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순 권사(배우리한글학교장, 연합교회)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 김장 철이면 너나 할 것 없이 마당에 구덩이를 파서 김치의 그 맛을 보존하기 위해 자연적인  저장법으로 독을 땅에 묻어 거기에 김치를 저장했습니다. 예전에는 도심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김치 냉장고라는 문명의 소산물로 이러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쉽게 집 안에서 김치를 보관하고 꺼내어 먹으니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만 아쉽게도 그리움과 추억들을 대신하진 못합니다. 항아리에 차곡차곡 쌓아 담겨진 김장 김치가 제대로 그 맛이 들을 때 쯤, 떨리는 마음으로 항아리 뚜껑을 젖히고 윗부분의 시래기는 걷어내고 붉은 물이 적당히 든 포기 김치를 꺼내 일단, 부엌으로 가기 전에 한줄기 가닥을 잡아 손으로 찢어 먹어 봐야 하는 그 행위는 당최 뭔지…… 무릎을 굽혀 항아리 밑에 있는 김치를 다 꺼내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참으로 열심히 항아리 뚜껑을 열고 닫았던 우리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 

 그 진기한 볼거리를 경험하지 못한 내가 항아리에 담긴 추억을 되짚으려니 감상보다는 이론적인 논리에 치우치는 느낌이 듭니다. 이토록 흙으로 빚어 만든 항아리가 땅 속에 온도와 맛물려 냉장의 역할을 감당한 일은 이미 학자들의 의해 그 보관법이 검증된 상태이니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정호승님의 단편소설 [항아리]에 그 쓰임과 역할이 독특한 얘기가 있기에 이 지면에 옮겨봅니다. 어느 젊은 청년에 의해 만들어진 항아리가 의인화되어 인격적인 생각과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얘기입니다. 

 항아리는 너무 못생긴 모습으로 태어나 주인에게 버림 받아 길가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의 오줌통이 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은 것은 그 오줌이 모아져 밭에 뿌리게 되면 거름으로 쓰여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나 이런 방식으로 거름을 주지 않게 되어 그마저 쓸모없는 항아리가 되고 말자 항아리는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 합니다. 시간이 흐른 후, 자신이 묻혀 있는 가까운 곳에 큰 집(절)이 들어서고 그곳에 종각을 달아 매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소리가 맑지 않다고 아우성입니다. “이건 종소리가 아니야, 그냥 쇳소리야, 쇳소리, 저런 걸 종이라고 종각에 매달다니!”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버려진 항아리를 누군가 발견합니다. “아니 이건 우리 아버님이 만드신 항아리야 이게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네. 이 항아리를 종 밑에 묻으면 좋겠군” 도대체 내가 무엇이 되기 위해 종 밑에 묻혀야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두려워 할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를 종 밑에 두고 종을 치자 종소리가 텅빈 내 몸 안에 가득 들어왔다가 조금씩 숨을 토하듯 휘돌아 나가면서 참으로 맑고 고운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 소리가 처음에는 천둥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그 때서야 문득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항아리가 되었다는 것을, 내 비록 못생긴 항아리로 태어나 오랫동안 오줌통으로 버려져 있었지만, 참고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항아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맑은 종소리를 내는 일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조물주의 손에 의해 빚어진 질그릇과 같습니다. 쉽게 깨지고 부서지는 연약한 그릇입니다. 길가에 버려져 쓸모없을 것 같은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곳곳에서 빛을 발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의 쓰임이 각기 다른 것은 개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섭리이며 은혜입니다. 오늘은 무엇으로, 무슨 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종소리가 되어야 할지……종각 밑에 묻혀야만 되는 이유는 몰랐어도 두려워 하지 않은 항아리같이, 어떤 일의 결과가 기대되는 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