 그런 묘한 미소를 지으며 군중들에게 손사래를 쳤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직 비핵화를 위한 북미정상회담 장소도 결정되지 않은 마당인데 북한의 핵을 없애는데 크게 공헌할 것이 분명하므로 트럼프에게 노벨평화상은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하는 기류가 역력해지고 있다. 이런 경우를 보고 “줄 놈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라고 했던가. 노벨상, 특히 노벨상중에도 노벨평화상의 권위와 영예는 누구나 알고 있을 만큼 세계적으로 검증된 상에는 틀림없다. 상금도 많기는 하다. 노벨이 남긴 유산을 기금으로 노벨재단이 1년 동안 이자 장사를 해서 얻은 수입으로 상금을 주는데 매년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략 130만 달러 내외라고 한다.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이 인류에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내 놓은 노벨상기금은 원래 3천100만 스웨덴 크로나였다고 한다. 현재 가치로 띠지면 대략 22억6천만 달러. 그러나 상금보다는 명예다. 이걸 한번 받으면 세계적인 명사가 된다. 돈이 많다고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탁월한 정치가라고 받는 것도 아니다. 보통사람이라면 받을 수 없는 상이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던 슈바이처, 그는 이 상을 받을 만 하다. 마틴 루터 킹, 테레사 수녀, 만델라, 국경없는 의사회나 UN... 이들도 평화상을 받았다. 평화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요 인류평화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 기관이니 군소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 지미 카터 대통령도 이 상을 받았다. 이들이 평화상을 받은 걸 갖고는 아직도 개운치 않은 군소리가 남아있다. 사실 노벨평화상을 ‘웃기는 짬뽕’이라고 놀려먹어도 되는 이유가 있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도 평화상 후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합격의 문턱에서 미끄러져 수상불발이 되긴 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러시아의 푸틴도 후보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노벨평화상은 아무나 받는 상인가보지요?”라고 기자들을 향해 뼈 있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사실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으로 들어야 할 말이다. 더 웃기는 것은 영국의 윈스튼 처칠이다. 그가 평화상이 아닌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며 유럽의 평화에 기여한 정치적 리더십을 감안한다면 평화상감이지만 그의 명령으로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이 얼마인데 그에게 평화상만큼은 줄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가 저술한 ‘제2차 세계대전’이란 책을 꺼내들어 그에게 문학상을 수여했다니 노벨상 역사상 아직도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있는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이 욱하는 성질을 잘 참아가며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차분하게 외교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가 국내정치를 위해 심복들을 밥 먹듯 갈아치우는 것은 내부사정이겠거니 넘어가도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멕시코사람들을 막기 위해 장벽을 세우겠다고 우기는 일이나 국제여론은 무시한 채 이스라엘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주장해서 조용하던 중동지역에 평지풍파를 몰고 온 일이나 무슬림 입국금지 행정명령을 내려 이슬람 국가들의 원성을 산 것 등을 따져보면 그가 과연 평화상 후보감인가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를 잘 달래고 구워삶아서 만약 북한의 비핵화를 현실이 되게 할 경우 트럼프는 역사에 길이 남을 탁월한 정치가요, 협상가요, 평화주의자로 추앙을 받아야 한다. 냉전시대를 종식시킨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와 맞먹을 위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직 본론에 접근한 상태도 아닌데 서론부분에서 “노벨, 노벨”을 외치는 것은 염불에는 맘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마당에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으면 되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난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감동을 먹었는지. . . 이 말이 바로 노벨상감이다. 난 문재인 대통령을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 말 한마디에 그만 가슴이 뻥 뚫리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북한 비핵화가 김정은의 정치쇼에 속아 말짱 도루목이 될지 정말 핵 없는 한반도의 봄이 올지는 두고 봐야 할 일지만 정작 회담을 열어 보기도 전에 노벨상이란 성급한 김치국부터 마시려는 게 마땅치 않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가장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람은 사실 문재인 대통령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는 후보가 아니라고 발을 빼는 그의 겸양의 정치력이 한반도의 명운이 걸린 5월의 격랑 속에서 너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란 유행가가 있다. 문득 “노벨상은 아무나 받나?”란 말이 유행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노벨상은 아무나 받을 수는 있다. 심사에서 합격만 하면 되니까.  만약 트럼프의 협상력으로 마침내 핵이 없는 한반도, 그 목표가 성취될 경우 트럼프에겐 노벨상이 아니라 수퍼노벨상을 주어도 그의 공로를 다 치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상대인 김정은이 자신의 생명줄로 여기는 핵을 정말 포기할까? 그것이 문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것이다. 노벨상에 눈이 어두워진 트럼프 대통령이 땅속에 감춰둔 핵무기를 보고도 그냥 대충 없는 것으로 하고 비핵화가 성공을 거뒀다고 뻥을 치는 경우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0 May 2018 20:42:00 +0900
(금주의 제언)영적 본성을 개발하자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66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특별한 본능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심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하고 본능적으로 세상의 만물을 정복하도록 하셨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손을 남기려는 본능이 있다. 즉 생육의 본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게는 번성하려는 본능이 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사업, 자손, 이름이 날이 갈수록 번창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적인 의지가 인류를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 되어 왔다. 사람에게는 정복하려는 본능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정신적인 능력들, 즉 언어와 지식 등을 사용하여 자연을 정복하고 모든 환경과 동물 사회를 정복해 나감으로써 뛰어난 인류 사회를 이루었고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육체적인 면만 따지고 볼 때 인간은 오히려 아주 약한 동물에 속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정복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 되었고 만물을 다스리며 지배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영적 본능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게 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내어 버려두시지 않고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구원하시고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귀중한 영적인 생명, 영적인 본능을 회복했을 때, 우리는 영원한 것을 사모하며 진리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이 생기는 것이다.
 영적 본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 본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영과 혼과 몸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더러운 것과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또 영적인 본능을 개발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가능하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늘 읽고 묵상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믿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고 우리의 영적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신다.  또한 영적인 본능을 개발하고 성장시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기도이다. 이는 기도는 영적인 생명을 유지해 주는 영적 호흡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자녀들의 삶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고 결국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또한 인생의 여러 위기와 유혹으로부터 보호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품에 안전히 거할 수 있으며 매일매일 성령께서 깨끗케 하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동물적인 본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동물이 갖지 못한 영적인 본능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본능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며 인생을 가치 있게 하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 주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 영적인 본능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3 May 2018 22:47:00 +0900
(칼럼)마음 지키기-6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60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요즘 갑질 논란이 계속해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통해서 갑의 위치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성도인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다할지라도 그처럼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처럼 심한 갑질을 하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어떤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아니할 때 그 마음에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그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 그처럼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폭언을 하며 갑질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분노의 감정, 분노의 마음을 잘 다스렸다면 그처럼 폭언을 하며, 갑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마음을 잘 지켰으면, 갑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처럼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인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마음을 잘 지키고 있는가? 특별히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가? 우리도 어떤 사람들처럼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며 분노를 분출하며 살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도인 우리가 마음을 지키지 못하여 분을 내며, 화를 내며 살고 있다면 성도로써 바람직한 삶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약 1:19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내는 것을 더디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될 수 있으면, 할 수 있으면 성을 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내는 것, 화를 내는 것, 잘 조절이 되는가? 잘 조절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한 번 마음에 분이 일어나고, 화를 내고, 성을 내다보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본분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의 인생으로 전락이 되고 만다. 엡 4:26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분을 내고, 분을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 그 결과 죄를 짓게 되고 마는 것이다. 분을 내고, 마음속에 분을 품고 있으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이성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 묻지마 폭행, 묻지마 살인과 같은 우발적인 범죄가 많아진 현실이다. 왜 자신과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르는가? 그 이유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분을 품고 있으니 그 분을 해결하려고 그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 5장에서 왜 형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쳐서 죽이는 살인죄를 범했는가? 그 이유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동생을 때려서 죽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강력 범죄인 폭력, 살인죄들은 대부분 분노의 감정을 잘 해결하지 못해서 범하는 범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 화나는 감정을 잘 처리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성도로써 승리할 수 있다. 어떻게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가? 1. 용납해야 한다. 어떤 때 우리 마음에 분이 나는가?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아니할 때 마음이 상하고 그래서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될 갑질을 하고 미워하게 되고  불화하며 심지어 살인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용납해야 한다. 2. 인내해야 한다.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씀한다. 인내하라는 말씀이다. 속이 상하고, 성나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성을 더디 내라는 말씀이다. 그 상황을 잘 넘기고 될 수 있으면 화를 내지 말라는 말씀이다. 분노를 해결하므로 마음을 잘 지키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3 May 2018 22:33: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바버라 부시 여사의 장례식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59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바버라 부시 여사는 프랭클린 피어스 미국 14대 대통령의 후손인 피어스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대통령 가문에서 태어나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손수 대통령 가문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는 더 유명하다. 대통령의 부인이 된다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 이지만 아들까지 대통령을 만들어 냈으니 보통 사람은 아니다. 미국 역사상 남편과 아들을 대통령으로 만든 두 명의 여걸이 있는데 하나는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부인 애비게일 애덤스와 지난주 장례식을 치른 바버라 부시 두 명 뿐이다. 애덤스 여사는 아들 존 퀸시 아담스가 6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생전에 남편도 대통령, 아들도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은 바버라 부시 혼자 뿐이다. 부시가문에서는 2명의 미국 대통령, 두 번째와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텍사스와 플로리다의 주지사 두 명, 상하원 의원 한 명씩을 각각 배출했으니 사람들은 이 집안이 미국의 전설적인 정치가문 케네디가문을 추월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시 왕조(Bush Dynasty)’란 말까지 나왔다. 누가 이런 것까지를 꼼꼼하게 계산했는지는 몰라도 케네디 가는 약 1,000일 동안 대통령 직에 올랐으나 부시 일가에서는 아버지, 아들 대통령을 합쳐 도합 4,383일 동안 대통령 직을 수행하였으니 케네디 가는 이제 부시집안에 밀려도 한참 밀린다는 애기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이번 어머니 장례식에서 조사를 한 둘째아들 젭 부시가 대통령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바버라 부시는 “미국에는 너무 많은 부시가 있단다”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뜯어말렸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사실 아버지도 대통령, 큰 아들도 대통령, 둘째 아들도 대통령이 되면 미국엔 부시 집안 밖에 없냐고 욕먹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젭 부시는 공화당 경선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전형적인 내조형에다 유머가 넘치고 소탈하고 신앙심이 좋았던 것으로 유명했던 그 바버라 부시의 장례식에는 초청받은 1500여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휴스턴에 있는 성 마틴 성공회 교회당에서 열렸다.
 우선 전직 대통령 네 명이 나란히 참석한 것이 “미국이란 나라답다”는 좋은 소문을 내고 있다.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 그리고 아들 부시, 남편 부시, 이들 네 명의 대통령에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안 문제를 이유로 불참했다고 하는데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참석했다.
 이들 대통령들은 한때는 모두 정적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서로 치고받으며 상대방을 공격해서 쓰러트려야 자기가 살아남는 살벌한 경쟁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전직대통령으로서 다감한 모습으로 한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장례식에 참석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손녀들이 나와서 잠언 31장 10-31절까지를 차례로 읽었다. 물론 성공회 예전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말씀, 그리고 복음서의 말씀이 따로 봉독이 되었지만 특별히 마지막 30-31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이 말씀이 읽혀질 때 모든 이들은 바버라 부시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손자들이 관을 운구하고 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부시 왕조를 일으켜 세운 ‘안방마님’이었음에도 바버라 부시는 쉬지 않고 자녀들에게 강조한 것이 “자랑하지 말아라” “겸손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미국의 할머니’로 존경받아 왔던 그에게는 유명한 시그니처 액세서리가 있다. 바로 가짜 진주 목걸이다. 미국 정치왕조의 안주인이 진짜 진주 목걸이를 살 돈이 없어 가짜를 즐겼을까? 가짜로도 얼마든지 행복해하는 그의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날 장례식에 참석한 조객들이나 추모객들 중에는 가짜 진주목걸이를 걸고 나와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더구나 장례식장엔 꽃이 없었다. 꽃이 없는 이날 장례식은 더욱 엄숙하고 경건하게 느껴졌다.아름답고 눈부신 꽃이 없으니 조객들의 시선이 하나님에게만 집중할 것 같은 경건함이 넘쳐나는 분위기였다. 장례식장에 가면 조의를 표하기 위해 꽃은 있어도 좋다. 그런데 우리 한인사회 장례식장엔 너무 꽃이 많다. 장례식장의 꽃이나 화환의 숫자를 죽은 고인의 명성이나 부귀의 척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꽃으로 뒤덮여 있는 장례식장에 가면 사람들이 장례식을 하는 게 아니라 꽃들이 장례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날 장례식은 ‘기뻐하며 경배하세(Joyful, Joyful, We Adore Thee)’를 부르며 끝났다. 눈물도 있었지만 기쁨도 넉넉했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겸손과 절제가 느껴지는 장례식이었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3 May 2018 22:32:00 +0900
(금주의 제언)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43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심한 스트레스와 피곤이 쌓여 생활의 기쁨을 잃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게 될 때가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그간 너무 주님 만나는 일을 등한히 한데서 온 결과이며 신앙생활의 적신호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에게 아무리 생활이 분주하고 고달파도 시간을 내어 주님과 만나 조용한 대화와 교제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타락은 후손들에게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5:12). 그 다음으로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온갖 고통은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됐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의 해결을 오직 주께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마 11:29에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하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듣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고 닮는 일이다. 멍에는 낮아지지 않고는 남을 높이지 않고는 멜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려면 진정한 쉼을 얻으려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와 쉼을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의 삶은 옛날 종의 형편과 같이 때리면 맞고 무시하면 무시당하고 사는 것이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삶을 사셨다고 했다. 예수님이 그런 온유와 겸손의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그런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 옛날 종들은 온갖 모욕적인 언사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눈물로 감내하고 살아야 했던 종들과 같은 자세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종된 우리도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고 그 옛날 종들과 같이 고통스럽고 짐승처럼 취급을 받으면서 비굴하게 살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된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오히려 기쁘고 즐겁게 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온유하고 겸손한 삶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큰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마음의 불안을 평안으로, 이웃과의 갈등이 평화로 바뀌는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성공한다고 하였다. 시 37:11에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리기로다”라고 하였다.
 사람이 예수 믿고 겸손히 주님을 따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쉬게 하여 주시겠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겠다는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세상에 나면서부터 죄짐을 지고 있다(롬3:10,5:12). 그리하여 불안과 절망 가운데서 헤매고 있다. 이것을 인간 스스로는 어찌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한 무거운 짐을 대신 져주심으로 우리의 수고와 고통, 불안과 두려움, 절망으로부터 해방되어 쉼을 얻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 믿고 죄짐을 벗은 성도들은 해방감에서 무한히 생의 환희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기자 | 오피니언>칼럼> Wed, 25 Apr 2018 23:19:00 +0900
(칼럼)마음지키기-5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39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요즘 모 회사의 오너 딸이 갑질 하는 모습으로 인하여 사회에 이슈가 되고 있다. 왜 그처럼 갑질을 하는가?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해서 그렇게 행동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오너 딸이고, 높은 위치에 있으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처럼 행동하므로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다.
 이제 우리의 마음에 의심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만약 의심을 물리치지 아니하고, 의심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무척 힘들고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 믿음,  확신, 신뢰함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떨쳐버리고, 인생을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런데 버스 기사의 운전 실력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고 가정해 보자. 마음이 불안해서 버스를 타고 여행할 수 있겠는가? 불안해서 버스를 타고 여행할 수 없는 것이다. 자동차 만이 아니라 항공기, 기차 등 모든 교통수단도 역시 의심하면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요리 중에 복요리가 있는데 복에는 생명을 잃게 하는 청산가리보다 10배가 넘는 테트로도톡신이라는 치명적인 독이 있다. 역시 요리사의 조리 실력을 믿지 못하면 맛있는 복요리를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요리사의 실력을 믿으니까 복요리를 맛있게 먹는 것이다. 또한 병원에서 의사의 진료를 믿으니까 치료를 받고 수술을 하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역시 부부간에 서로 믿지를 못하고 의심하면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믿느냐? 믿지 못하고 의심 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하다.
 특별히 성도인 우리는 더더욱 의심을 물리쳐야 한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불신을 심어주어 승리하지 못하게 한다. 성도인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확신가운데 살지 못하고 의심하면 그 인생은 복된 인생을 살 수가 없다. 따라서 모든 의심의 원인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바로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이 생기고 그 의심이 마음에 자리를 잡고 그래서 의심하며 살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의심을 물리치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된다. 약 1:6에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고 말씀한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의 상태가 어떠한가? 얼마나 불안한가? 의심하는 자는 마음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이다. 마음에 안정이 없고, 불안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심하는 마음으로,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지혜를 후하게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고 지혜를 구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주신다는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왜 믿음으로 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가?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불신앙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으니까 그 불신앙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가? 왜 적당히 순종하는가? 이런 저런 이유와 핑게를 댈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불신앙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는 다면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는가? 신실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자는 말씀을 불순종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지 못하니까,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지 못하니까 불순종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 의심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마음을 지키자. 의심을 물리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Wed, 25 Apr 2018 23:12: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다메섹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37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트럼프 대통령이 시리아를 향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퍼 부었다. 국제사회에서 쓰지 않기로 약속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그 관련시설들을 타겟으로 삼았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때도 그런 적은 있었다. ‘아랍의 봄’이 시리아에서는 통하지 못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반군이 되어 우리시대 가장 잔인한 독재자 아사드가 이끄는 정부군과 맞짱 뜨고 있는 전쟁이 바로 시리아 내전이다. 반군이지만 자기 민족을 향해 화학무기를 썼다는 이유로 트럼프가 미사일 발사 명령을 내린 것이다. 공격은 단 한번이라며 ‘임무성공’을 외쳤지만 아사드 뒤에 웅크리며 째려보고 있는 소련이나 이란이 반격을 개시하면 잘못하다간 3차 대전으로 불꽃이 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생겼다. 시리아에서 손을 뗄 것처럼 말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느닷없이 화학무기를 이유로 미사일 공격을 한 것이 그냥 혼내주기로 끝나면 몰라도 다시 중동지역 분쟁의 방아쇠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옛날 부시대통령도 이라크를 침공하고 나서 임무완수를 선언했지만 완수가 아니라 사실은 그게 시작이었던 역사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공격목표는 주로 수도 다마스커스였다고 한다. 민간인 희생도 없고 화학무기 누출사고도 없었다고 미국은 밝히고 있지만 100여발 이상의 미사일을 쏟아 부었으니 피해는 엄청 컸을 것 같다. 다마스커스는 성경에 나오는 다메섹이다. 사도바울의 회심과 떼어놓을 수 없는 도시 다메섹.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약 240 킬로미터, 우리가 쓰는 마일리지로 환산하면 약 150마일에 불과하다. LA에서 샌디에고 거리다. 그때는 걸어 다닐 때니까 자동차도 없는 주제에 바울은 왜 그 먼 다메섹까지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잡아들이겠다고 찾아 나선 것일까?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이주해 간 곳이 바로 다메섹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가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변심한 헬라파 유대인들을 체포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에 대제사장의 공인을 받아 몇 사람을 거느리고 다메섹 행을 결행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아마도 그 다메섹 가는 길에서 바울을 기다리고 계셨을 것이다. 그 길에서 일어난 바울의 회심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큰 일 날 뻔 했다.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를 복음으로 뒤집어 놓은 것도 그렇지만 신약성경의 1/3이 바울 작품이다. 바울 이전에 다윗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의 영토가 여기까지 포함될 정도였으니 이스라엘이 1964년의 6일 전쟁을 통해 시리아에서 골란고원을 빼앗을 때도 옛 다윗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떼를 쓸 만도 하다. 다메섹 뿐 만 아니라 안디옥은 초대교회에서 너무나 유명했던 곳이다. 어디에 있었는가? 수리아, 지금의 시리아였다. 터키 국경에 접하고 있었기에 지금은 터키 영토로 넘어 갔지만 옛날에는 수리아 안디옥이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이곳으로 파견된 바나바는 바울을 이곳으로 불러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안디옥은 이방인 선교의 최대거점으로 부상한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밖에 세워진 최초의 이방인교회였다.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을 보고 처음 ‘크리스천’이란 말을 붙여주었다.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 그 크리스천이란 말이 처음 탄생된 곳이 바로 시리아가 아닌가? 바울과 바나바는 이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연안도시 실루기아를 통해 소아시아 전도활동에 닻을 올렸고 그때부터 소아시아-로마-유럽-영국-미국으로 권역을 확장해 가는 세계 선교의 서광이 비춰오기 시작한 곳이 시리아다. 예루살렘이 베드로의 활동무대였다면 바울의 활동무대는 시리아였다. 다메섹과 안디옥만 따져 봐도 시리아는 충분이 기독교 역사와 뗄 수 없는 바이블 랜드에 속한다. 그런데 오늘날 그 나라의 현실은 어떤가? 2011년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40만 명이 이상이 사망했다.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부터 시리아를 탈출한 시리아 난민은 5백60만 명. 지난 주 뉴욕타임스는 이번 화학무기 공격으로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 42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시리아는 마침내 화학무기까지 등장한 죽음의 나라가 되었다. 아사드의 폭정 때문이다. 이 아사드와 한 편이 되어 스크럼을 짜고 있는 소련과 이란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면 내전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의 운명은 어찌되겠는가? 잘못하다간 미국, 이스라엘, 나토로 묶여지는 서방진영과 소련, 이란, 시리아가 손잡고 전쟁으로 치달을 경우 예측할 수 없는 3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초래될 수도 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복음이 처음 전파되어 즉각적인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곳은 데가볼리, 예루살렘, 유대, 요단강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시리아였다. 그때 임하셨던 주님의 치유와 평화의 손길이 다시 그 나라에 임하기를 기도하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Wed, 25 Apr 2018 23:10:00 +0900
(금주의 제언)마음을 낮추고 겸손하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22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이 세상에 겸손한 사람보다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사람은 무엇이든 많이 가지면 교만해진다. 가령 학식이 많든지, 돈이 많든지, 권력이 많으면 교만해지고 또 나이가 많아도 교만해 지기 쉽다. 그런데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 따라서 우리 믿는 성도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온유하고 겸손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잠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다. 교만하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이다. 독일 격언에 “산 꼭대기는 구름에 쌓여 벼락을 먼저 맞는다”고 하였다. 성도는 언제나 마음을 낮추고 겸손해야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성도의 겸손한 삶을 요구하신다. 잠 11:2에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하였다. 겸손하면 지혜를 얻고 성공한다. 영국의 격언에 “지혜로운 자는 귀가 길고 혀가 짧다”고 하였다. 교만한 자는 말을 많이 하되 겸손한 자는 듣기를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한다. 교만한 자는 남의 말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의 흠을 까발리지만 겸손한 사람은 남의 흠을 덮어준다.
 어느 음악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로 된 가난한 음악가는 새 예복을 장만할 여유가 없어 전부터 입어오던 낡은 예복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만 지휘 도중에 그 낡은 예복이 찢어지고 말았다. 연주를 할 때는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지휘자는 한 곡이 끝나자 낡아서 찢어진 예복을 벗어야만 했다. 와이셔츠 차림으로 지휘하는 그를 향하여 사람들은 낄낄거리며 조롱하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지휘하였다. 이때 맨 앞에 함께 앉아있던 어느 신사가 조용히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음으로써 지휘자처럼 와이셔츠 차림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비웃는 웃음을 멈추고 하나 둘, 전부 웃옷을 벗었다. 그 결과 그날의 연주는 그 어떤 연주회보다 매우 감격스러웠고 성공적이었다. 남의 흠을 조용히 덮어주는 모습이 인간의 행위 중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혹 이웃의 실수나 아픔을 보며 아무렇지 않게 비웃거나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비방하며 조롱하지는 않는가? 그보다는 이웃의 아픔을 감싸주며 진실로 함께 아파해주는 마음을 가지고 신사의 도를 지키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바란다. 인간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가 교만이다. 인간의 시조인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고 천사도 교만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가 사탄이 되었다. 사울왕도 교만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 교회 앞에 겸손한 자, 사람 앞에 겸손한 자, 말씀 앞에 겸손한 자 되어 복을 받고 성공하기 바란다. 물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겸손한 자에게 임한다. 브하그완은 “진정으로 용기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산다”고 하였다. 무디는 “믿음은 최대의 것을 얻으며 사랑은 최대의 역사를 하고, 겸손은 가장 많은 것을 보존한다”고 했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9 Apr 2018 21:25:00 +0900
(칼럼)마음지키기-4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18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마음을 지키는 것은 말은 쉬운데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마음을 지켜야 한다. 왜냐? 생명의 근원이 바로 마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이 사회에 만연한 모든 비리, 모든 부정부패의 이면에는 돈에 대한 욕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거짓에서 지켜야 한다. 마음을 진실하게 지켜야 한다. 마15:18-20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도 거짓된 삶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되기 때문에 그 마음에서 입으로 나오는 말이 거짓말이 되는 것이요 거짓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거짓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며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거짓이 나쁜 것인 줄 아는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거짓을 뛰어 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자신의 양심 앞에, 진실 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우리들의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거짓된 마음으로 살아서 자신의 양심 앞에도 늘 부끄럽고 더 나아가 사람들 앞에도 떳떳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늘 죄송한 우리들의 모습이지 않는가? 진실로 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러한 마음조차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거짓된 삶을 살면 당연히 부끄럽고 죄송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그러한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거짓된 삶을 살면서, 하등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 양심은, 죽은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부끄러움도, 죄송함도 없는 것이다. 신양 양심이 무디어져서 감각이 없는 것이다. 마치 사데 교회처럼 살았다하는 아름은 가졌지만 살상은 죽은 자인 것이다. 따라서 양심이 감각이 없다면, 그런 양심은 죽은 양심이다. 그렇다면 문제도 이만 저만한  문제가 아니다. 양심이 반응을 해야 하는데 양심이 반응하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큰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양심을 가지는 것, 중요하다.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마음에 거짓을 버릴 수 있다. 양심이 바른 사람은, 거짓된 마음을 품고, 거짓말을 하면서, 거짓된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바른 양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양심, 진실한 마음을 소유하는 것, 중요하다.
 롬 8:27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 약 1:26에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씀한다. 성도인 우리가  자기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속이면, 그 성도의 경건, 믿음은 헛것이라. 아무것도 아니요 가짜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거짓된 마음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을 소유하고 살아야 한다. 엡 4:25에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고 말씀한다. 제9계명에서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이웃들에게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이웃에게  해를 끼치려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웃을 속이는 것, 악한 죄라는 것이다. 거짓증거는 거짓말로 이웃을 중상모략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중상하는 것은 혀로 짓는 살인죄”라고 하였다. 거짓말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거짓된 마음을 물리치자.]]>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9 Apr 2018 21:15: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감방에 갇힌 좌파 대통령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16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브라질의 ‘국민 영웅’으로 불리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이 지난주 결국 체포 수감되었다. 웬 이름이 그렇게 길어야 하는지 이유를 난 잘 모르겠다. 세계인들에게는 그냥 ‘룰라(LuLa) 대통령’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가 감방에 갇히게 되었는데도 그의 지지율을 하늘을 찌른다. 노동자들이 그의 수감을 반대하며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룰라는 브라질 ‘노동자들의 아버지’요, 전직 대통령으로서 또다시 10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혀 그의 지지율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골드만 삭스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던 브릭스(BRICs), 즉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사우스 아프리카 가운데 선두주자였던 브라질은 중국으로 향하던 콩이나 석유와 같은 원자재 수입길이 줄어들면서 2010년 이후 급격하게 나라 살림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경제공항에 준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브라질 국민들은 잘 살던 때를 그리워하며 ‘룰라 향수병’에 빠져 “룰라, 룰라”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룰라는 누구인가? 가난했던 나라를 세계 8위 경제 대국으로 만든 브라질의 황금기를 이끈 노동자 출신의 좌파 정치가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이라고 치켜세울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금속 노동자로 공장에서 일하던 청년 룰라는 간염에 걸린 만삭 아내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아내와 뱃속 아이를 잃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그가 노동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일약 브라질 노동자들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미를 공산주의 대륙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혁명과 저항의 아이콘이자 ‘총을 든 예수’라고 불리던 체 케바라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그는 브라질의 노동자를 대신하여 정계에 뛰어들었다. 세 번 대통령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다 2002년 드디어 브라질 역사상 최초의 좌파 출신 대통령으로 화려하게 당선되었다. 이는 1889년 브라질이 공화국으로 바뀐 이후 113년 만에 처음으로 탄생된 빈민가 출신의 노동자 대통령이었다. 그가 임기 중에 세운 업적은 대단했다. 대부분 가난하고 없는 사람에게 ‘퍼주기’가 기본이었다. “브라질 국민이라면 세 끼 밥은 먹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빈곤층을 줄였다. 2000만 명이 극빈곤층을 탈출했고 국민 1인당 소득도 20%나 증가했다. 이때 룰라의 인기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런데 그가 감방에 갇힌 것이다. 세계 언론은 “83%의 지지받던 룰라의 추락” “국민영웅에서 부패정치인으로” “무너진 룰라 신화”라고 보도했다. 혐의는 부정부패다. 룰라의 노동자당과 그의 부인, 아들 모두가 부정부패종합세트였다는 것이다. 결국 돈 때문에 룰라 신화는 깨지고 말았다. ‘21세기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던 베네주웰라의 독재자 우고 차베스도 그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차베스도 무분별한 복지정책으로 퍼주기에 열중하다 보니 국민들로부터 인기는 높았지만 서서히 나라가 거덜 나는 것은 눈치 채지 못했다. 사회주의국가는 고사하고 나라를 말아먹고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2000년대 들어 남아메리카를 휩쓴 좌파 사회주의 물결, 소위 ‘핑크 타이드’는 그 중심을 이루던 차베스의 죽음과 룰라의 구속으로 점점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 뻔해 보인다. 중남미 핑크타이드의 비극은 “비 올 때를 대비해 우산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감방에 갇힌 좌파 대통령 룰라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은 무엇인가? 인기영합주의, 즉 포퓰리즘을 우리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한다!, 잘한다!” 소리치는 박수갈채에 현혹되어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다가 망하는 게 인기영합주의의 말로가 아닌가? 부정부패와 손잡고 있으면서도 박수갈채가 면죄부가 될 것이라고 믿어버린다. “목사님은 우리 시대의 선지자입니다”라는 알랑방구에 취해 겁 없이 교회 돈을 횡령하고, “목사님 설교가 최고입니다”라는 말에 정신을 잃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인터넷에서 남의 설교를 베낀다. 교인들의 인기에 도취되는 순간 부정한 섹스 스캔들에 빠져들고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헌금이 자기 돈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인기폭발이 사람 잡고 높은 지지율이 감방으로 안내한다. 룰라 대통령이 주는 교훈이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 우산을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인기짱’ 박수가 멈췄을 때를 준비해야 지혜로운 지도자일 것이다. 높은 지지율에 정신 팔다 망하는 꼴은 정치인들로 족하다. 우리 믿음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인기는 우습게 여기고 사람의 눈으로는 측정불가한 하나님의 인기에만 집착하면 된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19 Apr 2018 21:13:00 +0900
(금주의 제언)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을 드리자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06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올바른 자세로 예물을 드려야 기뻐 받으신다. 말 1:8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하나?
 첫째, 구별해서 드려야 한다.
 민 7:1에 보면 “그것에 기름 발라 거룩히 구별 하고” 라고 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미리 준비해서 따로 구별해 놓았다 드려야 한다.
 둘째, 자원하여야 한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기쁨과 자원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헌금을 바칠 때 인색함이나 억지로 드리는 것을 받으시지 아니하고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고후 9:7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교회의 헌금 모범을 말하기를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2-5)라고 하였다.
 셋째, 가장 값진 것을 드려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쓰다 남은 것, 시시한 것을 드려서는 안 된다. 사는 형편이 좋지 않아도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드린다 하더라도 정성이 담긴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죄인 되었을 때 우리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 곧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따라서 우리도 마땅히 가장 값진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겠다. 이것은 드리는 자가 자신의 형편으로서는 최선,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을 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속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신앙이 담겨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흠이 있는 예물을 드리는 것을 여호와의 상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였다.(말1:6-14) 예로부터 왕에게 바쳐지는 진상품은 최고의 품질을 지닌 것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진상품의 품질은 곧 왕에 대한 충성과 공경을 표현하는 척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에게 올리는 진상품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바친 자에게는 엄중한 처벌이 내려졌다. 이것은 비단 세상의 왕에게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로 지켜져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이나 사랑, 시간, 노래 등은 언제나 최상의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참된 사랑과 공경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Fri, 13 Apr 2018 19:56:00 +0900
(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투탕카멘 무덤의 앵크 십자가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05 조명환.jpg
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이집트가 이스라엘 역사에 끼어들게 된 발단은 요셉이 그 나라에 팔려가면서부터다. 이집트에서 총리대신으로 출세한 요셉 덕분에 야곱의 아들 12명이 모두 이집트 이민에 성공한 것이다. 한 가정의 이민으로 출발했으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이집트에서 해방의 깃발을 쳐들고 출애굽을 할 때는 그 한 가족의 인구가 거의 3백만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때 출애굽을 진두지휘한 이는 모세요, 그의 뒤를 쫓다가 홍해바다에서 체면을 구기고 후퇴한 이는 람세스 2세라고 성서학자들은 주장한다. 그 람세스 2세는 24세에 왕위에 올라 90세에 사망할 때 까지 66년을 왕으로 살면서 20살이나 손위였던 모세와 한때는 왕궁에 함께 살면서 파라오 계승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 람세스 2세란 파라오를 두고 나는 종교개혁유럽여행단과 함께 매년 런던을 갈 때면 대영박물관의 ‘얼굴마담’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 박물관 이집트관 최고 명당자리에 그의 얼굴조각이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저렇게 잘 생긴 미소년이 존재했었다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람세스 2세와 함께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 3명을 꼽으라면 대개 클레오파트라와 투탕카멘(Tutankhamun)을 꼽는다. 그런데 그 투탕카멘이 LA에 떴다는 게 아닌가? 다름 아니라 ‘킹 터드(King Tut)’란 이름으로 그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가운데 150여 점의 국보급 조각품과 미라 등이 남가주대학(USC)옆 캘리포니아 사이언스 센터에서 지난 3월 24일 개막되어 내년 1월 6일까지 전시된다는 것이다. 거금 29달러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투탕카멘을 찾아갔다. 그를 람세스 2세와 비교하면 람세스 2세보다 5번째 선배 왕이다. 기원전 1361년 9살의 나이에 왕이 되어 9년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다 18살의 어린나이에 요절한 미소년이었다. 그는 이름없는 파라오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1922년 영국의 하워드 카터란 고고학자가 이집트 ‘왕가의 계곡(Valley of Kings)’에서 3천여 년 이상 파묻혀있던 투탕카멘의 무덤을 통째로 발견하면서 투탕카멘은 일약 이집트의 가장 유명한 파라오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부터 3,300여년 전,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전 1,330년 전, 또 모세보다도 100여 년 전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진시황이 태어나기 전 1,000년 전 사람이다. 그런데 하워드 카터 때문에 유명해진 그의 황금데드마스크는 금방 이집트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11킬로그람의 금으로 제작된 이 황금마스크는 곧 투탕카멘의 상징이 되었고 그래서 하워드 카터의 발굴은 이집트 최대이자, 세기의 발견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투탕카멘이 누워 자던 나무침대, 그의 어좌, 그리고 그를 소재로 한 순금의 다양한 조각품을 둘러보면서 3천3백 년 전에 저런 아름다운 디자인과 찬란한 조각 예술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나는 숨을 죽이며 그 미소년 파라오의 손때가 묻은 다양한 세간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눈에 확 들어오는 게 하나가 바로 십자가였다. 그가 앉아 있던 의자에도 그리고 장신구로도 사용한 흔적이 있는 십자가들이 그의 무덤에 함께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럼 투탕카멘도 예수 믿고 구원받은 크리스천이었던가?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디 있을까? 이 사람은 예수님 오시기전 1300년 전 인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런 저 십자가는 뭐지?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는 ‘킹 터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십자가와 예수님의 십자가와의 관계를 정리하느라 잽싸게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는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죄수 처형도구였다. 알렉산더 대왕시대를 거쳐 로마제국도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이나 노예, 정치범, 가장 악랄한 범죄자를 처형할 때 십자가를 사용했다.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처형 방법이라고 비판이 일자 4세기 이르러서 폐기처분되었다. 그렇다면 이집트 파라오가 장신구로 사용했던 그 십자가의 정체는? 보통 타우 십자가로 불리는 T자 위에 O을 얹어놓은 이 십자가를 앵크 십자가(Ankh Cross)라고 부르는데 이는 지평선 위에 태양이 떠오르는 모양으로, 이집트 최고신 태양신을 숭배할 때 사용되었던 십자가였다. 앵크십자가는 생명과 성(sex)을 상징하기도 했는데 후에 이집트의 콥틱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십자가로 편입시키긴 했으나 이 십자가는 분명 이방인들의 십자가였다. 그래서 후에 크리스천들은 이 앵크 십자가를 ‘손잡이가 있는 십자가’, 라틴어로 크럭스 앤세이타(Crux Ansata)라고 불렀다. 투탕카멘은 팔찌처럼 양손에 달고 다니기도 했을 것이고 그의 왕궁 여기저기 붙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나는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얼마나 많이 십자가를 모으고 있는지를 경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 벽을 십자가 콜렉션으로 장식하고 있는 일부 목사님들의 광적인 십자가 수집활동에 시비를 걸어야겠다. 사순절 단골메뉴가 되고 있는 십자가 전시회도 그렇다. 나도 사무실 한 벽면을 십자가로 채워 가고 있는 중이니 사실은 내 자신에 대한 시비 걸기다.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의 상징일 뿐이지 고대사회의 흉악한 십자가 형틀이 우리에게 결코 중요할 이유가 없다. 예수사랑은 빠지고 엉뚱한 십자가 사랑에 빠져 십자가만 보면 돈이 얼마가 되던 수중에 넣고 보자는 어리석은 집착은 사실 헛되고 헛된 수고가 아니겠는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앵크십자가를 보고 여기저기 이상한 십자가만 보면 덮어놓고 사들이던 내 고상한(?) 습관에도 갑자기 급제동이 걸렸다.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십자가가 있다. 그 허다한 종류에도 불구하고 집약되는 단 한 가지, 예수님의 사랑을 읽어내지 못하면 십자가는 쓸모없는 나무 막대기에 불과할 뿐이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Fri, 13 Apr 2018 19:55:00 +0900
(칼럼)마음 지키기-3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101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마음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어떤 때, 어느 순간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 당시만 마음을 지키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시기 각각으로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다.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한다. 대적 마귀를 대적할 때도 항상 깨어 근신하여 있어야 한다. 벧전 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말씀한다. 마귀가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전방에서 군인들이 경계근무를 설 때에 24시간 계속해서 적들의 동태를 살피며 철책 선을 지키듯이 우리의 마음도 지켜야 한다.
 엡 6:10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깨어 기도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을 통해, 생각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모든 실패자들은 바로 마음을 지키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기에 항상 깨어 기도하자.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마음의 교만을 물리쳐야 한다. 왜냐? 마음이 교만하면 패망하게 된다. 교만이 성도인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요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한다. 교만이 무엇인가? 교만은 자신이 제일이라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믿고, 의지하고,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자이다. 자신 혼자 힘으로, 지식으로, 능력으로 자신이 최고인양 살아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물리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한 자는 패망하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마음이 교만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한다. 항상 교만을 버리고, 겸손의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만해지려는 악습이 있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자는 아무도 없다.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나아지면, 높아지면, 돈이나 재산이 많아지면 그만 목에 힘을 주고 교만해지는 것이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정치인들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후보시절에는 겸손한 것 같은데 당선되고 나면 교만해지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불신자들만 그런가? 성도들인 우리는 안 그런가? 안타깝게도, 성도인 우리도 역시 그러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이 주어지면 그것을 계급처럼 여기고 그만 목에 힘을 주는 직분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인 우리는 이 문제를 조심해야 한다. 신앙의 연조가 오래될수록 더 중한 직분이 주어질수록 더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더 축복을 받을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할수록 충성, 봉사를 더 많이 할수록 헌금을 더 많이 할수록 더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한다. 성경에 실패자들의 면면을 보면 교만으로 인하여 실패자들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역시도 처음에는 겸손한 사람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교만하여 왕의 지위를 남용하여 제사장의 사역을 넘보다가 결국은 말씀을 불순종하여 버림을 당하는 불행자로 전락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겸손한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바로 교만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겸손함으로 마음을 지키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Fri, 13 Apr 2018 19:45:00 +0900
(금주의 제언)주의 능력 받은 자 되어라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084 박재호목사.jpg
박재호 목사(새소망교회 담임)
 
주의 능력을 받은 자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말씀하셨다. 믿는 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또한 자만하지도 않고 오직 주님 안에서 겸손하게 자신의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하고 승리와 성공을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비록 나는 나약하지만 천지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능력의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시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기 바란다. 아무쪼록 주님 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풍성히 받아 세상을 이기고 한결같은 믿음과 세상을 이기고 한결같은 믿음과 용기로 승리하며 축복받고 성공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한다.
 골동품 경매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경매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높은 가격에 경매되어 팔리고 있었다. 그런지 얼마 후에 경매인이 낡고 부서진 바이올린을 끄집어내어 높이 치켜들고 “얼마”라고 소리치자 모든 사람이 킥킥 대고 웃었다. 사실 그것은 너무 낡고 보잘것없는 바이올린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사람이 값을 1쉴링(1파운드의 20분의 1)이라고 부르니 폭소가 터지며 그 값으로 그에게 주라고들 하였다. 경매인은 잠깐 멈추더니 “이것을 누가 켜볼 사람 없습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경매장 안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때 고요한 틈을 해치고 어떤 노인이 단위로 올라서더니 그 바이올린을 턱에 괴고 몇 번 활을 시험해 보고서는 그 낡은 악기로부터 절묘한 선율을 켜내니 그곳에 있는 사람이 모두들 듣고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머금었다. 아름다운 연주가 끝나자 경매장이 터져라고 격찬과 박수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경매인은 다시 그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값을 물었다. 5파운드에서 10파운드로 계속 값이 뛰어 오르더니 결국 100파운드로 낙찰되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바이올린은 전과 다름없는 낡고 보잘것없는 것 그대로였으나 사람들은 바이올린의 대가인 연주자의 손으로 연주된 감동적인 연주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삶의 값도 이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체로서는 쓸모없고 무력한 존재이지만 바로 늙은 노인의 손에 들린 낡은 바이올린에서 아름다운 연주가 흘러나오듯이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내 고집, 내 생각, 내 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잡힌 자되어 기적 같은 축복을 산출하는 성도들 되기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교회가 능력을 잃고 무력할 때 이단이 생긴다. 교회가 유무상통의 능력이 없을 때 공산당이 생겼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시게 될 때 내 인격과 내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신령한 능력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 속에 임하게 된다. 우리는 계속 기도함으로 신령한 능력을 받게 된다. 성도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자기 힘에 맞게 적당히 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열심을 쏟아 힘에 지나도록 행하게 될 때 더 큰 능력을 받게 된다.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는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고 하였다.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5 Apr 2018 05:48:00 +0900
(칼럼)마음 지키기-2 http://nammicj.net/n_news/news/view.html?no=9080 박철수목사.jpg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담임)
 
마음을 지키는 것 중요하다.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바른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모든 범죄들은 모두 마음을 잘 지키지 아니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 과도한 욕심을 버려야 마음을 지킬 수 있다. 욕심이 문제이다.
 요즘 계속해서 Me too 사건으로 나라가 술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폭로되고  있다. 왜? 그와 같은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가? 이런 저런 이유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그와 같은 충동이 마음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마음을 잘 지켰다면,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욕심의 마음, 충동을 절제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해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고 그러한 일을 통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살게 되고 가해자 역시 그러한 일이 드러나 사회에서 매장되는 불행자로 전락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음을 지켰다면 그처럼 피해를 주며, 평생토록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뇌물 수수 사건의 이유도 역시 물질 욕심이다. 욕심 때문에 부당한 돈을 탐하다가 뇌물을 수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은 한이 없다. 오죽하면  99마지기 가진 사람이 한 마지기 가진 사람의 땅을 빼앗으려고 한다는 속담도 있겠는가? 따라서 욕심을 버려야 마음을 지킬 수 있다. 어떻게 욕심을 버릴 수 있는가?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지킬 수 있다. 만족하는데 무엇을 욕심낼 것이 있는가? 딤전 6:7-8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며칠 전 92세 장수의 복을 누리고 소천하신 성도님 장례를 치르는 중 수목 장으로 안장하셨는데 유골이 안장된 곳이 불과 사방 한 자 면적임을 볼 수 있었다. 육신의 삶은 90 평생을 살았어도 최종적으로 차지하는 것은 불과 사방 한 뼘 정도의 소유로 마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욕심을 낼 것이 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만족하지 않고 자꾸 더 소유하려고, 더 부자가 되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거짓말을 하고 부당하게 살고 부당이득을 취하고 뇌물을 받고 세금을 포탈하고 그 결과 법을 어기므로 형사처벌을 받게 되고, 세상에서 지탄을 받는 대상이 되는 불행한 인생으로 전락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성도인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자족할 줄 모르고 욕심에 의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부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성도로서 진실 되게 살지 못하고 거짓된 모습으로, 부정직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떳떳한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인정을 받지 못한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 약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한다. 딤전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래야 마음을 지킬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지키자. 자족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지키자.
]]>
기자 | 오피니언>칼럼> Thu, 05 Apr 2018 05:43:00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