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순 권사(배우리한글학교장, 연합교회)
연탄이나 조개탄, 번개탄을 알고 계시다면 분명 반백년 이상을 살고 계시거나 아님 어렴풋하게 난방으로 사용되어진 어떤 물건인 것쯤으로 알고 있는 상식이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60년대 이후 수십년간 서민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물품이었지요. 이들 중에서 특히 연탄은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 당시에 현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굳이 연탄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은 문명의 발전으로 더 좋고 편리한 취사와 난방에 연탄을 대신한 가스라는 것이 출현했기 때문이고 따라서 까만 연탄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요즈음에 다시 특별한 경우, 예를 들자면 연탄을 사용해야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는 요리에 화덕의 역할로 일부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연탄은 서민들의 생계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물건이었지만 한편으론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에 부(富)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조개탄은 추운 겨울에 교실의 난방과 찬밥을 책임졌고 번개탄은 꺼진 연탄의 불씨를 만드는 심지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라면 어울릴 해석입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면--내가 살았던 동네만 그랬는지 모르겠으나--놀거리가 변변하지 못한 시절, 타고 남은 하얀 연탄은 아래, 윗동네 아이들의 전쟁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겨울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절이 있는 브라질의 날씨는 요즘들어 거꾸로 가는 듯, 온도의 차이를 느낄 수 없게 되니 매일 그날이 그날인 것 같고 긴장감도 떨어져서 자연히 의욕마저 사그러집니다. 그래서인지 추운 날씨에 대한 글쓰기도 녹록하지 않습니다. 추운 계절을 버틸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던 한국에서의 그 시절을 생각하니 단연코 연탄이 먼저 떠오릅니다. 지붕이 맞닿을만큼 쌓고 살아보길 원했지만 늘 허리를 넘지 못했던 연탄의 높이, 그 가난의 생생한 기억을 지금에 와서는 추억이라며 글거리로 삼으려니 비겁한 자의 비굴함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연탄의 감각적 심상을 적절히 표현하여 인생의 삶에 비유한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을 싣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긴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 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봄날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네, 나는.]
평범한 주위의 것을 놓치지 않고 소재로 사용하는 시인의 탁월함이 시문학을 지도하기에 아주 적합한 자료이므로 종종 사용합니다. 위 전문의 내용은 일상의 삶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보며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관념적인 상징으로 사용되는 촛불, 소금, 십자가...... 이런 소재들은 희생의 글에 흔히 쓰입니다만 연탄을 소재로 한, 이 시는 드물게 우리만이 알고 느낄 수 있는 문화와 정서를 담은 것이기에 더 특별한 감동이 있습니다.
작가는 하나의 작품에서 많은 독자를 만납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 중에 하나이겠지요.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본연의 뜻이나 공통적인 감상과 해석은 누구나 동일할 것인데, 왜그런지 시인의 마음과 멀어집니다. 나에게 있어서 연탄은 가난으로 배어진 한 시절에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로만 기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자리는 빈자리가 아닌 나의 쉴 자리였다는 것으로 새롭게 기억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