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의 문화탐방)나니아 연대기: 구원 그 이후 36
2024/08/24 00:5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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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샤스타: 자유와 섭리(2)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구원을 베푸신 전능자의 섭리가 그 어떤 틈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듭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필요가 있으신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사랑은 사랑을 하는 당사자들이 자유로울 때 성립된다. 즉, 자유는 사랑의 대전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와 이 세상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그리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가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또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이 자유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우시는 멍에와 우리에게 주시는 짐을 기쁘게 지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이 ‘사랑의 멍에’, ‘사랑의 짐’이란 바로 ‘자기 십자가’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즉, 이 ‘사랑의 짐’은 자기 부인이 되어 있는 사람이 지는 각자의 십자가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질 수 없다는 뜻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 14:26).” 예수님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참된 안식을 얻는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자기 십자가’란 자기 부인하는 예수님의 제자 각자의 책무이다. 지극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그 사랑 안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우리를 해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부과하시는 사랑의 짐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이 의무는 자유로워야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휜의 말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자유로운 말들이니까 훨씬 더 힘든 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다 나니아를 위한 일이잖아요.”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며, 그 길에서 자유롭게 지는 책무를 성실하게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섭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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