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자

 

가랑비가 내렸다! 한여름이라도 된 듯 고온으로 기승을 부리던 변덕스러운 날씨는 꽃샘추위를 몰고 온 것인지 매섭고 싸늘하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처럼 하늘도 찌뿌둥하다. 주말마다 혹사? 당하던 몸뚱어리는 일찌감치 움츠러들어 모든 것이 귀찮은 듯 시큰둥하다. 육신이 반역을 하기 전에 오늘은 쉬어야 하겠다. 손질하려고 꺼내 놓았던 분재를 밀쳐 놓고 책을 꺼내 들었다.

 세계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도스토옙스키의 최후의 걸작, 소설“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다. 다시 읽어도 늘 새롭게 다가와 가슴을 두드리는 책이다. “40년간에 걸친 문학적 경험을 축적한 노련한 작가의 문학적 결산이다. 인류의 운명을 직시하며 고뇌와 회의를 거듭한 예언자의 철학자적 귀결인 종교적 예언서이기도 하다” 라고 역자는 해설을 덧붙였다.

 그렇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인간의 심리적 반응과 노골적인 조롱과 비판은 벌거벗은 심연을 들여다보게 한다. 때로는 비열하고 저급한 인간으로 때로는 가장 고상하고 그럴싸하게 포장된 악마의 실체를 본다. 현실적인 모순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시대를 살아냈던 작가가 절박하게 여겼던 사회적 문제와 신음하는 민중들의 고통 가운데서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행간행간 따라 들어가면 갈수록 동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은 대단한 문장력 때문만은 아니다. 올곧게 자리잡고 있는 작가의 살아있는 철학과 영성이다. 그는 정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도덕적붕괴와 사회적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인적 성향과 사상을 통하여 들추어내는 번지레한 삶과 종교, 황금만능 주의의 허울좋은 신앙은 이 시대도 다르지 않음에 통탄한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사랑은 영원한 구원의 강으로 세기를 흐르니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내가 먼저 변할 일이다. 범사에 그리하듯 몰입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니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어스름해지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다 놀랐다. 이 층 베란다 끝으로 시비프루나(Sibipiruna)가 탐스러운 노란 꽃송이를 바리바리 펼쳐 놓고 금물결처럼 넘실거린다. 창틀에 다가서니 뭉게구름 같은 유칼립투스의 뽀얀 꽃잎들이 싸락눈처럼 조신하게 날린다.

 우와~~~! 그리던 님인 양 화들짝 반겼다. 이리 고운 봄날을 안고 오시 다니……문득 스쳐 가는 생각에 울컥하였다. 초겨울 길목에 수없이 피었다 지는 이빼를 무심히 보았던 것처럼, 고목이 되도록 내 집 창밖에서 홀로 피고지고 또 피는 꽃을 이제서야 보고 감탄하고 있다. 그 많은 세월 나는 무엇을 찾아 어디를 헤매느라 우두커니 빈들에 세워 두었을까? 시름들이 밀려오는 상념들과 함께 눈물이 핑 돌고 목이 멘다.

 무슨 연유로 이생의 아름다운 선물도 향유享有하지 못할 만큼 각박한 삶을 살았을까? 우선 멈춤을 할 줄 모르는 고장 난 신호등처럼 숨 막히도록 분주하게 생의 끝자락을 향하여 달려가느라 눈길 한번 줄 여유가 없었나 보다. 그러면서도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고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는 아이러니한 주제다. 오늘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생명의 신비로운 향연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한없이 부끄럽다! 인생의 모래바람이 부는 날까지 나는 주님을 창밖에 우두커니 세워 두었다. 흑 암의 깊은 나락에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분의 아름다운 광채를 발견하였다. 아주 먼 길을 돌아오느라 쓸쓸히 문밖에 계신 것을 몰랐다. 그 모습 보이지 않아 무심히 스쳐 가고, 그 음성 들리지 않아 문을 열어 드리지 못해도 빈 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나를 포기하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지켜보셨다.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며 당신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예배자로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가랑비가 내려야만 번거로운 시선이 님의 눈동자에 머무는가 보다. 온갖 상처와 허물로 얼룩진 초라한 속내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천지가 개벽하여도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다! 잔인한 세파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나무처럼 존귀 한 임으로 가득 찬 물빛 가슴이 되고 싶다.

 창밖엔 시절이 님의 숨결처럼 여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