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샤스타: 자유와 섭리(3)
예수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그 길에서, 주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우리에게 지워 주시는 의무를 자유롭게 수행하는 것이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섭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합력’을 신학에서 ‘동시발생 교리’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가장 적합한 때에 일어나게 하신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이 ‘모든 것’에는 환난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까지도 선을 이루는 것에 쓰신다. 그러한 환난까지도 우리에게 선으로 적용되게끔 하신다.
그것을 알고 또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고난을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인내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을 섭리로 돌보시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우리를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이나 모든 좋은 일이 다 선으로 적용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은 진정한 기독교인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난과 같은,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도 언젠가는 지나가더라 하는 막연한 기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나’와 ‘내 손해’가 중심이 되는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와, 나에게 안 좋은 것이 중심이 되어 있는 막연한 기대에는 섭리에 대한 신뢰가 없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믿는다면, 그 약속을 신뢰함으로 매일 한 걸음씩 인내로 주님을 따라간다면, 주님께서 지우신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나간다면, ‘인생사 새옹지마다’ 하는 말이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말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섭리는 오직 자유롭게 된 사람,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에게 확연하게 드러난다. 다시 한 번 은둔자가 브리에게 한 말을 기억해보자. “착한 말아, 너는 그저 자만심을 잃었을 뿐이란다… 겸손해 지려면 옳은 말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아야 해. 넌 그렇게 대단한 말이 아니다… 나니아에서는 어림없어. [하지만] 너 스스로 남보다 뛰어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썩 괜찮은 말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우리는 그 어떤 힘든 일에서도 인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말들이니까 훨씬 더 힘든 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다 나니아를 위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이 자기 부인과 이 자유, 이 인내에 예수님의 위대한 약속이 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열매 맺는 자니라(눅 8:15).” “시험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