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근 목사(미성대 명예총장)
목사가 된 뒤에는 노래방에 가는 일이 거의 없다. 물론 ‘거의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가끔 있다는 뜻이다. 담임목회를 할 때에는 교회 청년회원들과 어울려 코리아타운 가라오케에 다녀온 적이 몇 번 있었다. 내 차례가 되면 주저하지 않고 몇 곡 뽑는다. 이미자의 ‘총각 선생님’을 ‘총각 목사님’으로 바꿔 부른다. 나애심의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부를 때도 있다. 과거가 꽤 많은 남자이기 때문이다. ‘하숙생’을 부른 최희준의 노래였던가, ‘인생은 나그네길’이란 것도 대학생 때 애창곡이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나”를 물론 개작한다. “인생은 나그네길, 하늘에서 왔다가 지옥으로 떨어진다네......”
하여튼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나그네’는 ‘나와서 가는 사람’ (出去人)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나그네 인생이 된다. 이북에서 피난 온 것도 나그네 생활이고, 미국에 이민 온 것도 나그네 길이다. 요즈음에는 교통통신이 발달해서 관광이 삶의 필수가 되었다. 그리고 죽어서 무덤에 묻힐 때까지도 나그네가 된다. 그런데 ‘인생은 나그네’라는 생각은 사뭇 철학적 지혜에 속한다. 그것도 개똥철학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다. “석가는 무엇을 위하여 설산에서 고행을 하였으며, 예수는 무엇을 위하여 황야에서 방황하였으며, 공자는 무엇을 위하여 천하를 철환하였는가?” 중고교 교과서에 있는 민태원의 “청춘 예찬”의 한 구절이다.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지라는 주제의 명문이다. 세계 3대 성인들이 한 결 같이 큰 뜻을 품고 ‘나그네 인생’을 산 대표적 인물이라는 분석이다.
그래 그런가, 성경의 영웅들도 단연 나그네의 길을 간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까지 연속적으로 나그네 길을 걸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인 야곱이 ‘험악한 나그네 생활’을 했고, 이집트 총리가 된 그 아들 요셉도 그랬다. 모세는 출생 때부터 나일 강 갈대상자에 담겨 정처 없이 흘러갔고, 이집트를 떠나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헤매며 목자 노릇을 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동족을 이끌고 가나안 복지를 향한 나그네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다윗의 인생길, 바벨론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하나님의 선민들...... 신약성경의 세례 요한, 베드로, 바울, 인도를 거쳐 한국까지 왔었다는 도마.....물론 앞의 ‘청춘 예찬’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팔레스타인 땅을 끊임없이 돌아다녔던 나그네 가운데 나그네였다. 게다가 그분 자신이 스스로 나그네 인생임을 밝혀 말씀했다. 여우나 새들도 거처가 있지만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는 표현(마8:20)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글쓴이도 ‘청년 예수 방랑기’라는 작품을 여러 개 썼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그네 생활은 사람들의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 있다. 일부러 나그네가 되셨다는 점이다. 어떤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나그네 길을 선택하셨다. 그래서 나그네라기보다는 순례자(巡禮者, pilgrim)라고 부른다. 순례란 기독교 신자들의 이스라엘 성지방문, 혹은 이슬람 신도들의 메카 방문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는 ‘돌아다니며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아니, 예배하기 위하여 돌아다닌다는 뜻이 더 맞는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하여 그 머나먼 길을 달려온 것과 같다.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을 찾아내게 되니까 얼마나 기뻐했는지, 성경에는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했다. (마2:10-11). 결코 나그네의 설움이나 허무함 혹은 공포심은 얼씬도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주일이면 하나님의 집 곧 교회로 여행을 떠난다. 관광도 아니고,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말씀을 선물 받는 순례자가 된다. 하늘나라에 가면 천사처럼 성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례자가 될 것인데, 그 예행연습을 한다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예배석에 앉으면 누구든지 천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