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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9월, 나는 한국에 아내와 아이 둘을 두고 미국으로 유학왔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애나하임에 있는 Lutheran Bible School에서 성경도 공부하고 영어도 공부하면서 지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일주일 전 시집간 누이동생이 한국에서 아이 셋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미국 미시간에서 공부하고 있던 남편 이도영 박사에게로 오기 위해 수속하던 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것이 10월 말이었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고 당장 가족들을 데려오려고 초청장을 보냈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채풀에서 가족이 만날 수 있도록 기도했고 가족들도 한국에서 열심히 기도했다. 드디어 12월 22일 가족들이 미국에 도착했다.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도의 응답을 또 한 번 체험했다. 아현성결교회 부목사로 봉직하다가 왔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 교회에 계속 출석했다. 신자들이 기도해 주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 이었던 아들은 아직 11월이었는데도 12월 22일에 미국에 간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다녔다. 아직 수속 중이요, 비자도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그렇게 말하면서 다닌 것이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우리 가족은 정말 아들의 말대로 그 날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또 대사관에 비자 인터뷰를 갔을 때, 제일 먼저 우리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고 비자를 내 주었다. 아이들은 “아빠를 만나게 해 주세요” 간절하게 기도한 것이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아내와 아이들은 12월 22일에 미국에 도착했다. 어른들의 기도보다 순진한 아이들의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시 차가 없었기 때문에 허경삼 목사님께서 엘에이 공항까지 드라이브해 주셨다. 가족들과 기쁨의 만남이었다. 두 아들이 “아빠”하면서 나에게로 뛰어오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4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나는 가족이 오면 같이 살려고 애나하임에 있는 올리브 플라자 아파트 2층 33호를 이미 계약해 놓고 있었다. 아이들이 있으면 방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돈이 없어서 원 베드룸을 원했으나 아이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는 아이들과 함께 자는 일이 없기 때문에 투 베드룸을 구했다. 방 하나는 나와 아내가 쓰고 또 하나는 아이들이 썼다. 집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이 이사 나가고 들어올 때 페인트를 새로 칠하기 때문이다. 카펫은 오래 되어서 더럽고 냄새가 났다. 매니저에게 카펫을 갈아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영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갈아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냥 지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매니저가 우리에게 카펫이 오래 되어서 갈아주겠다고 말한 것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이사할 때 쯤 새 카펫으로 갈아주었다. 돈도 없이 미국에 왔다. 밥상도 없고 침대도 없고 카우치도 물론 없었다. 당장 냉장고가 필요했기에 구세군 점포에 가서 값싼 중고 냉장고를 샀다. 거기에는 중고품들을 아주 헐값에 팔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 식구들은 밥상을 대신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밥이며 반찬을 놓고 두 손을 모아 감사 기도를 드렸다. 어린 것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했다. 크리스마스가 되었는데 츄리를 살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어린 것들에게 크리스마스 기분은 나게 해 주어야 되겠다 생각하여 동네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깡통에 심어 놓고 “이게 크리스마스 츄리야” 말하면서 방 한 구석에 놓았다.
그래도 미국 생활이 즐거웠던 것은 내 옆에 나의 식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래층에는 미국 사람들이 살았는데 아이들이 층계를 뛰어 오를 때마다 밑에서 쿵쿵 신호를 보냈다. 조용 조용 다니라는 뜻이었다. 대로는 마늘을 다진다고 쿵쿵 찍으면 아래층에서 또 그러지 말라고 신호했다. 그러면 숨을 죽여 가면서 손의 힘으로 마늘을 짓이겼다. 아이들이란 뛰는 것이 생리인데 그것을 못하게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러나 아무 말 않고 잘 참아냈다. 낮에는 미국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층계를 오르내릴 수 있었다. 아래층의 미국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서운지 눈치를 줄 때마다 간이 콩알만해졌다. 그때는 모든 것이 인종차별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백인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면 무조건 인종차별이라고 말했다. 미국 와서 한영사전에서 제일 먼저 찾은 단어가 인종차별이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체킹 어카운트를 열려고 했는데 받아주지 않았다. 코 싸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은행에서 퍼스널 체킹 어카운트를 오픈한 날 개스 스테이션에서 체크를 내었더니 받지 않았다. 나는 인종차별이라고 흥분했다. 인종차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데 당시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만 연결 지어졌다. 그리고 하찮은 일에도 쉽게 흥분되었다. 그러나 차츰 미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고 미국의 생활과 문화에도 익숙해지면서 영어도 늘게 되고 여유도 생겼다. 그리고 무서움과 두려움도 없어져 갔다.
아파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방과 후가 되면 아파트 넓은 공간에서 동네 아이들이 놀았다. 둘째 아이는 키도 작고 몸도 허약했다. 동네 아이들하고 놀 때 항상 그들 밑에 깔려서 끙끙거리는 것을 보았다. 둘째 아이가 장난으로 웃으면서 놀고는 있으나 내가 볼 때는 보통 아픔이 아니었다. 나는 동네 아이들을 야단치면서 발로 걷어차고 우리 아이를 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두 세 시간 후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다. 동네 아이들이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우리를 발로 찼다고 증언했다. 나는 몹시 떨렸다. 그러나 나는 밑에 깔린 자식을 끄집어 내려고 아이들을 옆으로 밀어냈을 뿐이라고 오히려 화를 내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화부터 냈는지 모른다.
몇 번 이야기 해 보다가 말이 통하지 않았는지, 내가 무식하게 나가서 그랬는지 그들은 하나 둘 집으로 가 버렸다.
그 후 나는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태권도 기본 동작을 몇 번 보여주었다. 학생 때 태권도를 조금 배운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태권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태권도복을 입고 도장에 가고 오는 것을 보면서 그 후부터는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무섭게 생각했다. 아이들이 미국에서 잘 지내려면 태권도가 필수구나 생각한 일이 있다.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부딪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우리는 가난하게 미국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 미국에서 처음 삶을 시작한 아파트 2층 33호는 우리 가족의 행복의 보금자리였다.
미국 생활은 가족 중심이다. 일을 끝내고는 이차 삼차라는 것이 없다. 곧장 집으로 와서 가족들과 함께 지낸다. 우리는 가난했으나 행복했다. 가진 것이 없었으나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다. 행복과 사랑이 진한 감동으로 가족들 사이에 교류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좋은 것들을 우리가 찾는 한 결코 가난하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는 고난이 있었으나 희망이 있었고 무언가 좋은 것들을 찾고 있었다. 희망이 없으면 그 고난은 죽은 것이다. 속히 해결해야 한다.
영국 시인 사무엘 다니엘은 “적게 가진 사람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많이 원하는 사람이 가난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많이 가져도 가난한 자가 있고 적게 가져도 부한 자가 있다. 우리는 가난한 미국 생활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부했고 행복했고 아름다웠다. 행복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다.
미국에 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동서남북 아무리 둘러보아도 낯모르는 사람들 뿐이다. 외롭고 고독한 생활 속에서 우리 가족은 서로 더욱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더욱 진한 사랑으로 서로를 돌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동네 아이들한테 고통 당하는 것을 볼 때 눈에 불이 켜졌던 모양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나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1)
미국으로 이민 온 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강한 믿음과 가족 사랑으로 더욱 강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다. 가난했으나 행복했던 시절, 너무나도 감동적인 가족 사랑의 이야기이다.
고남철 목사(나성충신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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