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이민선교의 길 열리다
19세기 초, 포르투갈 왕 죠엉 6세의 주요 동맹국은 영국이었습니다. 1810년에 해상무역조약이 체결되어 브라질의 모든 항구가 전면 개방되자, 영국은 가장 먼저 외교관과 상인들, 그리고 이민자들을 보냈습니다. 영국은 포르투갈을 군사적-경제적으로 원조할 것을 약속하였고, 그 대신 비 카톨릭교도인 자국민들의 종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허락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영국의 동맹과 원조가 꼭 필요했던 죠엉 6세는 해상무역조약 제 12조에서, 포르투갈-브라질 연합왕국 내의 비 카톨릭교도 외국인에게 종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명시하였습니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영국의 수많은 개신교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로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18세기 내내 브라질을 꽁꽁 걸어 잠가 중세 암흑기를 재현한, 브라질의 유일무이한 종교라는 위치와 기득권을 누려오던 로마 카톨릭교의 교황은 특사인 로렌초 꼴레삐(Lorenzo Coleppi)를 파견하여 해상무역조약 제 12조에 대해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죠엉 6세도, 히오 지 쟈네이로 주교인 죠세 꼬우칭요(José Caetano da Silva Coutinho)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유럽 국가의 이민자들에 의한 개신교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영국인 이민선교
가장 먼저 브라질 땅을 밟은 이민자들은 영국인들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외교관들과 상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해상무역조약이 맺어진 해부터 임시 처소나 배 등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매주 더욱 많은 영국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자, 영국 정부는 로버트 크레인(Robert C. Crane) 목사를 파송하여 회중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회중의 숫자가 임시 처소에 다 모이지 못할 만큼 늘어나자, 영국의 총영사 알렉산더 커닝햄(Alexander Cuningham)은 1819년 연합왕국 정부에게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채플을 열 수 있도록 허가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 청원은 받아들여져 1822년 5월 26일에 드디어 브라질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가한 첫 개신교 채플이자 첫 영국성공회 채플이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독일인 이민선교
브라질 최초의 영국성공회 채플이 세워지고 약 4개월쯤 지난 후, 브라질에 남아 있던 포르투갈 태자 뻬드로(Pedro)는 1822년 9월 7일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생 제국은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않은 상태여서, 브라질 남동부와 남부의 드넓은 평야를 농지로 개간하는 정책을 시행하기로 하였고, 이를 위하여 유럽에서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턱없이 부족한 일손을 메꾸려 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이민자들에게 제안된 곳은 수도 히오 지 쟈네이로에서 멀지 않은 노바 프리부르고(Nova Friburgo)였는데, 이곳으로 334명의 루터교회 독일인들이 그들의 교구 목사인 프리드리히 소이에르브론(Friedrich Oswald Sauerbronn)과 함께 이주하였습니다. 이들은 원래 한 교구민들이었기 때문에 1824년 5월 3일에 브라질에 도착하자 마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브라질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가한 첫 루터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