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환의 쓴소리, 단소리)맨발의 여왕
2022/09/21 21:51 입력  |  조회수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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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 목사(크리스천위클리 발행인)

 

 향년 96세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오는 19일 열리는데 러시아의 푸틴과 중국의 시진핑 빼고는 거의 모든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국 국장이 아니라 ‘세계국민장’이 된 셈이다. 푸틴이나 시진핑은 본래 지구촌 왕따를 자청하는 사람들이니 이상할 건 없다.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틀어막아 금년 겨울 유럽을 빙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야만적인 적대감으로 세계의 눈총을 받는 푸틴이 무슨 면목으로 영국 초상집에 얼굴을 내밀겠는가? “70년을 재위한 현대사의 산증인”, “한 시대가 저물다” “런던 브리지가 무너졌다” “영국의 정신적 지주 영면” 등등 여러 말로 여왕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윈스턴 처칠부터 이번 달 취임한 리즈 트러스까지 무려 15명의 영국 총리를 배출했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다. 미국 대통령도 무려 13명을 거쳤다고 한다. 한때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지만 그게 어느 시절 얘기인가? 영국 왕정도 부침의 역사를 거듭하며 근대에 이르러 국민의 눈칫밥을 외면할 수 없는 시대를 맞고 있다. 여왕은 그 나라 최고의 권력자요 최고의 부자인 셈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우습게 보고 통치하고 군림하려고만 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사치의 여왕이라는 필리핀의 이멜다나 프랑스의 마리 앙트와네트처럼 화려하게 거만을 떨고 살았더라면 여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금 같은 세계적인 찬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영국이 어떤 나라인가? 의회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다. 민주주의의 요람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왜 왕정이 필요해? 영국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못 했을리 없다. 그들은 등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주제에 반기를 드는 반대세력들이 여기저기 쑤근댈지라도 왕가의 중심을 지탱하며 70년을 재위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겸손, 나는 그게 답이라고 생각한다. 199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영국 최고위직으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여왕은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안동 하회마을이었다. 여왕은 73세 생일을 그곳에서 맞았다. 바로 그때 류성룡 선생의 종택인 충효당을 방문하고 마루에 오를 때 한국의 전통에 따라 여왕이 신발을 벗은 것이다. 한옥 마루에 들어서면서 여왕이 신발을 벗었다고? 이 일화는 ‘신발벗은 여왕’, ‘맨발의 여왕’이란 제목으로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문화적으로 좀처럼 맨발을 노출하는 일이 없는 여왕이 신발을 벗는 순간 외신 기자들은 수없이 플래시를 터뜨렸고 소탈한 여왕의 품격과 겸손함은 여과없이 국제전파를 탔다. 여왕이 다녀간 이후 하회마을은 매년 1백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며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영국 최고의 진객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인과 세계인의 관심을 받았고, ‘한국 속의 한국’으로 꼽히는 안동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극적인 계기가 됐다. 

 물론 안동의 양반들도 오만하고 콧대 높은 여왕이 아니라 신발을 벗는 여왕의 파격적인 겸손 행보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안동은 지금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다양한 여왕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 오프닝 행사에서는 여왕의 드라마틱한 등장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007’영화의 제임스 본드인 영국배우 다니엘 크레이크가 버킹검 궁전을 찾아가 엘리자베스를 알현한 후 헬기를 함께 타고 올림픽 스타디움에 도착해서 뛰어내리는 모습이 연출된 것이다. 물론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건 대역을 썼지만 절묘한 타이밍과 연출로 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보던 세상 사람들은 탄성을 자아냈다. 여왕은 그렇게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대중에게 접근하고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남편 복은 많아서 73년의 결혼생활을 했으니 기록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자식 복이 없었다. 앤드류 왕자의 불륜설 때문에 골치도 아팠지만 큰 아들 찰스 왕세자가 영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하던 다이애나를 따돌리고 바람을 피웠으니 왕실의 명예에 먹칠한 셈이었다. 더구나 다이애나가 1992년 ‘다이애나의 진실’이란 책을 통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폭로하면서 찰스 왕세자와 여왕은 동반 비난 여론에 시달렸다. 그래서 여왕은 1992년을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꼽기도 했다.

 여왕이 죽을 때까지 왕위를 찰스 왕세자에게 물려주지 않았던 이유도 아마 큰 아들이 미덥지가 못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찰스 3세로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가 모친이 받았던 국민적 존경까지도 승계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세상 가질 것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검소하고 겸손하게 국민들과 소통하려 애쓰면서 견고하게 왕권을 지켜왔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9988234로 귀결되었다고 본다. 농담 삼아 우리가 하는 말이 바로 9988234란 소원 아닌가?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다가 세상과 작별하는 것이다. 그런데 99세까지는 아니어도 96세까지 살면서 서거하기 이틀 전까지 신임 총리의 신고를 받을 만큼 건강의 축복을 누렸고 정말 이틀 만에 눈을 감았으니 참으로 복받은 인생 아닌가? 지구촌으로서는 손해가 막대하다. 겸손하고 위대한 리더 한 사람을 잃게 되었으니까. 지난달엔 고르바초프도 세상을 떠났다. 훌륭하다는 사람들은 죄다 세상을 떠나고 전쟁이나 테러를 일삼는 불량배들만 남아서 세계의 패권을 틀어쥐겠다고 하면 이 세상은 어찌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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