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설교요약)우리를 부르신 이유-下
2019/04/17 22:21 입력  |  조회수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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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석현 목사(샬롬교회 담임)
 
그러나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주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주’라는 말은 세상의 주권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의 권력을 로마의 황제가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정보를 앎으로 그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삶에서 ‘예수님은 나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주님을 믿는 공동체적 신앙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이민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지만, 누군가로부터 당하는 고소나 비난 혹은 험담 같은 것들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책망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온전히 성공하지 못합니다.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1970년대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갤브리어스는 자신의 책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과거처럼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경제 이론은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의 말을 빌려서 설명하자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시장경제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과거처럼 경제이론을 따라 투자하고 일을 하면 부자가 된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내일의 삶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브라질에서 이민자로서의 삶, 옷 가게를 경영하는 삶의 미래가 결코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삶에서의 불확실성이 오늘 우리의 영적인 것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영원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사실, 세상에서의 삶이 불확실할수록 사회학적으로 보면 미래에 더욱 매달리게 됩니다. 미래 혹은 자신의 영원의 삶에 더욱 투자하고 신앙으로 몰입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현상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러한 모습들도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탈 기독교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기독교 정신과 시장경제가 맞물리면서 나라가 부강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부자가 될 수 있고, 심지어 미래 곧 영원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확실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는 경제적인 불확실성이 이제는 미래에 대해서 결코 담보하지 못하고 더욱 불안하게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민사회는 매우 작은 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의 어려움, 누군가의 불확실성이 우리로 하여금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브라질에서 살아가면서 많은 이들로부터 느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거나 험담하지 않을까 하는 매우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할라면 하라지... 라고 하면서도 괜시리 누군가 내 말을 하는 것처럼 Bar에서 나를 자꾸 쳐다보거나 하면 굉장히 불편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이 다 느끼고 계실겁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나를 완전히 신뢰함으로 보증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십니까?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친구를 전적으로 보증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고,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는 그러한 사회가 굉장히 불행한 사회인데 우리가 그런 시대를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하시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책망’이라는 단어가 ‘고소하다’, ‘비난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날에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고소하거나 비난하지 않도록 우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붙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무도 비방할 수 없는 흠이 없는 상태’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는 우리를 비난하고 고소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을 어디 둘 곳이 없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비난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3.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 미래가 없고 혼란스러우며 종말이 가까울수록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신앙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오늘 성경에 나온 단어 중에 ‘미쁘시도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순 우리말인데 성경 외에는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한자어가 사용되고 순 우리말이 사용되지 않아서 안타깝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동사로는 ‘믿는다’이고, 명사로는 ‘신자’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교제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헬라어로는 ‘코이노니아’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는 ‘교제하도록’이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코이노니아 즉 교제라는 단어는 1. 어떤 것을 나누다 2. 어떤 것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음식이나 은혜나 은사를 함께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교제를 하게 하시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교제의 명령을 듣고 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바로 우리입니다. 교제라는 것은 단순히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신앙을 나누고, 서로의 어려움과 아픔을 함께 위로하며, 필요를 따라 채우고 돕는 것을 말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를 돕고,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가 한 마음으로 돕는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III.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우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삶에서 우리 주님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무거운 삶에, 세상의 변화무쌍한 삶에,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불확실성이 가득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이번 한 주간을 살아갈 때도 확실하신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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