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World Share USA)
코로나 시대에 삶의 기쁨과 여유를 잃었다는 호소를 듣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지금은 참 어렵고 답답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답답하고, 지금처럼 어려운 때에 기쁨과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현자들은 가르칩니다. 여류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시에서 “삶이 노래처럼 흘러갈 때 즐거워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잘못 흘러갈 때 미소 짓는 사람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임레 카르테스는 그의 소설 ‘운명’에서 처절한 고난의 현장인 ‘나찌 수용소’생활에서 노래하는 희망과 행복을 전합니다.
헝가리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임레 케르테스는 14세의 소년시절 역사상 가장 참혹한 나찌 수용소를 경험합니다. 훗날 자신의 강제 수용소 생활을 소개하는 소설 ‘운명’을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 소설에서 수용소에서 자신이 발견한 행복을 전합니다. 나아가 그는 지긋지긋한 수용소 시절을 자기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합니다.
그는 맘의 상처가 되어 자신과 이웃을 괴롭힐 수 있는 치욕과 고통으로 점철된 경험을 다듬어서 행복과 희망의 이야기로 전합니다. 임레 케르테스는 자신의 아픔을 관조와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가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작품 ‘운명’의 주인공 죄르지를 통해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눈을 선물합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펼쳐집니다.
소설의 주인공 죄르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아버지와 새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14세 소년이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어느 날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강제 수용소에 잡혀 들어가고 그는 수용소로 가는 아버지 배웅을 위해 학교를 조퇴를 합니다. 아버지는 한 남자에게 자신의 재산과 아내를 부탁하고 수용소로 갑니다.
어린 죄르지는 아버지가 떠난 가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가정을 돌보기 위해 죄르지는 학교를 가는 대신 정유공장에 일을 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버스에서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강제 하차를 당합니다. 버스에서 끌려나온 그들은 수용소에 가게 될 것이라고 듣습니다.
그때부터 무시무시한 강제 수용소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기차에 태워집니다. 그리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알 수 없는 곳으로 몇날 며칠을 달려갑니다. 갑작스럽게 붙잡혀 온갖 고생을 다하는 죄르지와 유대인들은 크게 당황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고난의 서곡에 불과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도착한 곳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삭발을 당하고, 소지품은 빼앗기고, 신체등급을 판정 받습니다. 모욕적이고, 혼란스럽고 고통스럽지만 그들은 묵묵히 감당합니다. 노동을 할 수 없는 신체등급을 받으면 가스실로 가서 죽었습니다. 죄르지는 곧 아우슈비츠에서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동합니다.
그는 이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된 것에 대해 일종의 설렘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부헨발트 수용소가 한때 괴테가 활동했던 바이마르시에서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괴테를 동경했고 그의 문학 작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 수용소에서 문학을 생각하고 동경하는 작가 때문에 행복해 하는 죄르지는 성숙한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여유를 갖고, 틈만 나면 행복을 품습니다.
얼마 후 죄르지는 자그마한 짜이쯔 수용소로 이동합니다. 죄르지는 이 짜이쯔 수용소에서 번디 치트롬이라는 남자를 만납니다. 번디도 부다페스트에서 온 유대인이었습니다. 참혹한 수용소에서 동향인을 만나 큰 위안을 얻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며 고단한 수용소 생활을 함께 이깁니다.
죄르지는 짜이쯔 수용소에서 중요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우선 수용소 생활도 지루할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노동, 살벌한 분위기 그리고 잔인한 수용소 생활 규칙들이 있는데도 때때로 지루합니다. 이것이 죄르지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아울러 진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발견합니다. 극심한 고통이 끝없이 이어지는 수용소의 생활 속에서도 수용소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고 버텨냅니다. 모두 생명을 지탱하며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죄르지는 수용소에 고된 노동을 하면서 번디에게 심신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죄르지가 다리가 염증이 생겨 고생을 합니다. 그래서 다리에 고름을 짜내기 위해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생살을 찢습니다. 이런 수술을 여러 차례 하면서도 어린 죄르지는 넉넉히 이겨냅니다. 죄르지는 병동에 수용되었다가 다시 죄르지는 또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동합니다.
부헨발트 수용소 병동에서 죄르지는 유대인 간호사들에게 따뜻한 보살핌도 받고 그들과 교류하며 나름대로의 행복을 느낍니다. 죄르지는 수용소에서 정신없이 노동하고 또 이동하고 또 적응합니다. 이어지는 수용소 생활에서 너무 힘들어 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잔혹한 노동과 폭력적 규칙에 순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곳에서도 사람을 만나 교제하는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쟁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가 재산과 새 어머니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던 그 남자가 새엄마와 결혼을 하고 자신은 생모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운명’은 잔혹한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지 않습니다. 죄르지는 고통스러운 삶에 놀라지도 분노하지도 억울해 하지도 않습니다. 부조리한 삶이지만 수용소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합니다. 아울러 그는 수용소에서 소소한 행복들을 누립니다. 예컨대 생각할 시간이 있다는 것, 물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 누군가를 알게 됐다는 것 등등이 그의 행복입니다.
‘죄르지’에게서 신앙인의 기개와 여유를 발견합니다. 배신과 억울함을 불평하지 않았던 창세기의 요셉도,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를 당했지만 믿음으로 당당히 맞선 다니엘도, 감옥에서 불평하기는커녕 “항상 기뻐하라!(빌4:4)”라고 웅변했던 바울도 죄르지에게 있습니다. 이런 여유와 기개가 코로나 시대를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향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르지와 믿음의 사람들이 누렸던 희망과 행복으로 이 코로나 사태를 이겼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