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미국생활이야기)형제 이민-下
2017/02/09 22:27 입력  |  조회수 : 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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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남철 목사(그레이스성결교회 담임)
 
2월 4일에 있었던 아버님의 장례식을 마치고 온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병중에 계신 아버님을 두고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님께서 너희 미국에 가라고 때를 맞추시면서 돌아가시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들은 한국에서 먼저 미국에 온 다섯째 동생과 자주 전화를 했다. 미국이 어떠냐 살만하냐 우리 식구들이 들어가서 과연 먹고 살 수 있겠냐 등등. 3개월 전에 온 동생의 말을 듣고 용기를 얻었던 모양이다. 그는 제주도 남원에서 “소원 소리사”라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수입도 괜찮고 형편이 아주 좋았었다. 미국에 오면 그 나이에 고생이 될텐데, 괜찮을까 내심 걱정을 했다. 지금까지 잘 못 왔다고 후회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미국이 싫지는 않은 것 같다. 3개월 후인 5월에 여섯째 동생 고남규 가족과 막내 동생 고남수 가족이 이민을 왔다. 한꺼번에 8명이 온 것이다. 엘에이 공항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가졌다. 여기 이미 와서 살고 있는 형제들이 다 나갔기 때문이다. 4형제 가족이 한꺼번에 오지 않고 3개월씩 간격을 두고 차례차례 오니 나로서는 덜 부담이 되었다. 여섯째 남규 가족은 우리 집에서 당분간 있게 했고 막내 남수 가족은 6개월 전에 먼저 온 다섯째 남익 집에 함께 지내기로 했다. 우리는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미국에서의 성공을 기도했다. 당시 내가 목회하고 있던 나성 성결 교회에서도 이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주었다. 미국 온지 21년만에 15명의 가족들이 밀려온 것이다. 미국에서 외롭게 살았기 때문에 이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처음 한 두 달은 거의 매일 잔치하다 시피 했다. 우리 집에 모여 뒷마당에서 갈비를 굽고 탁구를 치고 과일을 먹으면서 신나게 놀았다. 한 가족은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왔고 나머지 3가족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왔다. 어머님은 제주도 중문 집에서 홀로 계시게 했다. 어머님 가까운 곳에 두 동생 고남식 가족과 고남일 가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안심도 되고 위로도 되었다. 오자마자 이들은 취직부터 서둘렀다. 옆에서 천천히 하라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좀 쉬면서 여행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면서 천천히 찾아보자고 했다. 교회 신자들도 다 그렇게 조언해 주었지만 그들은 서둘러 일자리를 찾았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남진 동생은 그의 기술 따라 전자 제품 고치는 가게에 취직이 되었고 나머지 동생 셋은 MCI 전화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1년 이내에 동생 세 가정이 하시엔다 좋은 지역에 콘도미니엄 집을 장만했다. 막내만 구입을 하지 않았다. 당시 12만 불 안 밖의 집들이었다. 지금은 별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다. 15명의 식구들을 학교도 보내고, Social Security Office에도 가고, 자동차를 사고, 집을 사고, 취직을 하고 보통 일인가. 그 일을 다 도와 주었다. 동생들이 오므로 교회는 한꺼번에 15명이 부흥되었다. 그러나 형제들이 와서 부흥한 것은 부흥이 아니라고 꼬집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동생들은 서로 뭉치고 서로 위로하며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그들은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 차차 미국 생활에 자신감을 얻고 있다.
 그후 어머님이 미국으로 오시고 우리 집에서 사시면서 교회도 같이 나가셨다. 얼마 후에 동생들 가정에서 한 달씩 모시도록 했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과 잘 지내시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시고는 넷째 동생 집에서 지내시고 당신의 집에서 사시다가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님이 돌아 가신지 2년 만이었다. 아버님 장례식도, 어머님 장례식도 여기 있던 자식들이 다 나갔다. 두 번의 장례식을 통하여 우리 형제들은 더욱 친해졌고 가까워졌다. 어려운 일을 함께 나누어 일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려고 모두 노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미국에 5형제, 제주도 서귀포와 중문에 고남식, 고남일 두 형제 가족이 살고 있다. 미국의 이민 정책에 왜 부모님이나 형제 초청을 하게 했는지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이번에 4 형제 가족이 오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이민 정책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형제들이 없을 때는 항상 외로움을 느꼈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늘 한 구석에 있었다. 그러나 동생들이 오고 난 다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 외국 생활이어서 그런지 결속이 잘 되었다. 내가 사정에 의해 나성 성결 교회를 사임하고 개척 할 때 형제들이 아니었다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할 때 형제들이 힘을 합쳐 주었다. 지금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역시 ”피는 물 보다 진하다 “라는 말을 다시 한번 체험했다. 미국의 한인 교회라는 것이 대부분 친인척들로 구성이 된 경우가 많다. 나도 이들의 도움을 너무나도 많이 받았다. 추수 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신년이 되면 늘 외로웠는데 이제는 모여서 재미있게 지낸다. 모여서 한바탕 웃고 나면 모든 스트레스가 싹 가신다. 싸우고 다투고 큰 소리치는 일이 있어도 그래도 형제들이요 그래도 같은 피를 이어주는 동서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카들이 사랑스럽고 그래도 동생들이 자랑스럽다. 목회의 어려움이나 형제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서로 격려하면서 미국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미국 온 동생들과 한국의 동생 가족들의 성공을 늘 기도하고 있다. 형제들 모두 잘 되는 것이 부모님을 향한 효도요 이웃을 향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믿는 자의 형제들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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