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성 목사(브라질선교교회 담임)
유권사님, 요즘 주변에서 이런 저런 궁금증을 물어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주로 성경말씀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목사에게 성도들의 수준을 이해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엿보게 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한 가지 신화세계에서 그들이 이해하기 좋도록 은유와 상징으로, 또는 설화형식을 빌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애곡하는 장송곡으로, 어떤 성경의 형식은 연애하는 사랑가로, 또는 일상의 비유로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성경토론이 이어지고 결론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무조건 믿어야해”라고 덮어놓고 믿었습니다. 참 좋은 신앙전통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각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해득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믿어야한다. 그런데 저는 말씀을 믿는 그 믿음 위에 성경이 문자로 기록된 시대를 한가지 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이들의 처지를 생각합니다. 모세를 매개로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서 약속했던 계약을 생각합니다. 모세 오경의 출애굽 사건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말씀을 이해하고 기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사건과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40년 살아가는 이야기도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다 기록되어 있으나 관점이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통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다른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두세 주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 걸리는 기간 동안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 모세 오경이고, 그 기간 동안 백성들과 하나님이 계약하신 계약서가 십계명이고 그 십계명을 사십년간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실행하며 공통된 입장을 만든 것이 율법이고 그 기록이 모세오경의 다른 성경인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된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경륜이 십계명으로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고, 그 정신을 예수님이 한마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정리하셔서 오늘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대강령(大綱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마5:18)는 말씀을 일점일획(一點一劃)도 보태거나 감하지 않고 지켜가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을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고, 그 위임받은 대표적인 증인공동체가 교회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위임받음을 어떻게 잘 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모습이 오늘날 개신교의 교파입니다. 구세군은 군대식으로 해야 효과가 있다고 굳게 믿고 신입교인부터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군대식으로 조직하고 운영합니다. 감독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선교를 해야 큰 효과가 있더라는 생각이 오늘날 감리교회를 낳았습니다. 아니지 모든 것은 평신도 대표와 목사가 다 다른 역할을 하는 장로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장로교회입니다. 설교하고 성찬집례를 하는 장로가 목사이고 교회의 행정과 살림하는 장로가 함께 교회를 이끌어간다는 생각을 하는 교회가 장로교회입니다. 유권사님, 일점일획도, 구약성서를 기록한 히브리어의 점 중심의 문자와 신약성서의 헬라어 획 중심의 문자를 생각하면 신구약의 말씀 속에 있는 정신이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구약의 점(點),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약의 획(劃)이 일점일획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