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샤스타: 자유와 방종(2)
영적 방종은 영적 게으름을 동반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자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하는 암말 휜은 참 자유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말들이니까 훨씬 더 힘든 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압제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영혼이 가볍기 때문에, 더 크고 더 힘든 일을 노예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브리는 갈수록 느리게 걸었다. 자유롭게 되자, 더 게을러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게으름을 가만 두고 보지 않으신다. 먼저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렘 5:31)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과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제사장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여 자기 노예로 부리는 자들이다. 그런데 더 기가 찬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러한 압제를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자유보다 더 좋게 여긴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듣고서도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기어이 게으름을 떨쳐 내신다. 칼로르멘의 군대가 아첸랜드의 국경에 이미 집결했다는 것을 알고도 늑장부리는 브리의 등 뒤에, 갑자기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혼비백산한 브리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빨리 달렸는가 하면, 샤스타가 “심하다 심해! 이 정도면 사자도 못 쫓아올 거야”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참으로 브리는 최고의 군마였던 것이다. 그 때 브리는 깨닫는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까지 빨리 달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크게 후회한다.
그런데 그를 더욱 부끄럽게 만든 사건이 일어난다. 함께 달리고 있던 암말 휜의 뒷다리를 그 사자가 물어뜯으려고 할 때, 그것을 본 샤스타가 자기가 부상을 입을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브리의 등에서 뛰어내려서 휜과 휜을 타고 있던 아라비스를 구하기 위해 반대로 달려간 것이다. 이것을 본 브리는 후회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시 칼로르멘의 노예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매우 부끄러워한다. 그제서야 자기의 행동이 노예와 같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그토록 되기를 바라는 나니아의 말하는 동물, 즉 자유인이 되려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산골짜기에서 만난 은둔자는 이렇게 말한다. “착한 말아, 너는 그저 자만심을 잃었을 뿐이란다. (…) 겸손해지려면 옳은 말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해. 넌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다. (…) 나니아에서는 어림없어. [하지만] 너 스스로 남보다 뛰어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썩 괜찮은 말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렇다. 자유를 얻은 사람이 방종으로, 또 게으름으로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은 ‘자기 부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옳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남보다 더 낫게 보이려는 자존심 경쟁을 일삼고, 교회에 자기보다 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고참행세를 하려고 하면서, 정작 성경을 강해하는 시간에는 딴 생각을 하거나 심지어 졸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죄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이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