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용주 목사(봉헤치로 제일교회 담임)
디고리: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아슬란이 디고리에게 요구한 것은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과 동일하다. 그는 디고리가 먼저 자기 자존심을 내려놓고 남을 탓하지 말라고 한다. 즉, 자기 부인을 요구한 것이다. 디고리가 그렇게 하자, 그제서야 그는 디고리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즉, 자기 십자가를 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디고리는 아슬란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날마다 그를 따르게 된 것이다.
누가 예수님의 나라에서 더 높은가를 두고 서로 싸우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바로 이 세 가지를 제자의 조건으로 요구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런데 사도행전 11장 26절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기 이전에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이 ‘제자’ 라는 단어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자기 부인과 자기 인정이 공존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시인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자기 뜻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길은 없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디고리: 이야기는 계속된다
바로 이 원리를 디고리에게서 보게 된다. 그는 서쪽 동산에서 딴 사과를 아슬란에게 내놓았다. 아슬란은 그 사과의 씨를 땅에 심어 나니아를 수호하는 나무가 되게 하였다. 모든 일이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아픈 엄마를 걱정하고 있는 디고리에게, 아슬란은 엄마의 병 치유를 위한 사과 하나를 따도록 한다. “지금, 너에게 기쁨을 선사할 것을 주겠다. (…) 가라. 너희 어머니를 위해 저 나무에서 사과를 따거라.” 먼저 아슬란의 뜻을 행하자, 그가 모든 것을 더해준 것이다.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디고리는 엄마에게 사과를 드렸고, 엄마는 의사가 놀랠 정도로 기적적으로 병에서 나았다. 영국을 떠났던 아빠도 돌아왔다. 디고리는 사과 씨앗을 앤드루 삼촌의 반지와 함께 뒷마당에 묻었는데, 그것이 매우 빨리 자라 아름답고 향기로운 사과나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나무가 큰 바람을 맞고 쓰러져 죽게 되었다. 이를 딱히 여긴 디고리는 엄마의 생명의 은인인 이 나무로 큰 옷장을 만들어 아빠가 상속한 박물관과 같은 대저택 안에 두었다.
그 후, 아빠와 엄마와 행복하게 살던 디고리는 공부를 많이 해서 유명한 학자이자 교수이자 위대한 탐험가가 되었고, 아빠에게서 상속받은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전쟁 도중 독일이 런던을 폭격했을 때가 있었는데, 런던에 살던 페번시 가문의 4남매는 시골로 피신해야 했다. 그들은 ‘커크’ 교수라는 사람의 저택으로 가도록 되어 있었다.
디고리의 성은 ‘커크’ 였다. 나이를 많이 먹은 그는 커크 교수라 불렸다.