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아브롤료스(Abrolhos) 해전
포르투갈 총독 마띠아스 데 알부께르께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올링다에서 약 6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아하이아우 도 봉 졔주스(Arraial do Bom Jesus)를 거점으로 삼아 저항군을 결성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스파냐는 이듬해 많은 보급품과 함께 군함 19척과 함포 439문, 그리고 병사 2,200명으로 이루어진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네덜란드는 1631년 9월 12일 오늘날의 바이아 주 아브롤료스(Abrolhos) 제도에서 안또니오 데 오꾸엔도(Antonio de Oquendo) 제독의 함대를, 아드리엔 파테르(Adriaen Pater) 제독이 이끄는 군함 15척과 함포 472문, 그리고 병사 2,500명으로 이루어진 함대로 막아섭니다. 브라질 해안에서 가장 격렬한 해전이라고 일컫는 이 아브롤료스 전투는 약 8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네덜란드 측은 1,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뻬르넘부꼬의 헤씨피로 돌아갔고, 에스파냐 측은 1,2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오늘날의 알라고아스(Alagoas) 주 바하 그런지(Barra Grande)에 정박하였습니다. 바뉴올리 백작이 지휘하는 잔여병력은 상륙하여 약 200 킬로미터를 행군, 총독의 저항군과 조우하게 됩니다. 아브롤료스 전투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낸 네덜란드는 헤씨피와 올링다에 병력이 나뉘어 있으면 불리하다고 판단, 올링다의 군대를 철수하여 헤씨피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방어에만 급급해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총사령관 디드리크 판 바르덴부르흐(Diederick van Waerdenburch) 대령을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령 브라질 총독부를 헤씨피 시에 조직하고, 헤씨피 해안의 이따마라까(Itamaracá) 섬에 오라녜(Orange) 요새를 세워 방어를 견고하게 하였으며, 무엇보다 개신교 신앙의 개혁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1557년 이후 두 번째 개신교 선교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도밍고스 페르넌지스 깔라바르(Domingos Fernandes Calabar)
네덜란드와 에스파냐 간의 일진일퇴 상태는 1632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4월 22일, 알부께르께 총독의 저항군 대위 도밍고스 페르넌지스 깔라바르가 병사 몇 명과 함께 비밀리에 네덜란드 측에 귀순하면서 이 균형은 깨지게 됩니다. 네덜란드인들은 처음에 깔라바르 대위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일 후, 그가 네덜란드령 브라질 총독 판 바르덴부르흐에게 진언한대로 올링다 시의 최대 보급창이자 당시 뻬르넘부꼬 제 2 도시인 이가라쑤(Igaraçu) 공략이 성공하자, 그때부터 그에 대한 시선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수 개월동안 그가 진언한 공략이 모두 성공하자, 그는 군 지도부의 신뢰를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기스문트 폰 쇼페(Sigismund von Shoppe) 대령과 각별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는데, 개신교인인 그에게 전도되어 개신교 신앙으로 개종하였고, 그 해 개혁교회 정회원으로 입회하기에 이릅니다.
네덜란드 군은 1633년 오늘날 히오 그런지 도 노르치(Rio Grande do Norte) 주와 그 중심도시인 나따우(Natal)를 완전히 점령하는 것에 성공합니다. 그들은 나따우 시의 동방박사 요새(Forte dos Reis Magos; 헤이스 마고스 요새)를 함락하고 쾰런(Ceulen) 요새로 개명하였습니다. 또한 그 지역의 인디오 부족인 따뿌야(Tapuia) 족의 냥두이(Nhanduí) 족장과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들은 에스파냐 인들에게 사탄 다음으로 무섭다는, 아주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