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마지막 전투」: 아슬란과 타슈(2)
「마지막 전투」에는 혼합주의식 배교의 대명사인, 아슬란과 타슈의 개념을 혼합하여 만든 제 3의 존재인 타슐란도 있지만, 또한 정반대 배교 유형이 나온다. 아슬란과 타슈가 사실은 같은 존재라는 사실에 대다수의 말하는 동물들은 혼란스러워 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중에 혼란스러워 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는 말하는 동물이 있었다. 바로 고양이 진저다. 그는 원숭이 시프트가 적국 칼로르멘에서 끌여들인 리슈다 타르칸에게 타슐란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타르칸 나리, 저는 아슬란 님이 타슈 신이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똑똑한 고양이야, 내 뜻을 분명하게 알아차렸을 텐데.”
“그럼, 둘 다 없다는 거군요.”
“깨달은 자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야.”
여기서 ‘깨달은 자들’이란 자기 시대의 철학자들을 가리키는 C. S. 루이스의 풍자적 용어이다. 자기가 지혜를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20세기 초중반의 철학자들은 모두 신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과학의 발전 앞에 신 개념이 인간 이성과 삶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다만 인간이 어쩔 수 없을 때 붙드는 존재로서의 신은 인정했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 능력 밖의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의지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 때조차도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 존재를 인정했던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삶에 신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점점 발전하면, 결국 신이란 없는 존재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즉, 신은 죽어 있는 존재, 또는 죽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삶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그저 자기 합리적 사고로 합리적인 삶을 살아가면 된다. 자기 자신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만족스러운 삶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려면 근면 성실하게 삶을 꾸려 나가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인정하게끔.
이러한 철학을 ‘허무주의’라고 한다. 이것은 혼합주의 만큼이나 위험한 배교의 유형이다. 하지만 어떻게 신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배교의 한 유형일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하며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실제로 예수를 믿는가?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담당하신다고 믿는가, 아니면 삶의 일들은 우선 우리가 최선을 다 해보고 안 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가 하는 것이다. 전자가 참 기독교인의 자세이고, 후자는 아니다. 후자를 가리켜 실질적 허무주의자라고 한다. 겉모습은 교회도 다니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마음속에서 하는 생각은 ‘우리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우리가, 그래도 안 되는 것만 하나님께 맡기자’ 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하게, 실질적 허무주의자는 배교자라고 말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