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에 수많은 물고기들은 염분이 많은 바닷물 속에 살지만 물고기들의 살 속에는 소금기가 배지 않습니다. 참 신앙인은 주변 환경이 아무리 어두워지고 부패해도 그런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믿는 우리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해 분명한 고백이 없어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재판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들이 이제는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미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사렛 예수는 이단으로 판결이 난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방출되는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공공연하게 믿음을 시인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제사장 무리는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인해 이 나사렛 이단 집단이 다 해산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또 다시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들을 체포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이 질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어떤 악령의 힘을 빌려서 능력을 행하였느냐?”라는 부정적인 저의를 가진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이야말로 본 재판의 핵심 질문입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유죄와 무죄로 나누어진 것을 베드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도 자신의 스승처럼 십자가형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과거 베드로는 사람들이 두려워서,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무려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이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는 이전의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까지 않고 다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베드로는 담대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의 대답이 9-12절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부인한 예수님께서 바로 가장 귀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고 말하며 예수님이 바로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 임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한 이 장엄한 신앙고백의 클라이막스는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우리는 여기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기준을 버리고 기회주의 적인 삶을 산 사람들은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분명한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산 사람들은 모두가 승리하였습니다.
1.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예수님이십니다. 1)예수님은 흥과 폐함의 기준입니다.- 눅2:34에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라고 하였습니다. 2)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됩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을 소유하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예수님은 구원과 정죄의 기준입니다.- 막16:16 에“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본문에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라고 하였습니다. 브라질에서 한국에 갈 때 자기가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를 타면 그 비행기 힘으로 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님이 나를 품에 안고 천국까지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만 보고 믿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원, 흥함, 복, 성공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2.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성경말씀입니다. 계22:18-1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셨습니다. 고후13:8 에“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만 위할 뿐이니”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럴듯한 수많은 이론과 논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3. 양심이 기준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착한 양심입니다. 양심에 맞게 살면 평안을 얻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23:1) 하였고,,,.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합니다. 양심(suneivdhsi, 쉬네이데시스)은 자기 행동을 감시하고, 검사하는 판사입니다. 자기행동이 옳다, 아니다, 판단하여 주는 검사(판사)일을 합니다. 양심이하는 일은 ①평소에 믿음을 지키고 살라 합니다. ②범죄 하면 회개하여 새롭게 살라 합니다. ‘급히 사화하라’(마5:25) 합니다. 가룟유다는 양심을 버리고 예수를 팔고는 자살로 끝났고,(요13:2) 아나니아 삽비라는 착한 양심을 버리고 거짓 증거를 하다가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결론
에디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Selassie)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기독교인이었으므로 한국을 방문하는 중에 주일이 되자 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미카터 미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때에도 주일이 되자 여의도 침례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쇼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믿는 사람으로서 분명한 기준이 있는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남의 나라에 왔을 때에도 주일 성수를 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욥은 자기가 세운 기준에서 볼 때,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완벽하신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을 비춰보니, 형편없는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욥42:3절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는 자신이 친구들과 나눈 모든 대화가 무지한 말,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 헤아리기 어려운 일들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기준 바깥에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욥은 지금까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눈으로 보는 수준으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으로 하나님을 뵙고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세계 안에 갇혀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중에도 분명한 기준을 갖고 살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왕의 명령을 거부했다고 죽을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왕의 진미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라”(단1:8절)고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생활을 하면서도 분명한 신앙생활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쳤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절) 이제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흔들렸던 신앙생활을 재점검하고 새로운 기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재도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