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남 목사(서울교회 담임)
사람은 두 종류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쫓기며 사는 사람과 달려가며 사는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이 달려가는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 같은 태양 아래서도 그렇다. 한 사람은 태양을 등지고 산다. 그래서 항상 자기 인생의 그림자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태양을 마주보며 산다. 태양이 인생의 그림자를 뒤로 물려주어 항상 밝은 태양 아래서 산다.
달리는 인생은 메마르지 않는다. 목마름은 있어도 메마르지 않는다. 채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쫓기는 인생은 메마르다. 메마르면 가시가 된다. 그 가시가 먼저 자신을 찌른다. 그 가시로 이웃도 찌른다. 메마른 인생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여전히 ‘어찌하여’ 하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항의한다.(16, 18, 24) 바리새인들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나라인 줄만 알았는데, 예수님이 천국을 갖고 오셨다. 천국의 모든 복을 갖고 오셨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천국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시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시대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성령을 구하면 풍성히 부어주시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에겐 감동이 있다. 주의 일을 그 감동으로 한다. 억지로가 아니다. 감동 때문에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년 동안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주지 않으셨다. 말씀이 없으니까,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는 법을 만든다. 이게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유전. 그것이 기준이 돼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한다. 은혜 없는 신앙생활의 특징이다. 교회를 다녀도 은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 고집이 세다는 것. 타협이 없다는 것. 코만 비틀어도 캑캑 대고, 조금만 추워도 감기 걸려서 며칠을 꼼짝 없이 누워 있어야 하고,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고, 아프면? 돈도 필요 없고, 이런 약한 존재가 인간인데, 그래서 성경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지렁이 같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아들까지 주셔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니 감사의 사람으로 변하고, 기쁨의 사람으로 변하고 기도의 사람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은혜가 없으니, 저 사람 틀렸고, 이 사람 맘에 안 들고, 기쁨이 없다. 자기가 뒤틀렸기 때문이다.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1. 새 믿음엔 깨달음이 있다.
유대 사회? 세리를 죄인 취급했다. 세금 거두면서 자기 민족에게 못된 짓을 많이 했다. 이 사람들을 부를 때 아예 도둑놈이라고 부르든지 죄인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세리들은 죄가 많았고 못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과 접촉하질 않았다. 그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더러워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 중의 한 사람인 레위를 제자로 삼으셨다. 놀라운 것은? 레위가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 자리에서 세리를 그만 둔 거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무슨 말? 레위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하고 싶었던 거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순간 그는 모든 과거의 죄를 털어버렸다. 그리고 위대한 말씀의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시기 전 까지, 세리들은 감히 예수님께 나올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과 똑같은 세리 레위를 부르신 거다. 그렇다면? 나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나도 위대한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여러분, 캄캄한 밤에 보초를 서는 군인이 있다. 얼마나 춥고 배가 고픈지, 새벽이 올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새벽별이 나타났다. 그 별을 보는 순간, 이 군인은 이제 새벽이 오는구다. 이제 아침이 오는구나. 하면서 희망을 갖는다. 동이 훤하게 밝아져야 아침이 된 게 아니다. 새벽별만 보여도 아침이 온 거다. 추운 겨울에도 파릇한 보리싹이 올라오면 아무리 이젠 봄이 왔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결말을 봐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이 아니다. 징조만 보고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된 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사소한 것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된 것을 볼 수 있기를 축원한다. 깨닫는 게 복이다. 이미 은혜가 시작된 거다.
2. 새 믿음은 능력의 삶을 살게 한다.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 금식은 사람의 먹는 욕망을 절제하는 것이다. 먹는 욕망이 얼마나 강한가? 하나님 앞에서 금식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어떤 큰 어려운 일을 당해서 우리 힘으로는 그 일을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때, 이때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금식한다. 음식을 먹고 살 가치조차 없고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이미 죽은 목숨과 같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자세를 대단히 귀하게 생각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해 울고 금식하고 기도하면 들어주실 때가 많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금식은 신앙심을 평가하는 기준. 그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신앙이 좋다는 말을 들으려고.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금식을 지키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욕망을 억제해서 죄를 덜 짓게 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치료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과 인생을 주셨다. 이때는 당연히 음식을 먹어 기운 차려야 하고 기뻐해야 할 때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으로 오셨다. 오셔서 우리의 모든 삶을 완전히 바꿔 놓으셨다. 저주의 자식에서 축복의 자녀가 되었다. 천사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래서 새 힘을 내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다. 가스의 새로운 힘이 생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강 같은 역사로 능력이 역사하는 사람들이다. 낡은 부대는 유대교 관습 전통이다. 복음을 담을 수가 없다. 유대교는 무조건 하지 말라는 것.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보물과 축복과 은혜를 갖고 오셨다. 천국의 맛만 보여주신 게 아니고 천국을 그대로 주셨다. 천국의 싱싱함, 자유로움 능력을 주셨다. 지금 우리 안에는 천국의 생명이 가득 차 있다. 콜라 흔들어서 따면 거품이 나오면서 톡 쏘는 맛이 그게 콜라 맛이다. 우리가 입을 열면 생명이 넘쳐 나면서 지저분하고 말도 되지 않는 오래된 것들을 닦아 버린다. 능력의 삶이 시작된 거다.
3. 새 믿음엔 자유가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하지 못하도록 규칙을 만들어 정해 놓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노골적으로 그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깨뜨리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부러 사람들의 병을 많이 고치셨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다른 것은 많이 양보하셨는데 안식일 문제만을 추호도 양보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추수하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 밀밭에 들어가 손으로 이삭을 잘라 먹었다. 죄가 아니다. 당시 약자에 대한 배려다. 그런데 문제는 이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이요 그들의 눈에 추수를 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대단한 위선으로 보셨다. 사람이 안식일에는 배가 안 고프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남의 밀밭에 들어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밀을 잘라 먹게 하신 것은 굶어 죽지 말라고 하신 것인데 안식일에는 배가 고프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가 고픈 데는 안식일이 따로 없는 것이다. 사람을 죽여 가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참된 율법의 정신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율법은 굶는 자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살리는 것이 율법이라는 말이다. 신호등.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어 간다. 위급하다. 그때? 구급차? 신호 어기면서더라고 환자를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 교통질서? 사람 생명 살리려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금식과 안식일을 오랫 동안 지켜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모두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감히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나?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예수님께서 우리를 새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새 시대에 맞는 맛은 새 포도주다.
우리는 생기가 넘치는 포도주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능력이 넘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낡은 부대에 든 술을 좋아 한다. 당연하다. 이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며 오늘 나에게 그 능력이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