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모피어스를 만나다(6): 실체란 무엇인가
죽어야 산다. 살되, 다시 나야 한다. ‘느부갓네살’ 호가 네오를 건져 올린 후, 그는 눈이 아픈 것을 느꼈다. 왜 눈이 아픈 것이냐 하고 묻자, 모피어스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즉, 지금까지 실제로 소경이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매여 사는 동안에는 안목의 정욕이 강하게 작용한다. 거듭 하는 이야기이지만, 하와가 죄를 범하는 과정의 시작이 바로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창세기를 원어인 히브리어로 보게 되면, 하와의 범죄 과정을 동사 세 개로 묘사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보았다, 좋았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취했다(창 3:6).” 동일한 동사들의 나열이 홍수 심판을 촉발하는 과정에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좋았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취했다(창 6:2).”
이 두 경우 다 눈을 제대로 - 즉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 사용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썼기 때문에 범한 죄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새로운 눈을 가지지 않고는 계속 동일한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9).”
그러므로 어머니 뱃속에서 가지고 태어난 눈을 그대로 유지하면 범죄하게 되어 있다. 전혀 다른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범죄의 근원은 눈이 아닌 마음이다. 마음에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눈의 욕망이 발생하는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그렇기 때문에, 인간 영혼의 중심기관인 마음 자체가 아예 다른 것이어야 한다. 기존의 것을 고쳐서 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도 다 그렇게 한다. 그것을 위해 애를 쓴다. 이를테면 불교에서는 그것이 열반을 목적으로 하는 참선이요 팔정도다. 열반에 들지 못하면 환생하며 이것이 바로 윤회이다.
놀랍게도, 밤 늦은 시각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의 반응이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 3:4)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참선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당시 히브리 종교가 타락하고 세속화되어 배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교에서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신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5-6).” 즉, 모태에서 난 것을 고쳐 쓰려는 자기 노력은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노력은 하나도 인정하시 않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난 생명을 고쳐 쓰시겠다고 하지 않으신다.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 난 생명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이다. 이렇게 새로 형성하는 것, re-form하는 것이 바로 개혁, 하나님의 개혁이다. 루터도, 칼빈도, 또 다른 개혁자들도, 하나같이 외친 개혁이 바로 이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 형성되는 영혼, 새로 형성되는 예배, 새로 형성되는 교회, 새로 형성되는 문화, 새로 형성되는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