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캐스피언: 진리에 대한 반응(3)
진실 안에서, 믿음과 역사는 같이 간다. 믿음이란 진리와 그 역사를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는 필연적으로 ‘기억’이라는 것을 요구한다. “우리 오소리들은 옛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생각해 봐, 피터 태왕도 인간이었잖아?” 진리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거나 기억하려 하지 않는 순간, 믿음은 약해지던지 사라진다.
믿음에 있어서 역사가 이토록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 시작인 창세기부터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경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구약성경 39권 중 무려 12권이 역사서이다. 그 외에도 성경 첫 다섯 권인 이른바 ‘모세 오경’도 상당부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더 나아가, 예언서들도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며 미래의 역사를 관망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신약성경 27권 중 순수 역사서가 1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의 역사를 기록한 복음서가 4권이며, 무수한 서신서에 초대교회의 역사가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다. 그 뿐인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천지창조에서부터 종말까지의 역사 전체를 여러 상징과 비유로 기록하고 있다. 즉, 성경전서 66권에서 역사를 빼면 남는 부분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왜 믿음과 역사가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까? 왜 믿음에 역사가 이렇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믿음은 사람의 영적 정체성을 확립해 주기 때문이다. 트리플헌터가 나니아의 역사와 아슬란에 대한 역사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하자, 난쟁이 트럼프긴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그런 옛날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는 말이야?... 요즘 세상에 누가 아슬란을 믿나?”
진짜 나니아 사람이지만 냉소적인 트럼프킨에게 진리로 맞부딪힌 것은 다름아닌 텔마르 사람 캐스피언이었다.
“나는 믿어요. 설사 전에는 믿지 않았더라도 지금부터는 믿기를 원해요.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 가운데에서 아슬란 님을 비웃던 사람들은 말하는 동물들과 난쟁이 이야기에도 코웃음을 쳤어요. 저도 가끔씩 아슬란 님의 존재가 의심스럽기도 했고요. 아울러 여러분 같은 이들이 정말 있는지도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 이렇게 있잖아요.”
그러므로 진리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 역사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진리에 대한 지적 동의는 결코 참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길가’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 씨앗으로 마음에 뿌려졌는데, 그에 대하여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 공중의 새, 예수님의 설명으로는 마귀가 와서 빼앗아 가버리는 종류의 ‘신앙’인 것이다.
그러나 참 신앙으로 신앙의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과거의 선조들도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오늘에 이른 것이며, 우리 또한 이 흐름 안에서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미래를 향한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며 입술의 시인이다. 이것이 바로 ‘공적 신앙고백’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도르트 결정’,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같은 옛 신앙문서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신자에게 이것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역사적 참 신앙이라는 증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