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캐스피언: 시험에 대한 태도(1)
역사를 통해 내려오는 성경적 참 신앙의 고백이 중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옛 것이 좋다는 회고 내지는 복고 취향이 아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은 성경적 믿음의 실체이며 현재이다.
현실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는 때가 있는데, 바로 시험의 때이다. 시험은 눈에 보이는 것같이 생생하던 하나님의 인도가 보이지 않을 때, 손으로 느끼는 것같이 뚜렷하던 하나님의 임재가 인지되지 않을 때이다. 지난 3백년 간, 나니아가 텔마르 인들의 지배를 받을 동안 아슬란은 보이지 않았다. 나니아의 참 백성인 말하는 동물들이 억압을 받도록 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오랜 세월동안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사실 그는 항상 나니아에 있었다. 단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왜? 왜 옛날처럼 직접 군대를 지휘해서 적을 물리치지 않았을까? 사실, 나니아의 시간으로는 천 년 후에 돌아온 루시가 아슬란을 만나 던진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다. “저는 아슬란 님을 다시 만나서 정말로 기뻐요. 제가 곁에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실 줄 알았거든요. 아슬란 님이 무섭게 으르렁거려서 적들을 겁주고 쫓아내려 오신 것이라 믿었어요. 꼭 예전처럼요. 그런데 이제부터 진행되는 모든 일이 끔찍할 거예요.”
그러자 아슬란은 이렇게 답한다.
“너에게는 힘든 일이겠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지는 않는 법이란다.”
아슬란은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나니아 백성에게 보이려는 것이 있다. 직접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에 대한 사랑이 있고, 그를 신뢰하는 참 나니아 백성이라면 누구나 과거 역사상 그의 언행을 돌아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비록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그가 언제나 그 백성과 함께 거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가 언제나 그 백성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전제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럴 때, 이러한 사실에 대한 지식은 아슬란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현재 상황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오며, 그것이 아슬란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더욱 강화한다.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그 어떤 것보다 사랑하고 또한 신뢰하는 사람은, 시험의 때에 그분이 역사에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는지를 살피고, 그것에서 그분의 행동 원칙을 알아서,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 직면하게 두신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 비록 당장은 아니지만, 유추하여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현실을 통과한 사람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으며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따라 자기 일족을 이끌고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그 축복의 땅에 임한 기근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또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떨어지는 문제에 직면한다. 그 때,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신뢰하는 사람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거기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시험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해결하시리라 신뢰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