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성 목사(브라질선교교회 담임)
유권사님, 우리가 살면서 고집불통이란 말을 듣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주장한 것을 절대로 내려놓지 않고 부러지면 부러졌지 휘지는 않는 강철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평화를 누리며 같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보가 안 되는 주장과 양보할 관용
그렇게 끝까지 주장하며 자기의견을 관철시키면서 사는 게 인생의 목표라고 한다면 외골수는 될지 모르지만 조화와 관용, 타협과 일치에 대한 맛은 평생 모르면서 살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유권사님, 목숨 내대고 관철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화를 만들어 가는 타협의 정신을 강조하는 말씀들도 있지 않습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최고의 덕목으로 말씀하시면서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이 세 가지 최고의 가치 중에서 타협과 순교 정신에서 본다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요? 박해시대를 살고 있는 초대교회, 특별히 고린도교회를 생각한다면 믿음과 소망의 가치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가치를 더 귀히 여기는 사도바울의 기독교 해석이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자라난 환경에 따라서 태어난 곳의 문화에 따라서 기독교를 이해하는 진폭이 다르고, 지역의 문화가 반영된 교회의 성격도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긴 같은 한국에 살면서도 경상도의 기독교와 전라도의 기독교가 사실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그런가 하면 충청도와 경기도의 교회환경이 조금 달라서 대부분이 분위기가 부숭부숭한 충청도 목회지를 선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든 목회지를 정하고 그 지역의 교우들과 잘 지내려면 그 지역의 문화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부임지가 정해지면 그 지역에서 오래 목회하신 선배목사님을 찾아가서 부임인사를 하면서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민 목회를 하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로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이민문화에 따라서 목회의 색깔도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10년전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와 지금은 목회현장이 사뭇 달라졌습니다.
동성애와 결혼, 자녀들의 법적문제
제가 교우들과 목회를 하면서 “주 안에서 주장”이란 말은 순교까지 각오하는 것,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타협”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여러 가지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며,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일”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순교정신으로 수호할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환경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방법이나 규칙은 얼마든지 그 교회의 전통과 문화, 구성원들의 삶의 현장의 어려움이 반영된 타협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일성수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지만 오전 11시 예배나 저녁 7시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얼마든지 타협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계명 자체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 정신을 지켜가는 가운데 타협할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신경도 성도들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정한 계명이고 지켜가야 할 큰 울타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가장 심각하게 접하는 동성애와 동성결혼과 동성애 가정의 자녀의 법적인 문제 등등을 ‘주장과 실천’의 기독교문화 속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할지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