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중 선교사(사회학박사,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수막카우사이
 볼리비아발 정치위기가 연일 브라질 언론의 국제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급진적 좌파를 이끌었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멕시코로 정치망명을 선택한 에보와 임시대통령인 제닌 아네즈의 치열한 싸움은 국내정치 좌우의 대립이기도 하지만 미국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가치전쟁’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안데스 지역 원주민들은 서구사회가 고도로 발달시켜온 민주주의, 자본주의, 단일국가 개념의 불평등한 식민성과 폭력성에 온몸으로 저항해 왔습니다. 실제로 에콰도르 원주민들의 연대, 협동, 철학, 사상, 삶의 체계는 ‘숭고한 삶’을 의미하는 ‘수막카우사이’(Sumak Kaway)의 개념으로 구체화되었고 2008년 헌법에 담겨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은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생명, 생태중심 세계관을 제시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대안적 발전’ 모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호칭의 정치학: 아비투스
 브라질에서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특히 한인들이 무심코 내뱉는 ‘원주민’은 이 땅에 고유의 문화를 간직한 채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회계층을 지칭하지요. 칠레 센트럴대학의 최진옥 교수는 「글로벌 세미노스’(Global Semi-North) 정체성」(2017)에서 한인들이 현지인들을 볼 때 스스로 차별성을 드러내면서 계층적 우위를 드러내려는 ‘아비투스’(habitus)를 형성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처음 사용한 이 개념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화 과정에서 얻어지는 무의식적 성향입니다. 한인들은 가게나 사업장에서 현지인을 고용하거나 가정에서 식모를 써본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지요. 브라질 사람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고용주 경험에 기댄 경제적 우월의식, 사회에서 특별한 층에 속하고 싶은 욕망의 ‘아비투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이 ‘아비투스’가 한인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 외에 무엇에 도움이 되었는지요. 오히려 브라질을 보는 눈을 왜곡시키거나 혹은 한인을 바라보는 브라질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는지요.  

브라질을 알고 이해하기
 브라질 한인의 역사가 60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사회 내에서 위치는 제한적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한인들이 걸어온 발자취에 비해 ‘브라질 사회와 잘 어울려 사는’ 사회통합의 수준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한국기업의 진출과 한류의 열풍에 기대어 ‘한국적인 것’을 브라질에 심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브라질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더 중요합니다. 한인들의 생업이 위기에 있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민자와 후손으로서 사는 한 브라질 사람, 문화, 사회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작은 실천부터 해보면 어떨까요? 브라질 정론지인 Folha de SP., Estadão, Zero Hora, Correiro Braziliense, Veja 등은 쉽게 구할 수 있고 온라인으로 저렴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Gilberto Freyre 『Casa-grande & Senzala』, Sérgio Buarque de Holanda 『Raízes do Brasil』, Caio Prado Júnior 『Formação do Brasil Contemporâneo』와 같은 고전을 책상에 두고 500년 역사를 희로애락을 음미해 보는 것을 어떨까요? Paulo Freyre 『Pedagogia do Oprimido』도 좋은 선택일 것 같습니다. 사회화의 범위가 제한적인 이민자들은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브라질인들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다 보면 계속 협소하고 열등한 세계관 속에 살게 됩니다. 브라질을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한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원주민’ 호칭을 언젠가 우리가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