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목사(한마음사랑의교회 원로)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향하여 “너는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참 기가 막힐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와 결혼한 후에도 방탕하여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떠나버렸습니다. 여기서 “타인에게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인”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여인을 사랑하라고, 다시 데려 와서 아내를 삼으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잔인한 명령같이 보여 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어려운 관계야말로 하나님과 당시 이스라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신을 섬기는” 배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건포도 과자”는 사치스러운 양식에 속한 것이었으며 특별 행사 때 먹는 귀한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가장 좋은 것들을 우상 신 앞에 갖다 바치며 그 앞에서 잔치하고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저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너도 지금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있는 네 음란한 아내를 한번 사랑해보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그런 고멜을 사랑해 주기가 쉬웠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음란했던 여인을 자기 아내로 맞아주는 것만 해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는데 고멜은 감사하기는커녕 그런 호세아를 또 배반하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가출해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아내를 용서해 주는 것만 해도 보통 마음 넓지 않고서는 안 될 일인데 하물며 일부러 찾아가서 다시 데려오고 게다가 이전처럼 사랑해 준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남편에게도 전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바로 그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지금 하나님을 떠나 배교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그래도 용서하시고 찾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고한 것인지 다시 한 번 뜨겁게 체험할 수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아직 악을 행하고 있었을 때, 아니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아무 조건 없이, 아니 오히려 마땅히 미워해야 할 조건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무슨 공로나 매력이 있어서 주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미운 짓만 하고 있는 죄인인데도 그냥 부어주신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정도가 아니라 악조건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 주신 사랑, 사람의 사랑 수준으로서는 결코 도달은커녕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사랑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구원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2. 대속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로 하여금 대속의 사랑을 직접 겪어 보도록 하셨는데 바로 2절 말씀에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라고 기록했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고멜을 다시 데려오려고 했을 때, 그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고멜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호세아가 치른 액수를 전체적으로 계산해 보면 대충 ‘은 삼십 세겔’ 정도가 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여종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고멜이 다른 남자에게로 갔지만, 그의 정식 아내로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창녀나 여종의 신분으로 붙잡혀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바로 사람이 하나님과 사귈 때는 하나님의 자녀요 주님의 신부로 대접받지만 마귀와 사귀게 될 때는 그 마귀가 마음대로 학대하고 부리는 종의 신세로 전락되는 것과 꼭 같습니다. 호세아는 바로 그처럼 타인에게 구속되어 있는 고멜을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그 몸값을 지불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호세아 선지자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진리는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삯을 대신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죄 아래 종 되었던 우리는 사망의 저주에 꼼짝없이 묶이는 신세가 되어서 스스로 벗어날 길도 힘도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니 그런 자리에서 떠날 생각조차 스스로 하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완전히 당신의 소유로 삼아주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정말 비싼 대가를 대신 치러주셨음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3. 기다려 주시는 사랑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그처럼 고멜을 사랑해주고 대가까지 치르고 도로 데려왔지만, 고멜 쪽에서는 그런 호세아에게 곧 감사하고 사랑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멜의 마음에 그런 변화가 진정으로 일어나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3절의 말씀에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냥 너는 오랫동안, 평생토록 나와 해로 하자는 뜻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네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나는 너와 함께 살면서 기다려 주겠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것 역시 호세아 선지자에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그처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는 데도 여전히 못된 음녀의 본성과 과거의 잔재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답답했겠으며 또 화도 났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와 꼭 같은 기분이실 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호세아 선지자에게, 또 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를 맞은 우리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죄인을 먼저 사랑해 주시고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불러주셨지만 그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는 반응은 지극히 느리기만 한 우리들은 아닌지요? 만약 사람이 지금 하나님의 처지에 있다면 그것 정말 견딜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 만큼이나 용서해주고 사랑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 회개하는 속도마저 그처럼 더디다면 그것이 정말 참을 수 있을 일이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도 또 참으시며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4절의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날 동안”이라는 말씀은 3절과 대응하고 있는 구절로서 장차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될 기간을 가리킵니다. 70년이라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왕도 없고 군(지도자, 족장, 장로)도 없는” 상태, 즉 한 국가로서의 힘을 완전히 상실한 최악의 날을 보내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무한정의 용서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한없는 주의 사랑”,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는 절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