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오라클을 만나다(6): ‘그’라는 것을 아는 법(1)
“나는 네가 네오인 것을 안다.” 이 말로 대화를 시작한 오라클은 화제를 바꾼다. “너는 모피어스가 왜 너를 이리로 데려왔는지 안다.” 주어를 ‘나’에서 ‘너’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주동사는 여전히 ‘안다’이다. 주어를 바꿔도, 나에게도 너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구원과 무관하지 않다. 더 나아가, 이것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 그 자체이다. 요한복음 17장에 길게 기록되어 있는 이 기도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1-3).” 구원의 신앙으로 얻게 되는 영생은 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참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지 못하면 영생도, 구원도 없다는 예수님의 기도 말씀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망한다고 선지자 호세아는 말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무엇에 대한 지식인가? 바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6:3).” 네오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자, 그녀는 묻는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네가 ‘그’인 것 같아?” 이 작품이 직접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오에게서 예수님과 닮은 점이 많이 발견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지 않은 점이 완전히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부분은 기독교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장면이다. 오라클의 이 질문에, 그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답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시지 않겠지만, 여기서 발견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바로 ‘자기부인’이다. 스스로 무엇이라 생각하거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다. 네오 스스로도, 모피어스가 자기가 ‘그’라고 말하는 것에 거의 설득을 당했다고 말한다. 거의 설득을 당했지만, 설득 당하지 않았다. 결국 그것을 버린 것이다.
오라클은 그의 대답의 두 부분을 모두 지적한다. 우선 네오는 ‘솔직하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나중에 볼 중요한 말들을 덧붙여 해 준다. 또 그는 ‘잘 모른다.’ ‘그’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모피어스가 ‘그’에 관하여 해 준 이야기에 자기가 부합한지 몰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또는 너무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과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약간 어안이 벙벙한 상태여서 모른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영화의 서사 구조상으로도 그렇지만 - 나중에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반전의 시작이 바로 이 지점이기 때문이다 - 이 부분만큼 기독교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