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캐스피언: 시험에 대한 태도(2)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현실 가운데 당하는 시험 앞에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몰랐을까?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 하나님께서 표적과 섭리로 그들을 거기까지 인도해 오셨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또 모세를 원망하였다.
시험 앞에서, 그들이 이렇게 실패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까? 그들은 틀림없이 과거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유추하려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 생각하고, 알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답을 알아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실패했을까? 그들이 유추하여 알아낸 답을 시험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식을 자기가 당한 현실에서 실행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험 가운데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는 것, 그것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것을 실행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현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보다 훨씬 커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의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의지가 없기 때문에 용기를 발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의도대로 실행할 용기와 의지가 없을까? 그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그 정도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인간 본성의 죄악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종교에 속박당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시험하실 때 요구하시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더라도, 그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 프랜시스 쉐퍼의 표현대로 “여전히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슬란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백성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하여, 자기 백성이 여전히 자기를 신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루시가 오빠들과 언니를 아슬란에게 데려가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아슬란은 먼저 루시에게 나타나 그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명한다. 기쁨에 충만한 루시는 피터와 수잔, 그리고 에드먼드에게 이 사실을 전한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시를 의심했다. 그들 눈에는 아슬란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터는 과거 아슬란의 역사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슬란 님이 우리한테는 왜 안보이시지?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잖아. 이건 그분 답지 않아.” 하지만 동일하게 과거를 돌아본 에드먼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중 제일 먼저 나니아를 발견한 사람은 루시였어.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루시 말을 믿지 않았지. 특히 내가 제일 심했다는 거 알아. 하지만 결국 루시가 옳았어. 이번에도 루시를 믿는 것이 공평하지 않을까?” 결국 루시를 따라가며 아슬란을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에드먼드이다. 그리고 피터가 제일 늦게 보게 된다.
그렇다. 시험에 대한 바른 태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