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학 산책)우찌무라 간죠의 “회심기”
2019/07/11 09:31 입력  |  조회수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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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
 
일본 기독교계가 사랑하고 자랑하는 신앙인 중에 우찌무라 간죠가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일본을 대표하는 기독교 사상가입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일본 정부가 세웠던 삿포로 농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삿포로 농업학교는 일본 기독교사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만난 일본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이 학교를 졸업한 우찌무라 간죠는 1884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주립 지적장애인 시설의 간호부로 근무하다 이듬해 애머스트 대학교와 하트퍼드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이 모든 교육과정이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1888년에 귀국하여 도쿄 제일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 1891년 <교육칙어>에 대한 불경죄로 해직되었고 반전 운동을 주도 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신앙 안에서 하나님만 섬기는 신념을 갖고 일본 천황에게 절하는 것을 거부하여 큰 고초를 당했습니다. 1897년에는 일본 최대 일간지 <만조보万朝報>의 영문판 주필을 맡았으나,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언론사가 정부의 기관지로 전락하자 사직하였습니다. 이후 <동경독립잡지>와 <성서 연구> 등을 통해 반전운동과 성서 연구 및 성경 공부에 매진하다 1930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영적 지도자입니다.
 
 일본이 중국 상해를 점령하고 30만명을 학살했을 때 일본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일 때 일본 교회도 승전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우찌무라 간죠는 “왜 이것을 교회가 축하할 일이냐? 일본은 큰 죄를 저질렀다!“고 일갈했습니다. 중하고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그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6평 다다미 방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다다미 방 성경공부 모임에서 3명의 동경 대학교 총장과 오히라 수상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이 양성되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신앙의 본질을 찾는 노력을 계속합니다. 그의 회심기는 신앙의 본질을 확실하게 붙잡는 과정이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람들이 만든 관습이나 전통 혹은 조직이나 기관들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진리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일 뿐이며,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보았던 무교회주의자였습니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반대하거나 교회 무용론을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주의를 반대하고 교회가 가진 문제들에 대하여 강한 비판과 반대가 많았습니다. 그의 영향을 김교신, 함석헌, 장기려 박사 등이 받았습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의미있는 몇 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평안 문제를 다룬 ‘구안록’이나 자신이 신앙인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우찌무라 간죠 회심기“를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찌무라 간죠의 회심기는 일본의 800만 개나 되는 신들을 경배하던 그가 유일신 하나님을 의탁하게 된 배경을 비롯하여, 기독교로 개종을 한 이후 단순한 교회생활을 뛰어넘어 어떻게 그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죠의 회심기
 우찌무라 간죠의 회심은 삿포로 농업학교에서 시작됩니다. 근대화의 가속화를 꿈꾸던 일본은 교육 강국을 꾀하며 삿포로 농업학교를 세웠습니다. 국내에서 국비로 우수한 학생들을 모집했고, 밖으로는 우수한 미국인 교사들을 채용했습니다. 그렇게 채용된 초대 교감이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였습니다. 매사추세츠 대학 총장이었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는 오로지 선교를 위해 일본에 갑니다. 그리고 8개월 동안 체류하며 매사추세츠 주립 농과대학을 모델로 학교를 운영합니다. 그런데 8개월만에 1기 졸업생 15명 전원을 기독교 신자로 세우는 놀라운 결실을 남깁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영어를 배우고 싶었고, 국비지원이 좋아 삿포로농업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합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선배들로부터 신자가 되기를 강요받았습니다. 엄격한 일본식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 선배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신사에 가서 일본의 토속신에게 기도하기도 하며 반항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우찌무라 간죠는 성경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판단하고 1878년 6월 2l일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받을 즈음 그는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세상에는 내가 믿어 왔던 것처럼 800만 이상의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기독교의 ‘유일신론’은 내 미신의 뿌리에 도끼날을 대었다.” 일본 우상들 속에 살아 왔던 우찌무라 간죠의 진지한 고백입니다. 그의 회심은 그 자신에게는 물론 일본 기독교에 큰 의미가 됩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그만큼 일본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고 나아가 세계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신앙적 애국자’요 ‘따뜻한 민족주의자’로 알려집니다. 그래서 일제 압제를 받는 시기에도 많은 한국의 선각자들이 우찌무라 간죠를 존경하고 스승으로 따랐습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신앙적 애국주의자로 일본의 침략 야욕을 질타하고 반전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래서 반일 감정이 많은 한국에서도, 또 일본을 곱게 보지 않는 세계에서도 그는 존경받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그가 남긴 ‘회심기’가 주는 의미를 정리합니다.
 
 첫째 회심의 과정에 대한 주목이 필요합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800만개의 우상들이 우글거리는 일본에서 신앙인으로 회심합니다. 특히 그는 사무라이 집안 출신입니다. 그가 굳건한 신앙인이 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나긴 회의와 갈등을 넘어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이 회심기는 담고 있습니다. 이 우찌무라 간죠의 회심기는 회심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현대교회에게 도전을 줍니다.

 둘째 우찌무라 간죠의 회심기는 신앙의 본질을 향한 진지한 노력의 필요성을 가르칩니다. 우찌무라 간죠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찌무라 간죠는 신앙의 본질을 분명하게 정리합니다. 신앙을 세움에 있어서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철저히 고민하는 건강한 신앙 정립의 모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찌무라 간죠의 회심기는 기초가 부실해서 무너지는 소리 요란한 한국 교회에 건강한 기초의 중요성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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