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수잔: 전제론적 사고
구원의 신앙이 삶의 전제인지 아닌지 아는 두 번째 방법은 이것이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은혜에 들어간 사람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환난을 겪는다고 한다. 그것도 즐거워하면서 인내한다고 한다(롬 5:1-5). 여기에 쓰인 단어가 중요하다. ‘인내’이지 ‘극복’이 아니다. ‘연단’이지, ‘승리’가 아니다.
이 환난과 인내는 부활의 영광을 이루는 필수적 요인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 두 가지, 즉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단지 이론적인 것일 뿐이고, 실제 생활은 꼭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이것은 마음의 방향성이 예수님과 그 말씀으로 향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수잔은 자기가 지금껏 상식적인 것이 논리적인 것이라는 당연한 것이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커크 교수가 루시의 주장에 대한 세 가지 논리적인 가정을 제시했을 때, 그녀는 말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하죠?” 만약 커크 교수가 말한 것이 논리적인 것이라면,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오지 않고 살아오지 않았던 자기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이것은 의외로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의 생각과 삶을 모조리 부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옷장을 통하여 마침내 페번시 가의 4남매가 모두 나니아에 가게 되자, 수잔은 동일한 질문을 한다. “이제 우린 뭘 하지?” 지금까지 나니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오지 않았던 자기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정밀한 논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수잔은 또한 적극성을 지닌 용감한 아이였던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나중에 산타 클로스에게 받은 선물인 활이다. 활은 고도의 집중력과 정밀한 사고를 사용해야 함과 동시에 용기와 과감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감정적 무모함이 논리적 사고를 지배하게 될 때가 있다. 이것을 보완하는 것이 바로 산타의 다른 선물인 뿔나팔이다. 뿔나팔은 내적으로는 각성을 가져오고, 외적으로는 남의 도움을 받게 한다.
수잔의 이러한 성격은 세심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얀 마녀와 협상 이후, 전투 작전을 의논하는 아슬란의 말과 행동에서 그의 감정적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루시와 함께 그를 찾아 나섰다. 과연 그는 큰 일을 앞두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그는 사랑하는 에드먼드를 위하여 마녀 손에 죽으러 가는 길이었다. 극도로 큰 슬픔과 외로움 가운데 있던 아슬란은 수잔과 루시의 동행을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의 모욕적인 죽음을 목격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그녀들이 그의 영광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게 한다. 논리가 올바른 전제 위에 세워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 된다. 또한, 논리로 올바른 사고를 하게 되었는데 용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간다면, 그것은 비겁한 것이 되거나 만용이 된다. 올바른 전제와 논리, 그리고 용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건강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