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순 권사(배우리한글학교장, 연합교회)
내가 살았던 시골 마을은 번지가 없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동네의 이름은 무당골, 고골, 동이점, 안골… 이런 이름이었다. 몇 가구 살지 않은 내 고향 마을은 웬만하면 다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지만 마을을 이루는 곳곳에 다리가 있거나 개울이 있으면 경계선을 이루어 다시 마을 이름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마을에 이름에는 각기 의미가 있다. 무당골은 그 곳에 무당이 살고 있기 때문이고 고골은 한자의 옛(古)라는 뜻을 앞에 붙여 마을이 처음으로 생긴 오래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동무들과 가장 많이 드나들던 동이점은 동이(질그릇, 항아리 같은 것)를 만드는 곳이 마을 한 가운데 있었는데 그곳에 제일 높은 곳에 산처럼 우뚝 솟은 가마터가 있어서 그릇을 굽는 날에는 연기가 마을 전체를 몰아가듯 산을 휘돌아 하늘로 치솟곤 했다. 가마터가 있는 이 곳에 이름이 동이점이다. 숨바꼭질 놀이로 아주 제격인 곳이다. 그 안에 들어가면 숨을 잘 쉴 수 없고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티가나는 시커먼 재를 묻히고 나오지만 늦가을에 입성이 변변찮은 아이들의 썰렁한 몸을 녹여주는 장소는 이만한 곳이 없다. 술래가 잡으러 와도 일단은 깜깜하기 때문에 쉽게 찾질 못한다. 얼떨결에 숨어서 조금 있다 보면 또 한무리의 동무들이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어쩌면 모두 이곳에 숨으려고 작정하고 숨바꼭질을 하자고 한 것 같다. 안골은 조금 동떨어진 곳에 있다. 깊숙이 산을 끼고 움푹 패인 곳으로 내려 앉은 듯한 이곳은 마을이라고 해야 하는 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달랑 두 집이 마을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데, 그것도 같은 성을 가진 큰 집과 작은 집이다. 지금은 집배원이라고 부르는 그 당시에 우편 배달부가 편지나 안부를 전할 때 ‘어느 골에 아무개에게’하면 다 통한다. 그래서 번지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70년대에 산업화로 도심지에 건물이 들어서며 자연이 훼손되는 일이 많아지고 철거민이 속출하는 시기에 시인 김광섭씨는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를 발표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새벽부터 돌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생략)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아침 구공탄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가서/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사람들은 번지가 필요해서 자꾸 만들고 있는데 비둘기는 피난하듯 자리를 떠나 번지를 잃어버린다. 지향 없이 쫓기며 옛날을 그리워한다. 비둘기의 번지는 삶의 보금자리요 시의 상징성으로 보자면 비둘기는 소외된 인간이 삶의 터전을 상실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다. 다큐 프로그램에서 ‘가요 1번지’라는 추억의 노래를 시청하며 1번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동시에 떠오르는 ‘유머 1번지’라는 코미디 프로도 생각이 났다. 1번지는 번지의 시작이다. 가요의 시작점이요, 유머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번지 없는 주막’이라는 노래도 자동으로 떠오른다. 문패도 번지 수도 없는 주막이다.
일단 번지가 붙여지게 되면 소유자가 분명해진다. 비둘기는 그 번지를 자꾸 만드는 인간들에게 쫓기고 소외된 비둘기 같은 인간은 종내 인간의 소유욕으로 다시 쫓기게 된다. 누구 것인지 알아도, 몰라도 그만인 번지 없는 어릴 적 내 고향 마을이 지금은 너무나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